54화
…두 번째 죽음.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인해 등이 축축하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린 나는 끔직한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심장이 타는 듯이 뜨겁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끄으으윽!”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한 뢴달이 물었다.
“…지그하르트?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냐?”
“우우웁!”
속이 매스껍다.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아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쿵! 쿵!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그러나 통증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 몸에 흐르는 피가 마치 용암 같았다.
용암이 전신을 흐르는 것 같은 끔직한 고통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목을 긁었다.
벅벅. 벅벅.
살갗이 벗겨진 목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린다.
“……자네.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남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그는 내게서 어떤 이변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질문에 대꾸를 해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또 죽$#^네? 그만 포기하라니까? 왜 사서 고생을 해. 어차피 너는 패#%^자야. 그 끝은 지옥이고. 너도 알잖아?
-이번은 버*지만, 다음*? 너도 곧 레이첼 같은 꼴이 될 거야. 이성을 잃고, 본능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살육만을 반**하는 끔직한 괴물이. 어때? 차%& 그게 더 나을 거 같지 않아?
-병신. 쓰레기. 패배자. 버러지. 구제불능. 위선자.
“흐흐흐흐.”
웃음이 새어나왔다.
갑자기 정신 나간 것처럼 웃는 나를 보면 남들은 미쳤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니다.
아닌가?
이미 반쯤 미쳤을지도 모른다. 몰라.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마기…. 분명 마기였어….’
활로를 찾아냈다.
【계약자여. 또 죽은 것이냐? 고작 두 번 회귀한 것만으로도 이 지경이니… 앞으로 얼마 버티지 못하겠구나. 영혼이 먼저 소멸할 것인지, 그 전에 정신이 붕괴되어 이블이 될 것인지 궁금하군. 어찌 된 게 내 사도란 것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길을 걷는 것인가.】
문득.
지그하르트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전설적 영웅인 시온 지그하르트가 그녀의 사도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온 지그하르트도 너의 사도였다고 했었지. 분명 네 입으로 나 이전에 사도는 하나 뿐 이었고, 인간이 아닌 마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시온 지그하르트는 인간이잖아?’
【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었던 존재다. 그는 결국 인간의 몸에 신격을 얻어 나와 같은 마신이 되었지. 여러모로 재밌는 인간이었다. 방랑벽이라도 있는 것인지 한 곳에 머물러 있지를 못했다.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같았지.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며 때로는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뱉었지. 먼 미래를 위한 ‘안배’라던가.】
…인간이 마신이 되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거기에 미래를 위한 안배라니.
대체 뭘 준비하고 있던 걸까.
그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신격을 얻어 신이 되는 게 가능한 것인가? 시온 지그하르트는 어떻게 마신이 되었지?’
【불가능 하지는 않지. 이 몸이 직접 보았으니. 너희 인간들이 별의 이름을 붙여 초월자라고 떠받드는 존재들이 있지 않느냐. 그들의 무위는 하늘에 닿고 있으니 적당한 깨달음과 그에 걸 맞는 업적만 지니고 있다면야 최소한의 신격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시온은 그러한 방법으로 신격을 얻은 것이 아니지. 그는 마성(魔性)을 극복하여 신이 되었다.】
‘마성…?’
【그렇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는 마기에 침식당해 이블이 되었었다. 온갖 권능을 남용한 대가였지. 그가 제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었다고는 하나 결국에는 인간.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이성을 되찾았다. 마성을 극복하고, 끝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
그만한 위인이 이블이 되었다면 그 여파도 엄청났을 터였다.
애초에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강력한 무인이라도 결코 이성을 되찾을 수 없다.
소멸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력으로 이성을 되찾고, 나아가 신격을 얻어 마신이 되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처음이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이 몸조차 그런 인간은 처음 봤지. 정신력 하나 만큼은 이 몸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설마 마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바알의 마기를 지니고 있는 네놈도 가능할지 모르지.】
잠깐.
바알이라고…?
‘갑자기 그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그렇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냐? 하하하하! 재미있구나. 그래, 네놈이라고 전부 다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
‘…제대로 설명해줘.’
【이 몸과 같은 상위 마신이 어째서 네놈 아니, ‘아벨 크로이’ 따위의 하찮은 인간과 직접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하지?】
‘재능이 뛰어났다거나… 아니면 뭐 재미 삼아 한 거 아니야?’
【그놈보다 재능이 뛰어난 인간들은 지천에 널렸지. 허나 내가 그놈을 택한 이유는 바로 바알의 흔적 때문이다. 그놈의 얼굴 절반을 뒤덮은 흉터. 버러지 같은 마신들은 그저 상위 마신의 낙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바알의 기운이었다. 너무도 미약한 탓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 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놈에게 수 천, 수 만 번 덤벼든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벨 크로이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흉터가 바알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디테일 한 설정을 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 해야 작위를 지닌 악마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지옥의 지배자.
바알이라니….
생각해보면 인간과 접점이 거의 없는 아스모데우스와 같은 최상위 마신이 콕 집어서 아벨 크로이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허나 왜 하필 바알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 몸도 모르지. 허나 호기심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만약 내게 영혼을 대가로 받치지 않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을 테지. 고작 인간 따위가 바알의 마기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않느냐.】
흑마술에 유독 두각을 나타낸 것도 전부 이 때문이었나.
“하하.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내가 자조적으로 말을 내뱉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평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로만조차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
어쩌면 내가 세웠던 계획을 전면으로 수정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값진 정보였다.
허나 이 정보들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옥 같은 루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스모데우스. 무의 경계를 사용하게 되면 원시회귀는 발동 되는 가?’
【네놈이 이 몸처럼 세밀하게 다룰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 네놈의 수준으로는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충분하다.
어차피 기회는 한 번뿐.
이번 회 차에 모든 걸 걸겠다.
‘마지막이다.’
거대한 마나가 저택 전체를 뒤덮는다.
이 다음에는….
“아아…!! 벌써 이곳까지 도달한 것인가…. 이리도 허무하게 끝이 나다니, 결국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정해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냐! 참으로 짓궂구나, 마신이여! 희망의 끝에서 무너져 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겠지! 결국에는 나를 능멸하기 위해 이러한 권능을 내린 것이었구나!"
미래를 본 라다무스가 절망적으로 소리친다.
…시작됐다.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허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도 모두가 죽었습니까?”
라다무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걸…….”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영감님이 무엇을 보았든 이번에는 그리 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
바꿀 것이다.
내 손으로.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눈을 감고 마기를 끓어 올렸다. 권능을 사용한 후유증인지 전보다 더 거칠고, 흉흉하게 날뛰었다.
그러나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머리 위로 거대한 창 한 자루가 날아올랐다.
막대한 양의 마기를 한 데 모아 응축시켜 만들어낸 것이었다.
힘을 여러 개로 분산시키는 것보다는 한 곳의 집중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편이 다루기도 쉬웠다.
응축된 마기의 형태는 창이라기보다는 공성추 쪽에 가까웠다.
외팔 검객이라는 성문을 부수기 위한 공성병기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듀라한을 소환했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목을 든 기수가 방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그닥. 다그닥.
내 옆에 선 그녀가 검을 쥔 채 명령을 기다렸다.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 부름에 답해주는 그녀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뒤이어 마창을 소환했다.
“악시온(axion)."
창을 손에 쥔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서서히 한계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육체는 회귀하더라도, 내 정신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는 강화마법이었다.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조리 때려 부울 생각이다.
마력 탈진이 오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번에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으니까.
머릿속으로만 구상했던 술식을 직접 구현한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기에 정상적으로 발동할지는 미지수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다양한 강화술식들을 극한으로 압축하여, 전신에 때려 박는다.
모든 종류의 강화를 오로지 하나의 술식으로 통합. 마법이 끝난 이후에 찾아올 반동은 생각지 않는다.
“초강화(超强化).”
화르르륵!!
폭발적인 마나의 흐름에 대기가 요동친다.
단순히 마법을 발동시킨 것만으로 공간 전체가 진동을 했다.
전신을 뒤덮은 보랏빛 기운이 뚜렷한 형태를 가진다. 이글거리며 피어난 자색 불꽃이 내 몸을 집어삼킨다.
지금껏 사용했던 강화마법과는 격이 달랐다.
마력의 영향으로 검은 머리칼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이내 내 몸을 둘러싸던 불꽃의 표면 위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합쳐져 검게 물들었다. 내 서클의 일부분이 마기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기와 마법의 융합(融合).
전대미문의 발상이었다.
아니, 애초에 마기로 만든 서클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초가속(超加速).”
불꽃같은 형상을 하고 있던 검보라빛 기운은 이내 쇠사슬과 같은 형태가 되어 내 전신을 감쌌다.
툭.
발을 한 번 내딛자 공기가 밀려나며 주변 일대의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고작 5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체감했다.
꺼지기 직전의 불꽃이 가장 밝게 빛난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가 딱 그 상황이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마나를 쥐어짜내 방안에 있는 모든 인원에게 강화마법을 부여했다.
보조 마법사로서의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던 분야다.
…이로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숨죽인 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쿵!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그가 온다.
속으로 숫자를 셌다.
그가 이 방안으로 들어오기까지의 시간.
‘하나.’
저벅. 저벅.
‘둘.’
저벅. 저벅.
‘셋!’
그가 방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마기를 응축하여 만든 거대한 공성추가 그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