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신세계
4-2
마술사가 제일 강한 시기는 한 해 중 언제일까.
학계에서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대부분 <탄생일>로 보는 게 정설이다.
테사는 허공을 걸었다. 손님 없이도 오늘의 공방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생일을 맞아 연료가 채워지다 못해 넘쳐흐르는 주인 탓이었다.
백색 대리석으로 이뤄진 바닥은 가지각색 진들로 빽빽하고, 그 위를 딛을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종소리, 요정의 웃음, 일각수의 투레질…….
투명한 회전 기관에선 오색 빛깔 시약이 흐르고 기울었다. 터빈을 빠져 나온 액체들은 흩어지거나 공병에 담겨 저절로 찬장에 안착한다.
마술사는 공방 한 켠, 머리보다 높게 쌓인 상자들 앞에 멈췄다. 틈에서 꺼내는 건 증조모로부터 물려받은 빈티지 박스.
불현듯 이계에 떨어지며 많은 소장품들을 상실했지만, 공방 안에 둔 것들은 다행히 무사했다. 이건 개중 하나다.
때때로 어떤 마술들은 매개체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마술사들은 일정한 양을 버릇처럼 챙겨 두는데 테사 같은 경우엔 그보다 수집용에 가까웠다.
북해 첫 월의 바람, 소금 사막의 일몰, 킬리만자로 서쪽 산맥의 얼음 결정, 사바나 초원의 정오 일광 등등…… 물론 제일 많은 종류는 바람. 테사가 특히 다루는 데에 능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의 바람들은 코르크 마개로 막은 시약병에 담겨 있었다.
마술사 고유의 서명과 식을 보름 간 새겨 넣은 코르크는 나무의 품질과 술사의 역량에 따라 보존 기간이 천차만별이었다. 테사는 상자로 고갤 기울인다.
오와 열을 맞춘 수백 개의 라벨들.
그 가운데 금색 라벨 하나를 골라 집었다. 멋들어진 필기체로 적혀 있다. <카리브 해의 석양>.
단언컨대 테사의 페이버릿 중 하나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로 내려앉는 태양. 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 손바닥보다 작은 병을 열며 테사는 생각했다. 어떤 오후 날의 해적…….
―오라힐리.
일순 착각인 줄 알았다.
허나 바로 다음 순간, 그럴 리 없음을 깨닫는다. 마술사가 헛것을 들을 가능성도 낮은데다가 무엇보다 테사 스스로가 느꼈다. 공방 앞에 선 인기척을.
“말도 안 돼.”
대체 얼마나 넋을 빼놓고 있었으면! 공방 앞까지 올 동안 모를 수가 있지. 다른 데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몰아치는 감정들이 어찌나 복합적인지.
표현조차 테사는 버거웠다. 당황일까, 황망일까, 아연일까. 가다듬지 못한 낯으로 외부 공방을 향했다.
방금까지 있던 공간은 공방의 심저였다. 이 층 작은 문 뒤에 숨겨진 공간. 하지만 테사는 내려가는 것도 잊고 난간을 부여잡고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그가 있다. 그제야 열린 문에 비스듬히 기대 선 해적이.
두리번거림 한 번 없이 마르코가 단번에 테사를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옅게 웃는다.
“좀 아슬아슬, 했지요이?”
“…….”
“문이 또 혼자 열릴 줄 알았는데. 도통 안 열려서 너무 늦은 건가 싶었더니… 얼굴 보니 또 그건 아닌 모양이구만.”
“…….”
“지금 몇 시지?”
말없이 테사는 손짓했다. 그에 따라 천장을 감쌀 만큼 거대한 시계가 나타나고, 초침이 움직인다. 오십 초, 오십오 초, 칠 초…… 재깍.
괘종이 치기 직전 마르코가 테사를 바라본다. 테사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종이 울린다. 자정을 알리는 종이다.
“들었어?”
“다시 말해줘.”
어리광쟁이구만. 마르코는 딱 그런 표정이다. 매우 곤란한 걸 보는 듯 짐짓 난처한 얼굴로, 그런 주제에 아주 부드러운 눈빛을 띤 채 말한다.
“생일 축하해. 오라힐리 테사.”
지금 이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가.
등 뒤 열린 문을 틈타 흐르는 카리브 해의 해풍. 저 먼 세계로부터 비롯된 금색 바람은 낯선 대기에도 주저 없이 스며든다.
그 바람과 종소리 사이, 운명을 이기고 온 해적이 서 있다.
대단할 거 없는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낭만과 이상을 좇아도 사람을 죽이는 무법자. 그런 것 치고 예의를 알고, 부드럽게 웃어서. 혹했음을 부정 못 하나 그럼에도 종종 드러나는 서늘한 눈빛과 죽음의 냄새가.
결국 이 자는 어쩔 수 없는 해적이라고…… 그런데.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테사는 발을 내딛는다. 허공을 걸어 마르코 앞에 다다랐다.
“음…… 생일 축하?”
“장난칠 기분 아냐. 대체 어떻게! ……운명을 바꿨어. 이게 무슨 의민지 알긴 해?”
불가능한 일이다.
운명에 부딪치며 인간은 스스로가 한계를 뛰어 넘는다 생각하지만, 그들은 이미 거기까지도 보는 탓이다. 개미의 한계와 우주의 한계가 동일할 순 없으니까.
물론 아주 대단히 뛰어난 경우, 경우의 수를 엿보고 헤아리는 일까진 가능할지 몰라도 단지 그뿐.
테사가 열변했다. 희미하게 달아오른 뺨이 흥분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지금 마술사가 하는 얘길 전부 이해할 순 없으나 하나만은 분명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테사의 머리카락. 마르코는 그 끝을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한계>라… 그런 걸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지?”
그에 테사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다. 뭐 이런 막 되먹은 세계의 막 되먹은 해적이란 말인가. 마르코가 웃었다.
“그래서, 마술사. 말해봐요이. 나를 기다리지 않았나?”
“…….”
“운명이니 뭐니 시답잖은 얘긴 관둬. 믿을 수 없다더니…….”
미처 가시지 않은 전투 피로와 둔해진 감각. 한껏 풀어진 상태이나 눈빛만큼은 평소보다 살아 선명했다. 웃음기 어린 중저음이 속삭인다.
“제일 믿었잖아. 이런 얼굴을 해놓고, 그러지 않았다 말하려고?”
테사는 부정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 마술사의 이성을 우습게 보냐고, 퍽이나 기다렸겠다고 차게 코웃음 쳐줘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까지 눈앞의 해적은 이미 꿰고 있는데.
다 아는 척…… 재수 없어. 테사는 살짝 입술을 짓씹는다.
“하긴, 네. 남자가 그 나이 먹고 그 정도도 못 읽으면 안 되죠. 허투루 먹은 건 아닌 모양이니 다행이네요. 되게 뿌듯하시겠어요.”
“아 이런. 자존심을 건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존심? 갑자기 얘기가 왜 그쪽으로 빠지죠. 안목만큼이나 헛소리 실력도 상당하네요. 과연 사황의 부선장쯤 되면 못하는 게 없군요.”
“오라힐리…….”
“네?”
“테사.”
젊은 마술사는 움찔했다. 처음이었다. 그에게서 성 대신 이름을 불린 것은. 말없이 보던 마르코가 그대로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다.
테사는 엉거주춤 그를 받쳤다. 나지막한 한숨이 와 닿자 맥박이 술렁였다. 무슨 얘길 해도 닿을 거리다. 마르코는 노곤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보름이라. 그럴 만도 했지. 해군 대장과 부딪쳤거든…….”
“…….”
“일 자체는 금방 끝나서 열흘이 아니라 여유 있게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떠나기 직전에 그렇게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이틀을 밤새 잠도 못 자고 싸우다가.”
“…….”
“지금 여기야. 정말, 끝나자마자 달려왔다고…… 그러니 혼내는 건 참아봐.”
말을 하며 긴장이 풀리는지 육체는 더 무거워졌다. 어찌할 바 모르던 손이 가만히 해적의 등에 닿는다.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에 마르코는 웃음을 참았다.
그에게 걸어줬던 술식을 그제야 테사는 확인한다. 흐트러진 꼴을 볼 때부터 예상 못 한 바는 아니나 그 이상으로 치열했던 모양이다. 상당 부분이 깨져 있었다.
6계급 수호 술식 정도면…… 무너지는 빌딩 숲에서도 멀쩡히 걸어 나오는데. 대체 이곳 전투는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이건 뭐 맨몸으로 미사일을 상대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무리 괴물이라도 괜찮은 거 확실해? 심각해진 테사가 마르코를 떼어냈다. 대신 뺨을 잡아 이리저리 훑는다.
“상처 없는 거 맞지? 외견으로 볼 땐 없는데…… 난 외상 치료는 잘 모른단 말이야.”
“없어. 불사조니까. 아, 그보다.”
지친 몸보다 우선인 문제가 있다. 테사의 손을 잡아 내린 마르코가 뺨을 거칠게 문지른다. 마른세수를 한 다음, 무거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관련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주겠어?”
“개인적인 부탁인가요? 아니면.”
“해적단 일이긴 하지만, 가족이다. 그러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해. 다름 아닌 내 형제의 일이니까.”
천여 명이 넘는 선원들 모두가 형제라면 이 남자의 <개인적인> 범위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험한 시대에서 너무나 어려운 방식을 택해 살아간다. 테사는 생각했지만, 그를 거절할 이유도 달리 없어서.
“뭐…… 생일 축하에 대한 보답이 그걸로 충분하다면, 아 웃지 마요. 무슨 일인지 얘기나 해.”
“누가 다쳤는데 상태가 별로 안 좋아요이. 총을 잘못 맞아 상처에 의한 단순 감염인지 알았는데.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독이 발려 있었던 게 아닌가 싶구만.”
“군대가 독이요? 무슨,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비인도적인!”
“전장의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는 알 수 없지. 운이 나빴다 생각할 수밖에.”
“무슨 독인지는 당신도 모르고요?”
“나뿐만이 아냐. 다른 의사들도 전혀 감을 못 잡아.”
“보는 게 낫겠어. <눈>을 뜰 테니까 환자를 강하게 떠올려요.”
상대의 협조만 있으면 기억 읽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녔다. 마술사는 눈을 떠 지난 상황을 파악한다. 선실에 누운 미형의 젊은 남자. 핏기 없는 얼굴은 잠깐 봐도 그 상태가 위중하다.
“많이 안 좋네요.”
“그래도 차도가 아예 없진 않으니까. 도와준다면 훨씬 좋겠지. 별 문제 없으면 내일쯤 배가 정박하니까 그때 우리 쪽으로 와서 봐주겠어? 먼저 오긴 했지만 난 다시 가봐야 하니…….”
“아뇨. 그냥 같이 가. 나도 장담은 못 해서 직접 봐야겠어요.”
고민하다가 테사는 약병 몇 개만 챙겼다. 어차피 다시 올 테니 많은 짐은 필요 없다. 혹시 몰라 주변을 둘러보고 마르코를 돌아보는데.
“응? 왜 그런 표정이야.”
아무 말 없이 마르코는 입가를 쓸었다. 며칠 면도를 못해 까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한 듯 눈썹을 휜다. 글쎄…….
“등에 누굴 태우고 날아본 적은…… 없는데.”
더 당황한 테사가 소리를 꽥 질렀다.
“누가, 누가 어디에 타! 야만인 아니랄까봐 무슨.”
예상을 넘는 반응에 마르코가 두 손 들었다. 바다 위를 날아온 사람에게 같이 가자 말하기에 그랬을 뿐. 그보다 너무 질색하지 않나? 상황만 아니었어도 놀려먹었을 텐데.
저 차가운 얼굴 어디가 이렇게 나쁜 마음을 자극하는지 모를 노릇이다.
짓궂은 시선을 피하며 테사가 말했다. “문을 열 거예요.” 마르코는 반문한다. “문?”
공방 가운데로 걸어간 마술사가 손가락을 딱, 딱 퉁겼다.
소리에 맞춰 둥근 두 개의 진이 발밑으로 떠오른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새겨둔 건데 이걸 이렇게 써먹는구나.
등에서부터 청량한 느낌이 퍼졌다. 테사는 각인의 힘을 느끼며 마술회로 또한 활성화시켰다. 허공 위로 생겨난 복잡한 문자열이 긴 타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리 와요. 테사가 마르코에게 손짓했다. 내 가까이요.
“<공간 이동>은 마술적 성인임을 인정받은 자라면 누구나 가능한 4계급 마술이에요.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죠. 반드시 가본 장소에만 갈 수 있다는 것.”
“…….”
“4계급 마술이니 그 정도 제한은 뭐 당연하지만.”
마르코는 물끄러미 테사를 바라본다. 이런 순간의 마술사는 방해하기 힘들었다.
타원이 완성되자 테사가 말한다. “손을 줘요.” 집중이 깨지 않도록 애쓰며 마르코의 손을 잡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생각해.”
“오라힐리. 이건…….”
“안심해요. 이건 4계급 마술이 아냐. 세상엔 선택받은 소수가 있어. 그들만이 가능한 7계급 공간 이동은…… 마술사가 원한다면 어디든 문을 열죠.”
어떤 공간에도 제한 없이 발 딛는 것이 허락된 자들. 테사의 세계에서 그들은 마음대로 화성과 목성을 건너고, 심해 밑을 지나며 구름 위를 걸었다.
“사설이 너무 긴가요. 나도 처음이거든.”
6계급 끝에 닿아있는 마술사. 승급을 앞둔 오라힐리의 테사는 특수한 상황일 경우, 보다 위의 마술도 가능할 때가 있었다.
타원 안이 거울처럼 변화한다.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표면을 건드렸다. 마술사의 손가락에서 시작된 파문은 곧 전체로 퍼져 나갔다. 눈을 떼지 않으며 테사가 중얼거렸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고, 생일을 맞은 마술사는 한계를 넘어요. 자정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즉…….”
마르코가 숨을 삼켰다. 맞잡은 손에 힘이 실린다.
건너편엔 이제 익숙한 선실이 있었다. 테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해가 뜰 때까지 난 지금 7계급 마술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