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9화 (9/29)

9회

제3의 플레이어

7

이 날씨 좋은 섬에도 계절이 있긴 한 모양이다. 보편적으로 하나의 기후만 나타난다고 하더니. 나름 장마도 거치고 변화라 하기엔 미미하나 약간 쌀쌀해지기도 했다. 테사는 옷깃을 여미며 달력을 들춰봤다. (다행히 이 막 되먹은 세계도 그레고리력을 쓴다.) 얼마 뒤면 벌써 달이 바뀐다.

이른 저녁의 공방은 한적했다. 요 며칠 손님을 받지 않는 중이니 당연한 일이다. 창가에서 떨어진 테사가 문 근처로 걸어갔다. 여는 것과 동시에 방문자가 청색 불씨를 떨어트리며 착지한다. 사람으로 화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새로웠다.

“마중이야? 상냥하구만.”

“문만 열리는 게 정 없다 불평할 땐 언제고. 들어와요.”

고민하다가 테사는 차 대신 코냑 잔을 꺼낸다. 적절하게 데운 후 칼바도스를 따르자 은은한 사과 향기가 실내를 적셨다. 마르코가 취향이 좋다며 웃었다.

자주 보니 입맛까지 꿰게 됐다. 이 해적은 차를 권하면 질색하진 않았지만, 썩 즐기는 편도 아니다. 테사는 어깰 으쓱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적절한 타이밍이네요. 막 결론 지은 참이었거든.”

흰 수염과의 만남 이후 며칠. 그 자리에서 답을 보류한 마술사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순한 병이 아닌 듯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마르코는 적당히 몸을 데운 잔을 내려두었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푸르며 말해보라 눈짓한다. 저거 설마 내가 훔쳐보는 거 알고 자꾸 입고 오는 건 아니겠지? 테사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료>를 하는 게 아니라 막는 게 될 거예요.”

“무슨 의미지?”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요? 세계는 살아있는 생물과 비슷하다고.”

초기에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악마의 열매로 인해 뒤틀리는 흐름을 설명하면서였나. 자세히 말하진 않았으나 마술사는 마르코 또한 그들의 주시 안에 있다고 했었다. 들어도 알게 뭐냐 싶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테사가 한숨 쉰다. 이 막 되먹은 세계도 세계지만, 해적들은 이 모든 것을 과히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마음대로 운명의 멱살을 휘어잡는 야만인들이 오죽하겠냐만은. 마술사는 이어 설명했다.

다사다난한 인간의 감정에 비할 바는 아니나 생물인 만큼 그들도 호불호 비슷한 걸 지닌다.

이를 마술사들은 세계의 <악의> 혹은 <선의>라고 불렀다. 세계의 변덕이라 봐도 무방한데, 이때 그들은 혹독한 시련을 부여하기도 자비로운 선물을 내리기도 한다.

“특히 세계를 뒤흔드는 주역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들을 자극하게 돼요. 그럼 주의를 끌게 되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건 꼭 좋지만은 않아. 축복이 따르는 경우도 있는 반면 저주가 되기도 하니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봤어? 정정했던 사람이 갑자기 병들고…… 당신 아버지 격이 또 있다면 비슷한 경우도 분명 있었을 거야.”

마르코가 무심코 중얼거린다. 골 D. 로저…….

세간에는 군에 잡혀 처형됐다고 알려졌으나 아는 자들의 진실은 다르다. 마르코는 그 중 한 명이었다. 바다를 뒤흔든 왕은 병마에 쫓겨 스스로 처형대에 목을 걸었다.

갑자기 오르는 듯한 취기에 머리가 어질했다. 은은하다 생각했던 칼바도스 향이 지독하도록 무겁다. 눈가를 누르는 마르코는 충격에 빠진 것 같기도,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도 보였다.

“물론 노환의 영향도 없다 할 순 없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다른 게 보였어요. 당신은 운명 따위 시답잖다고 했지만, 마술사에겐 그렇지 않거든. 거의 모든 게 가능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대는 오직 <운명>뿐이야.”

“그럼 방법이 없다고?”

“아니.”

부정한 테사가 마르코를 바라본다. 그건 아니야.

“답이 없다면 찾으면 돼. 당신이 증명해줬잖아. 운명을 바꾸는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도 그래서 한번 해보려고. 어차피 처음부터 도전이라 말했던 거니까.”

“…….”

“길은 찾는 자에게 나타나는 법이지. 믿어봐. 최선을 다 해볼게.”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따져보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가 아니냐 마르코는 물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걸로 그들 관계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아는 걸 확인하자고 이 차분한 눈빛에 함부로 파문을 던지고 싶지도 않다. 빼앗고 갖는 것만이 인생인 해적에게도 그저 지켜보고 싶은 순간이 있어서. 대신 마르코는 고갤 기울여 테사의 머리카락 끝에 조용히 입 맞췄다.

“늘 너무 단정한 얼굴로…… 굉장한 말을 하는군.”

“…….”

“그 점이 좋은 거지만.”

테사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눈앞의 해적은 혼자 끔찍하게 나른한 낯짝을 하고선 잘도 남을 긴장시켜댔다. 거리가 가까워 뻗으면 어디든 마르코의 몸에 닿을 듯해 손가락조차 굳었다.

바다 냄새…… 진한 해풍에 미미하게 섞인 샤워 코롱과 약 냄새까지. 실내 가득한 칼바도스 향을 무자비할 만큼 지워낸다. 테사의 귓바퀴가 달아오른다. 마르코는 궁금했다. 이러면 더 건드리고 싶다는 걸 얜 알까.

“숨 쉬어, 마술사. 더 안 손대니까.”

아 진짜. 테사가 목 근처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비스듬히 기대앉은 마르코가 문제 있냐는 얼굴로 웃는다. 이쪽도 충분할 만큼 나이 먹은 성인인데 왜 자꾸 손 안에서 노는 기분인지.

“알아들었으면 이만 돌아가 봐요. 구체적인 의논은 내일부터 하고, 꼭 해 밝을 때 와요. 당신! 같은! 인간은 해 지고 돌아다니는 거 자체가 범죄니까. 알았어?”

“심하잖아.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됐어. 일어나. 그 뿐만은 아니고 손님도 온 거 같거든.”

그 말에 별 말 없이 마르코가 일어났다. 해적과 같이 있는 꼴을 보여 봤자 테사에게 좋을 게 없으니까. 테사가 입구 쪽으로 먼저 걸어간다.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마르코가 뒤따랐다.

“이 시간에 손님 누구지?”

“내 유일한 친구.”

“아 그 꽃집 아가씨.”

“잘 아네?”

손짓에 문이 열리고 반가운 기색의 그웬이 들어오다가 멈칫한다. 장신의 두 사람에 비하면 훨씬 작은 마을 처녀. 힐긋 본 마르코가 지나가며 테사 귀에 속삭였다.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지요이.’

그리고 작별 인사 없이 공방을 떠난다. 무어라 대꾸도 못한 테사가 잠시 째려보다가 그웬 쪽으로 돌아섰다. 동성의 친구보다 이 방면에 민감한 자도 없다. 묘한 눈길로 그웬이 물었다. “누구야?” 반 박자 늦게 테사가 답했다. “해적.”

/

마르코가 누군지 그웬도 당연히 안다. 흰 수염 해적단의 1번대 대장. 억 대 몸값의 수배서도 그렇고 신세계, 것도 흰 수염의 영토에 살면서 그만한 인물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따라서 질문의 의미는 다소 이중적이었다.

얼마 전부터 테사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바인브릿지로 이주하며 나아지긴 했지만, 테사에겐 늘 적잖은 위화감이 둘러 있었다. 선을 긋고 있단 걸 모를 만큼 바보도 아니어서. 마냥 그웬은 기다렸는데 맞닥뜨리자마자 그냥 알 수 있었다. 최근 변화가 이 해적과 관련됐음을.

“나한테 해적과 노닥거리느라 바쁘다고 뭐라 하더니…… 테사, 진짜 바쁜 건 너였잖아? 하물며 대장이라니. 이럴 수가.”

“……아니거든?”

“내가 여기서 배신감을 느끼면 웃긴 거 아는데 어떡하지,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나 지금 좀 느껴. 뒤통수가 얼얼해.”

“아니라고. 크라이튼 그웬.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연구실과 공방. 또 학교와 학회 그리고 상아탑.

어쩌면 단조롭기도 한 루틴이었다. 간혹 참석하는 사교 모임이 있긴 했으나 그 또한 드문 편. 말 그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마술에 매진했다. 스코틀랜드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자란 직계로서 테사는 몹시 모범적인 케이스라 봐도 좋았다. 연애 경험이야 아예 없진 않지만, 모두 잠깐 스쳐 갔을 뿐.

주변 친구들도 비슷하거나 괴짜들만 존재했으니. 따라서 들어주는 거면 또 몰라도 이런 화제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닥 익숙지 않다. 테사는 딱 잘라 말했다.

“네가 말하는 <그런> 사이가 된다면 그래. 언제든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할게. 그러니까 지금은 확실히 말하지만, 아냐.”

“알았어. 하지만 영락없이 그런 분위기였어. 오해한 게 내 잘못만은 아니다?”

그웬이 눈치 보며 말하자 테사가 고갤 흔들었다. 알았으니 그만하라는 뜻이다. 어색할 뿐더러 무엇보다, 테사는 생각했다. 해적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에 대해선 되도록 스스로의 몫으로만 두고 싶다고. 옳든, 틀리든…… 마르코가 해적임을 잊은 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화제면 좋았겠으나 애석하게도 그웬이 들고 온 얘기 또한 이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웬이 깊이 한숨 쉬었다.

그웬의 부친, 크라이튼 바렛은 해군 관련 하청을 도맡던 사업가다. 작은 섬 출신인 그는 가난이 싫어 야망을 키우기 시작했고, 끝내 제도로 이주해 군과 연을 잇기에 성공했다. 비록 군정부가 체제를 바꾸며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긴 했지만, 그간 쌓아온 인맥까지 초기화되진 않았다.

“사업을 정리하면서 좌절하긴 하셨지만…… 그게 마음의 병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내내 편찮으시더니 요즘은 아예 일어나질 못하셔. 그러다보니 아버지 스스로도 당신 없을 내일이 불안하기 시작했나봐.”

사이좋은 부녀 관계였다곤 거짓으로도 말 못하겠다. 오로지 부친의 야망에 의해 집안사람 모두가 억지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모친은 점점 말수가 줄었고, 꽃집에서 일하고자 했던 그웬은 웨이트리스로 취직했다. 그웬의 언니는 오래된 혼처를 잃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혼인했다.

남자가 야망을 키울 동안 여자들은 절망을 키웠다. 인생을 희생당하며 가족으로서의 사랑은 옅어지고 원망만 무성했다. 그렇게 된 지 오래인데…… 이제와 부친은 죽음을 앞에 두고 나서야 남은 피붙이들을 돌아보려 한다.

“어제 유서를 맡은 변호사가 다녀갔어. 둘이 하는 얘길 언니가 몰래 들었는데 날 어떤 전도유망한 군인과 결혼시킬 생각이래.”

“…….”

“내 이름 앞으로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상속했다고…….”

해적을 사랑하며 동시에 현실을 두려워하던 그웬.

결국 달갑지 않지만 안정된 미래와 놓기 싫으나 막막한 오늘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어떡하면 좋겠냐 묻는 얼굴이 어딘가 공허하다. 테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웬과 약혼하기로 한 해군이 바인브릿지 타운에 입항했다.

[작품후기]

A. 세계관은 여러 레퍼런스를 참고한 창작이라 답변드렸습니다. 마술사가 페이트에서 나오니 그쪽을 생각한 분이 계신데(일본은 마법사가 마술사래요) 겹치는 건 용어뿐 세부 설정은 모두 다릅니다. 요정과 소원 얘기 이런 건 오히려 톨킨 쪽에서 모티브 얻은 부분이에요. (켈트족 신화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요.) 전 그 만화를 안 봤으니 보신 분이면 아마 더 잘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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