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신세계
5-1
갑판 위 선장은 일국의 군주와 다름없다.
특히 이 대해적 시대, 대양에 군림하는 사황의 배라면 전제 군주 국가의 절대 왕정에 빗대도 모자람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선장의 권위란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만약 지금 이 배가 임시선이 아닌 본대의 본선이었다면, 마르코가 이런 식의 승선을 용인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아무리 비상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선장 허락 없이 외부인을 들일 수 없는 노릇이므로.
흰 수염 소속 천육백여 명의 형제들, 산하 세력 모두가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충직하며 뼛속까지 단련된 전사들. 마르코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다들 총구 내려. 내 동행이다.”
대장의 말이다. 겨눠진 만큼 거둬짐도 순식간.
따라서 마술사의 시선은 금세 환자에게 쏠린다.
집중하면 주변을 잘 못 보는 편이었지. 방해되지 않도록 마르코는 한 발 물러나 그를 지켜본다. 크루들이 따라 근처에 섰다.
“마르코 대장.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문 같은 게 나타나더니…….”
“맞아. 거의 쏠 뻔했다고.”
“손님 능력. 그렇게만 알아둬. 그보다 내가 부재하는 동안 별 일 없었겠지. 비스타는?”
“조타실에. 아까 해왕류 떼가 나타났는데 견습이 잡아보겠다고 나대다가 포어 세일 하나를 살짝 찢어먹는 바람에 비상 걸렸거든.”
“개죽음 당하려 애쓰는구만…… 1번대 놈이냐?”
“또 마크 그놈이야, 대장. 천치 같은 놈. 아직 정신 못 차렸다니까.”
“날 샐 때까지 마스트에 묶어놔. 내 명령이니까 아무도 거들지 말라 하고. 그리고 의료 팀만 빼고 너흰 이만 나가봐.”
이 범선의 가장 넓은 방을 의무실로 배당했으나 덩치들이 모이니 그래도 비좁은 감이 있었다. 팔짱 낀 마르코가 다시 마술사 쪽을 바라본다.
그러나 순순히 따르는 몇 명이 있는 반면 미적거리는 이들도 꼭 있는 법.
“왜? 말해.”
“이조 대장은 괜찮은 거요? 저 사람이 의사라곤 못 들어봤는데.”
“이봐, 누군지 알아? 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서 말야.”
갸웃대며 턱을 긁적이는 건 이조 휘하의 16번대. 이름이 행크였던가.
본래 이번 출항은 판단하길 분대 한 개로 충분한 규모였다. 그에 따라 담당하게 된 곳은 1번대. 대장 격 또한 마르코 한 명뿐.
그가 맡은 이상 적절하다 못해 과한 전력임이 분명했는데, 오로지 바인브릿지의 마술사만이 상황을 달리 보았다.
기껏 얻은 조언을 또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출항 직전, 대장 둘과 이조의 16번대 일부가 마르코 쪽에 합류했다.
혹시 몰라 대동한 원군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줄은 누구도 몰랐지만…… 아무튼 마르코와 자주 공방을 들르는 1번대면 몰라도 16번대 소속이면 모를 만도 했다. 1번대 유세프가 혀를 찬다.
“하여튼 너넨 너무 바깥일에 관심이 없어. 행크, 그 사람이잖아. 마술사 테사텟사.”
마르코가 생각했다. 아니 전혀 아닌 거 같은데 그거.
“아 그 마술사 테싸텟사?”
들어본 얼굴로 행크가 끄덕였다. 귀 기울이던 나머지 16번대도 고갤 주억거렸다. 아하, 그 마술사 텟사텟싸로군.
“아니 잠깐…….”
“뭐라고 대장?”
“아냐…… 됐다. 그만 나가있어. 방해되니까.”
“아직 쟤가 우리 방해된다고 말 안 했지 않아?”
“아니, 확실히 방해니까. 나가.”
포어 세일이나 재점검해. 다 같이 사이좋게 수장되고 싶지 않으면. 피로한 얼굴로 마르코가 손을 내저었다. 때마침 보던 게 끝났는지 테사가 허릴 펴고 그를 찾는다.
귀는 눈만큼 안 밝았으면 좋겠는데. 한숨 쉬고 마르코가 다가갔다.
이 바다 위 강자들은 능력만큼 비위 맞추기도 간단치 않아서.
예상컨대 이 다재다능한 마술사 또한 그 범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낮았다. 물론 아직 그리 까탈스러운 면을 내보인 적 없긴 하지만, 또 모를 일 아닌가. 마르코는 테사가 그 앞에서만 유독 무른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다 봤나요이?”
“응. 말했지만, 난 외상 치료에는 별 재주가…… 근데 저 사람들 방금 날 뭐라고 부른 거예요? 묘하게 신경 쓰이네.”
“그을쎄…… 뭐 특별한 게 있었나. 테사, 테사 그랬지 아마?”
“아닌 거 같은데…….”
마르코는 모른 척 이조 쪽으로 고갤 기울였다. 짧은 사이 뭘 했는지 아까보다 한결 안색이 좋다. 진찰하는 마르코 옆에서 테사가 말했다. 호흡기는 떼는 편이 낫겠어. 별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어깰 맞대고 얘기하는 두 사람. 나머지 크루들은 시선을 나누며 밖으로 빠져 나온다. 문을 닫는 유세프 뒤로 행크가 소릴 낮췄다.
“저 치한테 이조 대장 맡겨도 되는 거 확실해? 의사 아니라며.”
“뭐…… 우리보다야 선의가 더 잘 알아서 하겠지. 마르코 대장이 어디 뭐 허술한 양반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아, 우리 대장이 저렇게 누워있을 사람이 아닌데 누워있으니 신경 쓰여 죽겠구만. 럼주나 한 잔 하겠어?”
“일단 마크 자식 구경부터 하고. 먼저 나간 놈들이 잘 묶어놨을지 한번 봐야지.”
유세프는 대충 총신을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여러 발걸음에 기름 잘 먹인 갑판이 투박한 소릴 낸다. 늦은 시각임에도 자는 이들은 드물어 곳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틈에서 빠져나온 주정뱅이 조나스가 그들 옆으로 붙어 선다.
“어이, 배에 마술사가 와있다며?”
“술통에 처박혀서 주워듣는 건 뭐 이렇게 빨라.”
“원래 해적의 말이란 다 술통 근처로 모이는 법이지. 마르코 대장이 그렇게 급하게 날아가던 게 그럼 고 마술사 때문이란 소리렸다?”
매사 술에 쩐 조나스의 말은 대부분 쓸데없지만, 지금 주제만큼은 잘 고른 게 틀림없다.
단번에 이목을 끌어 근처의 모두가 모여 들었다. 유세프가 충격 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론 생각 못해봤는데 젠장 그러고 보니 텟싸텟사…….
“예뻐…….”
“오 이런 맙소사 제길 진짜 그렇잖아…….”
군데군데서 탄식이 쏟아졌다. 모두 하나같이 급성 복통에 시달리는 표정이다. 가장 어린 파블로가 당황해 외쳤다.
“빨라 다들!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남녀가 함께 있다고 반드시 그런 사이라는 보장도 없고. 둘 사이 분위기가 어떨지도 모르는데!”
“분위기?”
행크가 짐짓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분위기라… 두 사람의 분위기.
“좋았어…….”
“이런 제기랄 생각났어 진짜잖아…….”
“친근했지…… 나갈 때 보니 귓속말도 하던데…….”
“귓속말? 마르코 이 대장 새끼…….”
“대장은 욕이 아니잖아 이 멍청아. 빌어먹을 노땅 주제에, 가 나을 거다.”
“잠깐만 조나스 넌 우리 대장보다 나이 많잖아?”
“마르코 대장이 몇 살이더라.”
“모르지. 그 양반 불사조니까. 어느 순간부터 잘 안 늙는다고 하던데.”
해적들은 대장을 안주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럼주 잔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 간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밤은 덜 사나운 날씨 덕에 달이 가까이 보였다. 마스트에 묶인 어린 견습이 발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주변에서 손가락질 하며 낄낄거렸다. 꼴좋다 애송아! 한껏 놀려 웃으며.
“옛날 생각나는군. 내가 배에 탈 때 마르코 대장도 저 나이쯤이었나.”
양 손에 술병을 쥔 조나스가 딸꾹질 했다. “그때도 대장은 대장이었나요?” 어린 파블로가 호기심 넘치게 물었다. “그랬지.” 늙은 주정뱅이는 긍정했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들어왔지만, 새파란 놈이 대장이랍시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데 안 거슬렸겠어? 멋모르고 시비 걸었다가 바닷물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모를 거다.”
“조나스, 진짜 주제도 몰랐네요. 어떻게 그 실력으로 마르코 대장한테.”
“시끄러 이 자식아. 해적이라면 그런 거야.”
거나하게 취한 입은 혀 하나 꼬지 않고 잘도 말했다. 조나스는 멀지 않은 어제들을 떠올려봤다. 하나같이 생생했다.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단한 적들, 하루걸러 이어지는 전투, 먼저 간 형제동료들, 노도에 휩쓸리는 핏자국, 망망대해에 울려 퍼지는 해적의 노래…….
“많이 죽여봐야 덜 죽이는 길도 아는 법이지. 보면 마르코 대장도 많이 유연해졌어.”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세월…….
유일했던 맞적수가 왕좌에서 죽고, 수많은 도전자들이 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그 끝에서 세 명의 승리자가 안착하며 바다의 추는 마침내 균형을 되찾았다.
사황, 네 개의 황좌 그중의 첫 번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의 세상에서 제일 강한 해적단. 마르코는 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내로 무르익었다.
본래도 타고난 성정에는 이제 조급함 하나 찾기 힘들고, 칼날은 가장 적절한 예기로 담금질 되었다. 그러니 조나스는 염려 없이 잔을 높인다.
“자자, 다들 건배. 오늘 얘긴 우리만 아는 걸로 해두자고.”
지나가는 유흥이건 안식이건 괜히 진흙발 딛을 필요 없다. 어차피 그들이 아는 그 해적은 어떤 순간에도 해적답게 행동할 것이다.
바다 사나이여! 부디 스치는 정열이 너무 덥지 않길 바라오. 당신의 동반자는 무자비하며 잔혹하고 또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네.
욕심 많은 파도가 출렁인다. 배는 순항했다. 선실의 목소리는 갑판까지 닿지 않는다. 해적들은 소릴 높여 노래 불렀다. 우리는 해적, 영원히 바다에 도전하지.
파도에 머릴 뉘고, 배는 침대로 삼아. 마스트 높이 달아라, 우리의 졸리 로저.
오늘 그리고 내일도, 모든 꿈들은 잠들어. 떠나야 하니 작별 인사를 하세, 모든 기억들은 가슴에 두고. 찌푸리거나 늘어지지 말고, 오직 하루를 붙잡기 위해 살아간다네.
황혼부터 여명까지 노래하자. 어차피 우린 모두 백골이 될 테니까.
안색은 창백하고 입술은 파랗다. 입가 주변부터 간단한 마비 증상이 보이며 동공을 살피니 확산되어 있었다.
의식은 미미하게 남은 듯하나 맥박 또한 약하고. 신경 독의 일종으로 추정하되 테사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이곳은 테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좇는 마술사는 모든 분야에 일정 이상 지식을 지닌다. 따라서 테사 또한 간단한 진료가 가능했지만, 이렇게 다른 세계인 이상 뭐 하나 자신할 수 없었다.
링거를 정리하며 테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사실 증상만 보면 더 악화돼도 놀랍지 않은데, 젊어서 그런가…… 회복력이 굉장히 뛰어나서 버티는 거 같아.”
“아 그건…… 내 불꽃 때문일 수도.”
“불꽃?”
“큰 효과는 없어도 어느 정도 재생력을 보조하니까. 그보다 방금 투약했는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구만. 놀라워.”
마르코가 테사로부터 건네받은 빈 병을 흔들었다. 손가락 마디만한 미량인데도 투약하자마자 이조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테사가 고갤 저었다. 난 그 불꽃 쪽이 더 놀라운데요.
“아무튼 이 약도 비슷해. 상태 이상에서 벗어나길 돕는 역할일 뿐이에요. 원인을 제거해야지.”
“방법이 없진 않은 듯한데. 틀린가?”
“정말 눈치 하나는…….”
선실 안, 수액 떨어지는 소리가 일정하다. 테사는 잠시 누운 이조를 응시한다.
대장들 중 하나라고 했지. 보기 드문 미형에 상당히 젊다. 게다가 동양인. 현재까지 파악한 바, 인종이 다양한 이곳에서도 충분히 드문 축에 속하리라 예상됐다.
눈을 못 봐 단정 지을 순 없으나 죽음의 상도 일절 없고…… 이 자리에서 죽는 인물은 절대 아니란 얘긴데.
“오라힐리.”
“알아. 뭘 해야 할지 생각했을 뿐이야.”
실컷 잘난 척은 다 해놓고 나 몰라라 내뺄 수도 없는 노릇. 마술사의 고고한 자존심에 그런 일은 용납이 불가하다.
테사는 선실의 둥근 창가로 시선을 뒀다. 물결치는 파도 소리가 놀랍도록 가깝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색이 검푸르니 해가 뜰 기미도 아직 요원하다.
“시간은 있어 보이고…… 잠깐 다녀와야겠어. 매개체가 필요해요.”
“얼마나?”
“금방. 얼마 안 걸려요. 그 사이 눈이라도 붙이던가. 당신 지금 쳐다만 봐도 나까지 졸린 거 알아요? 원래 인상이 그런 편인 거 아는데 지금은 좀 심하거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심전도 기계. 그래프를 체크하던 마르코가 픽 웃었다. 걱정된다는 말을 예쁘게도 하는구만.
“참고하지. 귀한 구세주가 졸리면 안 되니까.”
“능글대지 마. 그럴 때마다 진짜 깡패 같아.”
“이래 봬도 해적인데 꽤 착하게 봐주는걸.”
“이…… 관둬요.”
말로 이겨 먹기엔 경험치가 딸린다. 흘겨본 테사가 뒤 돌았다. 공방으로 가는 일에는 굳이 문을 열 필요도 없다. 마술회로를 활성화 시키고 그 다음 순간, 테사는 이미 없었다.
마르코는 침상 근처에 걸터앉는다. 큰 손이 빈 병을 만지작거렸다. 자그마한 게 무게감 없이 구른다.
기계음과 이조의 규칙적인 호흡으로 가득한 선실. 마술사가 사라지니 믿을 수 없이 고요했다.
“이런 세상이었나…….”
쓰게 웃으며 해적은 탄식했다. 큰일이 나도 아주 단단히 났지 싶다고.
[작품후기]
A. 마술사 관련은 여러 레퍼런스들을 참고해 만든 오리지널 세계관입니다. 창작 용으로 둔 건데 이렇게 먼저 쓸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