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10화 (10/29)

10회

제3의 플레이어

8

정박했다고 한 곳에만 머문다 생각하면 곤란하다. 거점을 기준 삼아 주변 해역을 도는 일은 물론이요, 분대별로 드나드는 인원도 꾸준했다. 신세계 본인 소유 영해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사황들을 생각해볼 때, 흰 수염 해적단 정도면 바다에 나가있는 시간이 제법 길다 볼 수 있겠다.

이번 출항 같은 경우는 꽤 주기적인 축에 속했다.

근처 해역을 돌며 특정 섬 몇 군데만 들르는 것으로 약 닷새에서 이레 정도 소요되리라 예상됐다. 마르코는 테사에게도 미리 얘기해둔 참이었다. 마술사는 별 말 없이 수긍했다.

일일이 말 안 해도 된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분명 좀 아쉬운 표정이었지. 테사를 생각하던 마르코가 발을 살짝 들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사과가 정확히 그 위치에 박힌다.

“오, 견문색이 녹슬진 않았군.”

“심심하면 딴 데 알아봐. 바쁘다.”

“무슨 생각하느라 그렇게 바쁘실까, 우리 대장님께서.”

마르코는 사과를 주워 들었다. “출출한 사람?” 묻자 술통을 굴려 옮기던 크루 하나가 손 든다. 옷깃에 대충 닦아 건네자 삿치가 웃으며 첨언했다. “어이, 그거 최상품이다. 잘 씹어 먹어.”

한숨 쉰 마르코가 크루의 어깰 두드리고 뒤 돌았다. 얼른 출항하든가 해야지.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심심해 미치려고 하는구만.

“4번대 물자 점검은 다 끝내고 이런 거겠지.”

“요리사의 결벽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고. 1번대보다 훨씬 꼼꼼하게 끝냈을 테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고. 뭔 일인데?”

“언제는 무슨 일이 있어야 떠들었나. 이거 섭섭한걸. 통 두문불출하시더니 돈독했던 우정도 다 잊은 모양이야.”

틀린 얘긴 아니다. 4번대 대장 삿치. 마르코가 해적단 일과 관련해 상의하는 게 주로 비슷한 고참인 비스타라면, 보다 사적인 얘길 나누는 쪽은 삿치였다.

선의와 요리사 사이이기도 하고, 얘기하면 곧잘 통하는 구석도 많아서. 다만 그 통하는 면이라는 게…… 마르코는 제 성격이 썩 좋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안다. 그와 비슷한 삿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합판 상자들 위 앉아있던 삿치가 내려온다. 그 눈가에 웃음기가 바싹 올라있다. 딱 안줏감을 보는 표정이라고 마르코는 내심 혀를 찼다.

“얘길 안 하고 갈 순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마르코? 그렇게 심상찮은 티를 풀풀 내면서. 마술사가 아버지와 얘기할 때 우리도 옆에 있었단 걸 까먹으면 안 되지.”

노련한 요리사는 적당히 간을 보다가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진심이냐?”

그리고 대개 그런 물음은 강한 부정을 기대하고 던져진다. 삿치도 그랬다. 마르코는 단순히 경력으로 1번대를 도맡은 게 아니다. 부선장에 맞먹는 위치란 곧 선장 부재 시 이 해적단을 통솔한다는 뜻. 수천에 달하는 그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냉정하고 수완 좋은 이임을 삿치는 의심해본 적 없다.

그러므로 더욱 의문인 것이다. 누구 하나 꺼내 말한 적 없어도 대장 격쯤 되면 육지에 제 사람을 만들지 않으니까.

물론 연인을 두거나 자식을 두는 해적들도 허다하지만…… 흰 수염의 자식들은 모두 세상에서 한번쯤 버려졌던 이들. 목숨 따위는 바다에 바친 지 오래다. 그런 자들에게 돌아볼 자리란 얼마나 부질없고 또 어리석게 다가오는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며,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그것이 해적들의 모토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를 위해 놓아야 하는 부분도 역시 존재함이다.

마르코의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삿치가 재차 물었다.

“마르코. 그 마술사랑 설마 진심이냐고.”

“글쎄.”

“뭐야,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파도가 부딪쳐 희게 부서진다. 크루들 틈에 섞여 소리는 이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마르코는 그 분주한 모습에 먼 시선을 둔다. 이 해적은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 있다.

출항하러 떠나는 그를 위험하다고 붙잡던 손. 그에 이쪽은 해적이라고, 의미를 모르냐 도리어 반문했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점이다.

또 한 번, 다시 붙잡으면 그때도 똑같이 답할 수 있을까. 마르코는 자문했으나 쉽지 않았다. 오랜 장고 끝에 마르코가 반문한다.

“삿치. 넌 네가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냐.”

“잠깐만. 그것 좀 물었다고 인성 지적까지 들어야 돼? 그 정도야?”

“실없는 소린 관둬.”

인상 쓰는 삿치를 걷어차며 마르코가 실소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들어. 해적 주제에 괜히 사람 좋은 시늉 하고 사는 게 아닌가 하고.”

더 나쁘고, 보다 이기적으로 살았어야 했다.

개새끼 취급당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그럼 신념과 내일을 외면하고 오직 오늘에 몸을 맡길 수도 있었으리라.

고작 머리카락 끝이 아닌, 턱을 움켜쥐어 입 맞추고 옷깃 안쪽으로 손을 들이밀 만큼이라도. 차분한 눈빛을 지켜보는 일만큼 냉랭한 얼굴을 무너트리고 싶은 욕망 또한 존재함을. 아마 마술사는 모를 터다. 마르코 스스로도 숨기고 끝내 외면하는 중이니 말이다.

“왜 나는 더 나쁘게 살지 않았나. 그게 내 답이다. 삿치.”

해석은 너 알아서 해. 나도 헤매느라 정신없으니까.

말을 마친 마르코가 먼저 자릴 떠났다. 마르코가 작정하면 아버지를 제외한 누구도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삿치는 멀어지는 동료이자 친구를 바라본다. 오늘은 알 것도 같다. 그 등에서 여유를 찾아보기 힘든 적은 지금이 거의 최초였으므로.

/

마술사의 승급은 보통 두 가지 루트를 거친다.

먼저, 보다 높은 경지의 인물에게 인도받는 낙수의 길. <낙수 효과>에서 비롯된 말이 맞으며 스승을 통한 연구와 수련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방법이다. 거의 전체라 해도 좋을 만큼 대다수의 마술사들이 이 왕도를 거쳤다. 이유는 물론 있다.

사도라 불리는 원초의 길. 오로지 본능에 의해 다다른다는 이 길은 계기와 방법이 불확실했다.

절명 직전의 위기가 이끌어낸다는 말도 있었으며, 기연 같은 깨달음을 통해 터득한다고도 했다. 몇몇 시니컬한 마술사들은 이를 두고 무모한 멍청이들의 신박한 자살 방법이라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테사는 영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다만 이계에 떨어진 이상, 이제 왕도가 닫혔으니까.

무모한 시도를 할 생각은 없다. 테사는 섣불리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도 분명한 사실. 숫자로 보면 6계급과 7계급은 한 계급 차에 불과하나 숫자 이상의 것이 있었다.

한 계단만 넘으면 보이는 세계가 다를 텐데…… 그럼 흰 수염의 일도 보다 쉬웠을 터. 테사는 널브러진 양피지와 서적들을 바라본다. 최근 출항 직전까지 해적과 마술사는 이 일에 매달려 있었다.

사실 마술사는 이계에 떨어지며 진작 편법도 하나 썼다. <겟슈>라 불리는 켈트의 맹약. 오랜 시간 스코틀랜드 땅에서 켈트족 신을 모신 오라힐리 일족에게 허락된 금기의 힘이 그것이다.

동족도 동류도 없는 땅에서 그 정도 보험 없이 움직일 순 없으니까. 낯선 세계임을 인지하자마자 거의 생존 본능으로 행했다.

<다른 세계에서 왔음을 말하지 아니한다.> 다행히 별거 아닌 제약임에도 맹약은 힘을 보태주었고 따라서 테사는 보통의 6계급 마술사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급이 아쉬운 마당이니…… 한 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짐작될 것이다.

휘두르는 마술사의 손가락에 널린 종이들이 정리된다. 멀리 진열장 근처, 단골 손님이 생각에 잠긴 테사를 일깨웠다. 어이, 텟싸! 주인장! 이만 가볼게.

“값은 저 위에 올려뒀어. 확실히 가격이 붙어있으니 훨씬 편하긴 하네.”

“해적들이 좋은 일을 했죠. 그리고 테사예요.”

“아참, 그웬이 안 바쁘면 자기 집에 한번 들려달라고 하던데.”

“걔도 많이 컸네요. 마술사를 오라가라 하질 않나.”

“일전에 부탁한 일이라고 말하면 알 거라 하던걸. 내가 볼 땐 아마 오늘 도착한 해군 때문인 거 같아. 아무튼 난 전했다?”

해적들이 출항한 지도 사흘 째. 해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입항했다. 이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생각할 만큼 순진한 자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타운은 별 다름없었으나 속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공기가 술렁였다. 대기는 늘 민감한 편이다. 이들은 태풍의 눈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시작을 감지한다. 짐작키 어려운 표정으로 마술사가 공방을 정리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웬은 친구가 테사 외에도 많다. 그러나 친구란 오래 떨어져도 어제 만난 듯한 경우가 있는 반면, 한번 멀어지고 되돌릴 수 없는 사이도 존재하는 법. 현재 그웬이 의지하는 이가 마술사뿐임을 테사도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터무니없는 부탁이라도 웬만하면 들어주고자 했다. 설령 그게 그녀의 약혼자와 첫 대면하는 자리여도 말이다. 테사가 지금 크라이튼 가문의 석찬 자리에 앉은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크라이튼 바렛. 그웬의 친부이자 야심찬 사업가였던 바렛 씨는 테사의 귀족적인 면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챈 자였다. 타운으로의 이주를 위해 같이 배에 탈 때부터 그 점을 얼마나 흡족해하던지. 그웬이 부른 방문자가 테사임을 알자마자 바로 자리 하나를 더 마련했다.

향유고래의 기름으로 태우는 양초, 노릇하게 익은 칠면조 구이, 잘 닦인 은제 커트러리까지. 테사는 어렵지 않게 둘러본 후 말했다.

“실례지만 바렛 씨는 참 알기 쉬운 사람이네요.”

“음 무슨 뜻인가. 오라힐리 양?”

“그야말로 격조 높은 삶을 이루는 데에 열정과 마음을 다 바치는 듯해서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인물상이라 생각했는데 제가 시야가 좁았네요. 감사를 드려야 할지도요.”

무슨 얘긴지 고민하던 바렛 씨가 감사라는 단어에 표정을 바꿨다. 미담 속 인자한 거부를 흉내 내듯 너그러이 손을 젓는다.

“뭘 또…… 친구의 아버지 아닌가. 편히 대하게.”

우아하게 칠면조의 살점을 발라내던 군인이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그가 이 석찬 자리에서 처음으로 낸 소리였다. 소리라기보다 웃음을 참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에 바렛 씨가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두드렸다. 어쩜 저렇게 모든 행동이 희극적일까. 시대극 조롱을 전문으로 하는 코미디언 같다고 테사는 생각한다.

“내 정신 좀 보게. 소개를 깜빡했군. 오라힐리 양, 이쪽은 해군 본부 소속 오거스트 소령이라네. 내년에 중령 진급이 확정된 촉망 받는 젊은이지. 그웬에게 든든한 인생의 파트너가 될 고마운 분이기도 하고.”

“과찬이시군요. 바렛 씨.”

“소령. 오라힐리 테사 양은 우리 그웬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그, 마술사라는 잡화점을 운영하는 친구인데, 요즘 아가씨답지 않게 아주 단정하죠.”

마술사라는 잡화점…… 테사는 살면서 이렇게 표정 관리가 힘든 적이 없었다. 더 당황한 그웬이 황급히 정정한다.

“아버지! 마술사는 직업이에요. 자, 잡화점도 아니고요. 테사에게 실례잖아요.”

“아 그런가? 하하하. 요즘 젊은 애들이란 당최 뭘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미안하네, 오라힐리 양.”

“아뇨. 이토록 대범한 사과라니…… 바렛 씨의 인물됨에 다시 한 번 감탄할 따름입니다.”

“우리 그웬이 친구 하나는 정말 잘 사귀었단 말이지!”

비꼼 하나 못 받아먹는 멍청이가 더 한심할까. 그 멍청이에게 의미 없는 비꼼을 계속 던지는 내가 더 한심할까. 웃는 바렛 씨를 보는 테사의 표정이 착잡하다. 젊은 소령은 웃음을 참느라 나이프질도 제대로 못했다.

석찬이 마치고 자릴 뜨며 테사는 스스로 의심스러웠다. 제 역할은 분명 그웬의 부탁으로 해군의 인물됨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인데, 뇌리 속에서 바렛 씨의 호방한 인상이 떠나질 않는다. 그웬이 경보하듯 걸어 옆에 따라붙었다.

“진짜 미안해! 테사. 오늘 아버지가 너무…….”

“유전은 참 신비한 거야, 그렇지? 같은 씨앗에서도 매우 다른 결과물이 나오니까. 세상은 어쩜 이렇게 내 기댈 한 번도 실망시키질 않는지.”

“못 살아. 소령 때문에 기분이 좋은가봐. 내내 들떠있더니 오늘은 진짜 심하네. 내 얼굴까지 화끈대서 죽는 줄 알았어.”

사납게 양 뺨을 문지르는 그웬. 테사가 실소하자 빤히 바라본다.

“그나저나 그 안경은 뭐니?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아버지 페이스에 말리느라 묻질 못했네.”

“내꺼 아니야.”

테사는 검지로 안경을 치켜 올렸다. 각진 테의 안경은 그대로 두면 콧등까지 내려왔다. 그웬이 더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떼는 찰나,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났다.

“실례. 얘기하는데 방해됐다면 미안합니다.”

옷깃까지 빳빳한 제복에는 얼룩 하나 없다. 오거스트 소령은 실눈의 여우상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젊은 소령은 제법 정중한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바렛 씨가 제 약혼녀와 시간을 더 보내는 편이 어떠냐 권하시더군요. 물론 그쪽 친구 분도 함께. 거절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그럼 매우 슬플 겁니다.”

해군은 철저한 실력제라 들었다. 엘리트 위주의 편제가 정착되어 있던 테사의 세계와 비교해보면 매우 원초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잘은 몰라도 이 소령이란 자도 나름 한 가닥 하는 데가 있다는 얘기다. 밋밋한 외견만 봐선 기대하긴 힘드나 테사는 방심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뒤풀이는 주택가 근처 바에서 이뤄졌다.

“내리자마자 사실 좀 당황했습니다. 어딜 가도 군이 환영 받지 않는 곳은 드문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여기 분들은 저흴 꺼리는 눈치더군요.”

어린 급사가 올리브 담긴 그릇을 놓고 간다. 군인은 하날 집으며 얘길 꺼냈다. 그웬이 대답한다.

“해군을 본 적이 드문 작은 섬이니까요.”

“그런가요? 짐작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여긴 사황의 영토이니.”

“흰 수염이 이 섬을 보호해준 지는 몇 년 되지 않았어요. 그 전부터 해군은 관심이 없었죠. 그들이 보호해주기 전에는 타운 사람들끼리 자경대를 꾸려 서로를 지켜야 했는걸요.”

사황에게 복종하거나, 거역하여 죽거나.

신세계는 철저히 이 한 가지 룰에 의거한다. 해군은 사실상 이 바다를 방치한다 봐도 좋았다. 괜히 사람들이 위대한 항로 전반부를 <낙원>이라 칭함이 아니다. 어느 시대든 전란 속 약자들의 삶은 비슷하나 위정자에게 외면 받은 삶은 더욱 고달팠다.

바인브릿지 타운은 신세계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잘 눈에 띄지 않음에도 해적들은 한 번씩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자경대의 젊은이들이 무수하게 죽어나갔다.

비교적 평화로운 섬인데도 그랬다. 흰 수염이 거두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핏물이 이 땅을 적셨을지 짐작조차 안 된다. 그런 그웬을 군인이 건조하게 응시했다.

“마치 그들 편을 드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웬 양은.”

“편이라뇨…… 소령님. 사실을 말할 뿐인데.”

“하긴 가증스러운 쓰레기들이긴 하나 자기들 밥줄인 영주민들에게까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핏대 세우며 옹호해주니 보람 좀 있겠어요. 얼마나 잘해줬기에…… 저도 좀 궁금하네요. 뭐가 그렇게 다르던가요?”

묻는 어조에는 한 치의 다그침도 없다. 높낮음 없이 쭉 이어진 말은 그렇기에 더 귓가에 박혔다. 그웬은 그제야 이 자가 해군, 그것도 코트를 걸치는 장교임이 실감난 듯했다.

말 없는 예비 피앙세를 보며 군인이 길게 침음했다.

“으음…… 아니면 역시 그 해적 때문일까요?”

“네?”

“그웬 양이 요즘 만나는 해적이요. 이름이 사울이랬나. 흰 수염 해적단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루키였죠 아마? 아 참, 참! 그 친구도 이 섬 출신이었지.”

소령은 다시 절인 올리브를 깨문다. 때마침 급사가 다가왔다. 말 한 마디 없는 테이블 위로 술잔들을 내려둔다. 어린 급사는 눈치를 살피며 늦어 죄송하단 말과 함께 돌아갔다.

그건 테사조차 예상 못 한 화제였다. 저 재수 없는 낯짝을 볼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여우상은 왜 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까. 저런 성격은 저런 얼굴로 태어나야 한다고 신들끼리 뭐 담합이라도 하나.

계속 안색이 급변하던 그웬이 덜덜 떨며 일어난다. 희게 질린 얼굴로 쥐어짜듯 속삭였다. 나, 나 먼저 가볼게. 테사는 별 말 없이 그웬의 손을 쥐었다가 놨다. 숙면의 술을 걸었으니 오늘 잠자리를 설칠 일은 없을 것이다.

둘만 남자 소령이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테사도 다시 안경을 치켜 올린다. 이어지는 말투는 어느 때보다 건조했다.

“잠깐 자릴 비켜 달라 했으면 그웬은 묻지 않고 승낙했을 거예요. 배려심이 좋은 애니까.”

“그렇다면 꼭 사과를 해야겠군요. 어차피 할 생각이긴 했지만.”

“제대로 해야 할 거예요. 경고하죠.”

처음 봤을 때부터 냉랭한 편이라 생각은 했지만…… 작정하니 무슨 설녀 같군. 오거스트는 속내를 숨기며 긁적였다.

“저도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릴 만들려면 불가피한 일이었어요. 그 정도로 인성이 막 되먹었겠습니까. 이래봬도 정의의 편인데요. 약혼녀도 마음에 들었다고요.”

“그래서 용건이 뭔가요.”

이 영민한 마술사는 친애하는 해적의 조언을 잊지 않았다. 이런 사태까지 예견했으리라 보진 않지만, 그 넘치던 사심은 결국 도움이 되었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는걸. 테사는 안경을 매만진다.

각진 테의 이 안경은 마르코의 것이다.

연구에 들어가며 둘은 서로 편한 차림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해적이자 의사인 그는 장시간 서적을 볼 때 종종 안경을 걸치곤 했다. 최근 출항 전, 마르코가 이를 두고 갈 것임을 알았지만 테사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아서. 소유…… 소유욕인가? 이 무슨 돼먹지 않은 심리냐고, 드디어 미친 거냐 자책하던 것도 잠깐. 마술사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공방을 벗어나면 상대를 읽기 쉽지 않다. 마술사의 눈을 뜨면 그만이나, 그런 풍경이 일상인 테사의 세계와 달리 이곳에선 꽤나 눈에 띄었다. 테사는 마르코의 안경에 간파의 술식을 새겼다. 일시적이나마 비슷한 효과로 상대의 본의와 더불어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했다.

이게 아니었다면 눈앞의 여우 새끼는 지금쯤 진짜 여우가 되어 여기서 캥캥 짖고 있었을 텐데. 다소 아쉬움을 느끼며 테사가 팔짱 끼었다.

“이미 예상하셨을 텐데요. 바인브릿지의 마술사.”

“…….”

“방금 전 상황으로 제게 느낀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척 중요한 문제거든요. 해군 본부, 센고쿠 원수로부터 전달된 명령입니다. 오라힐리 테사, 당신을 해군 쪽에 협력하도록 회유하라는.”

원수의 이름이 나온 뒤부터 젊은 군인은 웃음기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리된 제복처럼 더없이 사무적인 태도로 제안한다.

“제시하는 어떤 조건이든 수용 가능합니다. 저희 선에서 이루기 힘든 것일지라도 원수님과 직접 대면하여 상의하게 되실 겁니다.”

“…….”

“현재 흰 수염 해적단과 친분이 두텁다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흰 수염 본인과도 거의 독대하셨다죠. 이건 제 개인적인 판단이긴 하나 흰 수염은 해적 중에서도 인품이 괜찮은 편입니다. 좋은 대우를 받으셨다면 당연히 호감도 느끼셨을 테죠. 이해합니다.”

오거스트 소령은 흘러내린 앞머릴 쓸어 넘겼다. 테사는 그의 일이 전투보다는 사무직에 치우쳤을 것임을 추측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해적입니다. 마술사.”

“…….”

“살인을 일삼고 약탈이 곧 삶인 범죄자들이죠. 흰 수염 해적단은 하물며 그들 꼭대기에 선 자들입니다. 존재 자체로 세력을 기울게 하고 그들의 득세는 어떻게든 약자들의 피와 희생을 야기합니다. 원수께선 당신의 힘이 살인자들의 또 다른 무기가 되는 길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소령은 짧지 않은 말을 마쳤다. <용건>은 이게 전부다. 절인 올리브가 하나 더 입속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마술사의 힘을 어느 정도로 짐작하고 있을까. 테사는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는다.

군인은 당연한 얘기지만, 인내심이 뛰어났다. 바가 거의 닫는 시간까지 테사에게선 말이 없었다. 아주 한참 뒤 테사가 물었다.

“소령.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하십시오.”

“그웬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나요?”

무슨 의도지. 젊은 군인의 눈에 정확하게 그 말이 써져 있다. 텅 빈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오거스트가 대답했다.

“네. 진심입니다. 운이 좋았죠. 그림으로 그린 듯 제 취향이거든요.”

“걔한테 따로 연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있으면 어떻습니까. 해적만 뺏는 걸 좋아하란 법도 없죠.”

사무적인 얘기도 끝났겠다. 오래 기다리면서 소령은 처음의 사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테사가 실소하자 군인이 어깰 으쓱거린다.

“비난하려면 비난하십쇼. 해군과 해적은 거의 수십 년째 싸우는 중입니다. 내 적과 닮아가는 면이 아예 없다고 말하긴 어렵네요.”

그건 즉 젊고 잘나가는 군인 특유의 오만함이었다. 어떤 말을 내뱉어도 그들은 제게 화살이 향하지 않음을 안다. 괴물들과 싸워 괴물이 되어가는 우리를 감히 누가 비난하겠냐고.

법은 단순하나 인간은 이토록 복잡하다.

마술사는 충분히 답이 되었다 말하고 일어났다. “생각할 시간은 주겠죠.” 소령이 대답한다. “모쪼록 좋은 방향이길 기다리겠습니다.”

밤이 깊다. 돌아가는 길, 항구에 정박한 군선이 보였다. 배에 부딪치는 파도는 언제와 다름이 없다. 그 소릴 들으며 테사는 어딘가 허전했고, 그렇기에 해적이 조금 그립다고 생각했다…….

[작품후기]

1. 제가 쓴 패러디는 이거랑 새고래밖에 없어요

2. 맞아요 마르코는 선의가 공식 설정입니다 (안경쓴거 개섹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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