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94화 (94/180)

94화

“눈이라고 하시면…….”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저 대신 아카데미 내부에 잠입해 있는 이교도들을 색출해 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건가?

“저는 그저 평범한 학생에 불과합니다. 저 따위가 추기경님의 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하하. 그대만큼 적합한 인물도, 신뢰할 수 있는 인물도 없습니다. 제가 직접 그대를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저는 확신합니다. 그대라면 충분히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이건 라파엘 교단 추기경으로서의 명령입니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부탁입니다. 라파엘교의 추기경 이전에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하는 부탁.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장차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야 할 인물들입니다. 그야 말로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죠. 어른으로서는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그들이야말로 이 제국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갈 희망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추기경의 눈이라…….

그게 굳이 내가 될 이유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것도 영웅의 후예라는 배경 때문인가?

어쩌면 나 이외에도 이런 부탁을 한 학생들이 여럿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눈이 꼭 한 개일 필요는 없는 거니까.

“교단의 교인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국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다양한 학생들이 이곳 살로몬 아카데미에 있지 않습니까? 그들 모두를 감시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합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아마 이번 아카데미 사건 이후로 교단 측에서도 아카데미 내부에 교인들을 배치하긴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학생들은 학생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지요. 영웅의 후예이며, 올바른 신념을 지니고 있는 그대라면 제 바람을 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

“아니. 그대여야만 합니다.”

아까 전 보았던 불쾌하고, 교활한 눈빛은 마치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지금 그의 눈은 신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들의 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힘을 보태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이상 교단과 직접적으로 얽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추기경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오히려 거절하는 쪽이 애써 얻은 신뢰를 져버리고, 더욱 의심을 사게 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기꺼이 따르도록 하지요.”

그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박하고, 순수한 미소였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있을 것입니다. 그대가 보상을 바라고 제 부탁을 수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노력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요.”

“…주신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역시 저는 솔직한 사람이 좋습니다.”

이어서 추기경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이스가리옷.

현존하는 11명의 추기경 중 2번째 자리를 맡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는 앞으로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면 되고, 어떤 식으로 보고를 하면 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보고는 한 달의 한 번.

정기적으로 직접 만나서 듣는 것으로 정해졌다.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모든 설명을 마친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충분합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자일 지그하르트.”

추기경이 방을 나가고, 뒤이어 주교가 들어왔다.

“형제님. 대화는 잘 마무리 하셨습니까?”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지만, 상념에 잠겨 있는 내게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형제님…?”

‘아스타로트와 눈이라….’

* * *

어느덧 축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라파엘교의 대대적인 심문이 있은 이후 학생들의 불안감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지만 분위기는 더욱 좋지 않았다.

심문 결과.

대략 20여명 정도에 마신숭배자들이 색출되었기 때문이다.

사용인, 교관, 학생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흑마술사임이 밝혀졌고, 모두 교단으로 송치됨과 동시에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자신들과 지금까지 함께 수업을 듣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밥을 먹던 친구의 숨겨진 정체가 사실은 이계(異界)의 마신을 숭배하는 흑마술사였다는 진실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72교단의 교인들 중 흑마술사임이 밝혀진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러한 아카데미의 분위기 때문인지 이사장, 아슈타르에게서 새로운 지침이 내려왔다.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부득이하게 축제를 중지하고, 아카데미를 폐쇄하게 되었으나 축제의 마지막 날인만큼 오늘 하루는 다시 축제를 재개하겠다는 얘기였다.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것이겠지.’

물론. 외부인들의 출입은 여전히 금지다.

즉.

오로지 학생들을 위한 축제라고 볼 수 있었다.

학교 측에서도 나름대로 지금의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수를 짜낸 듯 했다.

극소수지만 몇몇 학생들 중에서는 축제가 중지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도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전처럼 모두가 즐기고, 행복해 할 수 는 없겠지만 학생들 사이에 새겨진 갈등의 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허나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나 같이 축제를 원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너무 많은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이제는 조금 쉬고 싶었다.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은 아니었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조금 지친 느낌.

그러나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사장이 내린 지침은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모든 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들었으면 빨리들 나가라. 나도 하기 싫은 건 마찬가지다. 허나 어쩌냐? 이사장 지침인걸.”

한 성깔 하는 벨라 트레이 또한 결국에는 아카데미의 교직원이었기에 이사장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벨라 트레이의 안내를 따라 근처에 있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내에는 여러 개의 운동장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운동장이었다. 기숙사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축제를 재개해?”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뭐 어때. 난 좋기만 한데. 솔직히 축제 그렇게 흐지부지 끝난 것도 아쉬웠는데 마지막이라도 제대로 장식하면 좋잖아?”

“나도 동감. 어차피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마신숭배자들은 전부 색출해냈으니 이제 안심하고 놀 수 있는 거 아니야?”

“야. 너는 그걸로 안심이 되냐? 이미 한 번 뚫렸는데 두 번이라고 안 뚫리겠어? 혹시 모르는 거야. 아직도 우리 주변에 마신숭배자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운동장 한 가운데에 놓아져 있는 장작과 거센 불꽃.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역시.

전통의 캠프파이어였다.

‘…쯧. 대체 누구 아이디어인지.’

그곳에는 B 클래스 학생들과 C 클래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가 무너져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당분간 우리 쪽 건물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이다.

또 한 편으로는 학생들을 의도적으로 분산시켜 놓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번처럼 한 곳에 학생들을 몰아넣었다가 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운동장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다른 클래스에 비해 인원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디로 가든 큰 상관은 없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B 클래스와 C 클래스의 학생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 야! S 클래스다. 6명 밖에 안 된다는 얘기는 실제로 보니까 진짜 초라하네.”

“근데 좀 멋있지 않냐? 약간 소수정예 같은 느낌? 실제로도 실력 하나는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잖아. 저기 저 검은 머리 여자애 보이지. 이름이… 아리아 발렌타인이었나? 내가 입학시험 마지막 때 쟤랑 같은 조였거든? 근데 진짜 장난 아니야.”

“왜왜. 어떤데?”

“지 혼자 마물들 사이에 저벅저벅 걸어가서 다 때려눕히는데… 아무리 환상이라지만 겁이 없다니까? 같은 여자인 나도 반할 뻔.”

“그러고 보니 저기 엘프도 있잖아. 그냥 엘프가 아니라 하이엘프라는데? 무슨 이종족 특수전형으로 입학했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있잖아. 이번에 악마가 나타났을 때 자일 지그하르트가 부상당한 학생들을 돕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더라고. 시민들 목숨도 여럿 구하고, 거기에 청십자회에 주교도 신세를 졌다더라.”

“와. 이렇게 보니까 장난 없네.”

나에 관한 건 얘기가 조금 부풀려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대부분 맞는 얘기였다.

다른 아이들도 겉으로는 안 듣는 척, 신경 안 쓰는 척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귀는 쫑긋 세운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아리아는 어떻게 안 걸리고 통과한 거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아마 그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오. 형님. 저기 좀 보십시오. 붉은 달입니다.”

나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이든이 얘기한대로 달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붉은 달이 뜨는 날 함께 춤을 춘 두 남녀는 미래의 배우자가 된다는 전설이 있지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런 전설이 어디 있어. 네가 방금 지어낸 거지?”

이든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닙니다! 진짜로 있다고요!”

“헛소리 하고 있…….”

그 순간.

갑자기 아라이 발렌타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있어. 진짜로. 나도 들어본 적 있어. 내가 살던 곳에서도 꽤 유명했던 전설이야. 진짜로 그렇게 된 사람들도 많았고.”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얘기가 놀라운 것이 아닌, 지금껏 거의 입을 열지 않고 있던 그녀가 적극적으로 말을 한 것이 놀라운 것이다.

“아리아……. 말 할 줄 알았군요…?”

아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샬럿 또한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도 처음 봐. 쟤 말할 줄 알았네?”

지루하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실프가 이때다 싶어 말했다.

“멍청한 붉은 머리 계집. 너의 기억력은 콩벌레 수준인가? 네년이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그날에도 저 인간은 말을 했었다.”

샬럿이 고개를 휙 돌리며 실프를 노려봤다.

“최근에 좀 잠잠하다 싶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봐? 네가 그렇게 무시하던 인.간.한테 먼지 나게 맞은 기억은 잊었나 보지?”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또 다시 언쟁을 시작했고, 우리는 끼어들지 않은 채 마음껏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보는 풍경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쟤는 안 싸우는 애가 없네. 운명이다, 운명.’

중앙에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어느덧 30분이 지났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피웅─!

퍼엉─!

운동장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도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니 오색빛깔의 불꽃들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학생들 중 한 명이 일어나 흘러나오는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하나 둘 씩 일어나 춤을 췄다.

뜬금없는 광경에 당황한 나는 주변을 살폈지만 S 클래스 학생들 중에 일어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어색함에 괜히 헛기침을 하거나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이런 광경이 꽤나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노래가 바뀌었다.

방금 나왔던 노래보다는 조금 더 느린 템포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선 아리아 발렌타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자일 지그하르트. 나와 같이 춤추지 않을래?”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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