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메이지 공작가의 가주 집무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단안경을 착용한 중년 남성이 책상 앞에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다.
똑똑.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붉은 머리칼의 여인.
“부르셨어요. 아버님.”
메이지 공작가의 장녀이자 용사파티의 일원이었던 린 메이지였다.
“앉아라.”
그의 말 한 마디에 린 메이지가 자리에 앉았다.
“하실 말씀이 무엇이죠?”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한결 같은 고압적인 말투.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누구에게도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던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왕을 토벌하고 돌아온 지도 꽤 됐건만 마땅한 성취를 보이는 거 같지 않구나. 휴식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후에 계획은 있느냐?”
“마탑으로 돌아가 원래 진행하던 연구를 이어서 할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의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마탑? 그 빌어먹을 책벌레들과 어울려서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지?”
“마법의 기본은 이론이라는 사실을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론에만 억매이다가 실전에 도태되어 죽게 되는 것이다. 목숨이 걸린 전투에서 마법을 활용할 줄도 모르는 마탑의 책벌레들과 어울리면 너 또한 물들게 될 거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마왕을 토벌하고 온 저에게 실전을 운운하다니요.”
아크 메이지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고 고요한 시선.
“마왕…? 린. 너는 정말 그까짓 마족들을 제국이 처리하지 못해서 너희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정말 인류를 대표하는 영웅이라는 헛된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용사는 인류 최강의 전력이 아니다.
그저 많은 신들 중 한 명에게 용사로서 선택을 받은 인간일 뿐. 마왕과 용사의 전쟁은 이미 수 천 년 전부터 대대로 이어져 왔다.
그것은 일종의 전통.
암묵적인 규약.
마족과 인간에 대한 얘기가 아닌.
마왕과 용사에 관련된 애기다.
어릴 적 꿈나라에 가기 전에 부모님들이 들려준 뻔한 동화 속 얘기처럼 몇 세대에 걸쳐 용사와 마왕이 서로를 해할 뿐인 이야기.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정체가 그저 어떠한 존재들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인간과 마족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 착각하지마라. 네가 알고 있는 제국의 전력이 보이는 게 전부란 생각을 하지 말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현재 몇 서클이지?”
린이 대답하려 하자, 그 전에 다시 말을 잇는 아크 메이지.
“대답하지 말고. 직접 보이거라.”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린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마법사에게 자신의 서클을 공개하는 것은 정말 신뢰하는 관계가 아닌 이상은 거의 없는 일이다.
과거 자일 지그하르트가 입학시험 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클을 공개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린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한없이 차가운 시선 뿐.
메이지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과는 대비되는 서늘한 눈동자.
한기를 품은 그 눈동자와 마주하자 결국 그녀의 불꽃 또한 차갑게 식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저의 불꽃. 드높은 이름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홍염(紅焰). 타올라라.”
그녀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그녀의 손위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응축된 불꽃이 서서히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에 펼쳐지는 원형의 고리.
8개.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고리가 있었다.
그것을 본 아크 메이지는 탐탁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9서클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냐?”
자존심이 상한 린 메이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경을 치켜 올린 아크 메이지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문 채 불을 붙였다.
치익.
담뱃잎 타들어가는 소리가 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요한 크루이프. 그 놈이 이번 룬델 가 사건 때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죽였는지 알고 있나?”
“…….”
“그들은 대부분 룬델 가의 기사들이었다. 그 중에서는 룬델 가의 사냥개라도 불리는 아르미 룬델도 존재했지. 마법사가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너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딸아. 너라면 룬델 가의 기사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그 어떤 이들의 도움도 없이?”
린은 자신 있게 이길 수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홀로 싸워본 경험조차 없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름 마법사들 중에서 실전 경험이 많은 그녀였기에 전투의 상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제 아무리 마왕을 토벌하고, 마탑의 유망주로 인정받고, 마도사가 되었다고는 해도 결국엔 요한 크루이프라는 인간에 그늘에 가려질 뿐이다. 들리는 바로는 그 녀석은 벌써 9서클에 도달했다고 하더구나.”
“…9서클 말입니까?”
“그래. 9서클. 어쩌면 그 마저도 자신의 힘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걸 수도 있겠지. 거기에 일개 마법사라고는 볼 수 없는 전투능력까지. 완벽한 인재야. 정말 탐이 난단 말이지.”
“……제가 더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증명? 이미 증명을 할 시기는 끝나지 않았나? 아카데미 시절부터 지금까지 너는 언제나 그 녀석 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현재도 마왕을 토벌했다는 업적 말고는 네가 그 놈보다 잘난 점이 무엇이 있지? 가문의 배경? 혈통? 그것들은 전부 네가 잘나서 누리는 것이 아닌 너의 조상들이 잘나서 누리는 것이 아닌가?”
사사건건 팩트로 후려패는 린의 아버지 아크 메이지.
역대 메이지 가문의 혈통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그답게 말솜씨 또한 훌륭했다.
밀려오는 수치심과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요한을 향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욕의 화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상 요한과 같은 인간은 발작버튼과 다름이 없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삐뚤어진 성격상 자신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반박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은 그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 앞에서는 최연소 마도사 따위도 별 볼일 없었다.
천재 중의 천재.
룬델 공작가와 함께 개국공신 가문으로 꼽히는 메이지 가문.
원소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일족이었다.
그들 자체가 곧 제국 마법의 상징인 셈.
아크 메이지는 그 중에서도 역대급 천재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수많은 마도사들을 배출해낸 메이지 가문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
일인군단(一人群團).
여명(黎明)의 마법사.
화천빙산(火天氷山).
여러 가지 이명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마도 공작.
그의 원천속성은 퀸터플(quintuple)로서 제국 최초의 5가지 속성 보유자이다.
초월자인 아슈타르조차 5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세간에서는 그가 일부러 초월자가 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혹은 이미 초월자의 격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별의 선택을 받지 못해 초월자가 되지 못했다는 얘기도.
진실은 오직 본인만 알 뿐이었다.
‘아버님의 실력은 진짜다.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마력조차도 전부 허상일 뿐. 어쩌면 정말 초월의 격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오만한 린 메이지조차 그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카데미에 가서 직접 증명 하거라.”
“네?”
“아카데미의 임시교수가 되라는 명령이다. 내가 내리는 명령이 아닌, 황실에서 직접 내린 명령이지. 그러니 군말 말고 준비해라. 거기서 네 가치를 입증해보이거라.”
“…이렇게 갑자기 아카데미라니.”
“누군가를 가르쳐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그리고 네가 임시로 맡게 될 자리는 본래 요한 크루이프가 담당하던 자리이다. 즉 너는 그 놈의 대체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
“……요한 크루이프의 대체제 말입니까.”
아크 메이지는 이미 그녀가 맡게 될 반의 학생들 중 차녀인 샬럿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기회는 이게 끝이다. 이 기회들 또한 네가 나의 딸로 태어났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특권이라는 말이지. 다른 이들은 이러한 기회조차 받지 못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증명해보이거라. 너라는 인간의 가치를, 그리고 요한 크루이프보다 내 딸 린 메이지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거라.”
린은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말없이 방을 빠져 나갔다.
* * *
‘린 메이지가 임시 교수로 오기 전까지 약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전까지 최대한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겠군.’
72교단의 정비 그리고 초월자인 아르스 디에고 또한 만나야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슬슬 천악천과 관련된 정보를 모아야 한다.
내가 여러 가지 일들을 진행하는 동안 그 또한 자신만의 행보를 걸었을 터.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그와 조우하게 될 게 분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자일 님.”
“오랜만입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먼저 들린 곳은 바로 칼리고 백작가였다.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엮어있던 것은 나 뿐 만이 아니었기에 일이 끝나는 대로 칼리고 가문의 동태를 살필 예정이었다.
“가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집사장의 얼굴이 전과는 달리 많이 밝아졌다.
아마 일이 잘 해결된 탓이겠지.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집무실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가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칼리고 가문의 기사들과 익숙한 얼굴의 남성이 상반신을 탈의한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남성이 반갑게 소리쳤다.
“자일 지그라하르트!”
나 또한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칼리고 백작님.”
프레이의 아버지이자, 칼리고 백작가의 가주, 그리고 과거 소드 마스터로서 명성을 떨쳤던 남성.
할튼 칼리고.
그가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몸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지금은 무척 건강해 보이는군요.”
“이게 모두 자네 덕분이지. 정말 고맙네. 자네는 우리 칼리고 가문의 은인이야.”
병상에 누워있던 시절에 그는 뼈만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상태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던 그가 지금은 꽤 건강해 보였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몸 전체에 어느 정도 살이 붙었고, 근육의 형태도 점점 잡혀갔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바로 얼굴.
수염과 머리를 말끔히 정리한 까닭인지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생기(生氣)가 넘쳤다.
칼리고 백작가의 기사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가주님의 병을 고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환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를 웃으며 바라보던 칼리고 백작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네. 혹시 따로 만나는 여인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고 백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없단 말이지? 그러면 이참에 우리 딸아이와 만나 보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