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그녀에게 물었다.
“……나?”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일 지그하르트라고 했잖아. 여기 자일 지그하르트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 그렇긴 하지. 근데 왜 하필 나랑…?”
“그냥.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 그래.”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샬럿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프레이는…….
음.
생략하겠다.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한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
그녀가 내 손을 이끌고 연무장 바깥 자리로 향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아리아 발렌타인이 리듬에 맞춰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춤이라고는 도수체조 외에 쳐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녀의 발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혹여라도 그녀의 발을 밟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몸을 움직였다.
“어때? 보아하니 춤은 처음 춰보는 거 같은데.”
“…네. 어렵네요.”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원래 처음은 다 그래. 나도 예전에 그랬어. 몸에 힘을 조금 더 빼봐.”
그녀가 말하는 대로 나는 몸의 힘을 뺐다.
그러자 딱딱했던 몸동작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렇지. 이제 천천히 움직여. 나를 따라서.”
파트너가 있어서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춤이라는 형태가 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가 손을 잡고 이끄는 방향대로 리듬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의 몸짓을 최대한 흉내내며 호흡을 맞췄다.
“원래 이렇게 춤을 추는 문화가 당연한 건가요?”
전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발을 따라갔다.
연애 경험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여자의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춘 적은 처음이라 남사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이렇게 춤을 추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해보였다.
아, 물론. S 클래스 인원은 제외하고.
양반은 못 되는지 어느새 일어난 이든이 실프의 손을 붙자고 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인건지.
그냥 뻔뻔한 놈인 거 같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인간이 아닌데? 오히려 반인반마인 네가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당황한 내가 빠르게 얼버무렸다.
“아. 저희 마을에서는 이렇게 춤을 춘 적이 거의 없어서요.”
“그래? 너희는 그런지 몰라도 내가 살던 곳은 이게 당연한 거야. 대충 보아하니 여기 인간들도 그런 것 같네. 축제라고 하면 마지막은 대부분 춤을 추니까. 춤만큼 감정을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위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러고 보니 드렌트들의 마을에서 축제를 했을 때도 춤을 추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구상하고, 창조한 세계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러한 문화들을 보면 새삼 이곳이 소설 속 세계 따위가 아닌 별개의 다른 세계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이들도 단순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도.
“갑자기 내가 왜 춤을 추자고 한 건지 궁금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순히 저에게 호감이 있어서 춤을 추자고 하신 건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그녀가 풉, 하고 웃었다.
“호감이 없지는 않지. 그러니까 너를 살려두고 있을 테니까.”
살벌한 소리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뱉는 그녀였다.
“그건 다행이네요.”
“궁금한 게 있어서 불러낸 거야. 저기서 얘기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새벽에 너를 찾아갈 수도 없고. 마침 기회가 좋은 거 같아서.”
역시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어떤 게 궁금하신가요?”
“라파엘 교단의 성직자들에게 네가 마족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들키지 않았는지.”
“겉으로 보면 인간이랑 다를 게 없잖아요? 뿔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니?”
외형적 특징이 없다고 할지라도 고위 성직자라면 마족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저는 어머니의 피를 더 진하게 이어 받았는지 마족으로서의 특징이 그리 많지 않아요. 몸 안에 마기가 있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나를 사용해서 그런지 이제는 뭐가 마기고, 뭐가 마나인지 모를 정도로 동화되었나 보더라고요.”
“동화되었다고는 해도 교단의 주교쯤 되는 인물이 그 미약한 마기를 느끼지 못할 리는 없을 텐데?”
“그렇죠.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카데미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고 그 다음 날. 제 몸에 깃든 마기를 추출해냈습니다.”
그녀의 발이 멈추었다. 그녀가 상당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마기를 추출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내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다시 춤을 재개했다.
“제가 자신 있는 것 중 하나가 마력의 운용이거든요. 마나도 이렇게 다룰 수 있는데 마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예전부터 연습해왔었는데 되더라고요? 아, 영구적인 건 아니에요. 길어봤자 3일, 최대 4일 정도? 그 이상은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마기를 추출 한다고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덕분에 정체를 걸리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죠. 이 능력을 익히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죽었겠지.”
“아마 그렇겠죠? 제가 반인반마(半印半魔)라는 사실을 들키면 흑마술사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겠죠? 결백을 주장한다고 한들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인간들은 원래 그래. 본인들이 믿는 신을 제외하면 모든 신들을 이단으로 몰고, 다른 종족의 피가 섞여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증오하지.”
“…….”
“뭐. 어쨌든 대단하네. 개인적으로 네가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했어. 내 도움이 필요했으면 진작 나를 찾아왔겠지만.”
“저도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나요?”
“말해.”
“아리아님은 어떻게 넘어가신 거죠? 저야 반인반마라지만… 아리아 님은 순혈 마족… 그것도 마왕님의 핏줄이시잖아요.”
그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순혈이라……. 그래. 네가 보기에는 그렇겠지.”
나는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혹시 말 실수를 했나요?”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녀가 왜 저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도. 구태여 내게 춤을 추자고 말하며 나에게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도 본인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반쪽짜리지만 그래도 동족인 나를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순혈 마족인 내가 어떻게 정체를 들키지 않았냐고 물었지?”
“예. 말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리아 님을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둔한 건지… 알 수가 없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나도 너랑 같은 반인반마(半人半魔)거든.”
이번에는 내가 발을 멈추었다.
갑자기 발을 멈추는 바람에 스텝이 꼬여 넘어질 뻔 했지만, 그녀가 내 몸을 지탱해주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들 또한 전부 철저히 계산된 것들이었다.
그녀가 인간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은 진즉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충격이 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와 같은 반인반마(半人半魔)라고요…?”
“그래. 마왕의 딸인 내가 인간의 핏줄을 이었다니 믿을 수 없겠지. 그럴 만도 해. 마족들 중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으니까.”
“그런 중요한 비밀을 어째서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종의 동질감이라고 할까. 널 보고 있으면 자꾸 내가 떠오르더라고. 뭐 이 정도면 내가 왜 심문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해. 어서 발 움직여.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우리 비밀스러운 얘기 하고 있습니다. 라고 소문이라도 낼 셈이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우리 주변에서 미세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얘기를 하기 전에 이미 그녀가 소음 차단 마법을 사용한 듯 했다.
나는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경쾌한 노래로 바뀌었다.
음악이 바뀌자, 그녀는 박자에 맞게 나를 더 격렬하게 리드했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지금도 제가 들은 말이 정말 진실인지 믿을 수가 없군요.”
“당연한 거야. 마왕의 딸이 반인반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 나라가 발칵 뒤집어질걸? 그러니까 지금까지 철저히 숨겼던 거고.”
“……지금껏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녀가 풉,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야? 마왕의 딸인 나도 너와 같은 반인반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이제 뭔가 막 친근하고 그래?”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 숨기고 있는 게 있고,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그저 무엇인가를 숨기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이해하고 있는 것 뿐 입니다. 저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불현듯 내 발을 밟았다.
실수라고 하기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명백한 고의성이 느껴졌다.
“악! 아리아 님……?”
“재수 없어. 모든 걸 이해한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 이해 따위를 바라고 너에게 말한 게 아니니까. 나도 아버님께서 왜 그런 여자와 사랑을 한 것인지, 마족이 왜 인간을 사랑한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 결국은 자식도, 남편도 버리고 갈 여자를 왜 사랑한 건지…… 미련하게…….”
“아리아 님이 인간들의 아카데미에 오게 된 것도 혹시 어머님과 관련이 있으신 겁니까?”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너에게 질문하라고 한 적은 없을 텐데? 내가 말 좀 걸어줬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니야? 이제 막 선을 넘네?”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내리까는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고작 꾸지람 좀 들었다고 그렇게 토라지는 놈이 대체 무슨 나라를 바꾸고, 인간들을 바꾸겠다는 건지…….”
“그때 제가 아리아님께 드렸던 얘기들은 전부 진심입니다.”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보아 하니 운은 좀 좋은 것 같긴 하네.”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는…….”
석양처럼 붉은 그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인간이란 족속들을 이 대륙에서 전부 지워버리기 위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