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下
(*1/2 연참)
16
수개월 전 일이나 흡사 어제처럼 생생하다. 어깨 위 걸친 긴 체스터필드 코트, 긴 다리, 긴 머리카락.
구두소리가 울릴 때마다 싱그러운 숲과 잉크, 그리고 싸한 겨울바람 냄새가 함께 실려 왔다.
‘황당하군.’
이방인이 냉소했다. 정갈한 그녀의 흰 셔츠 칼라처럼 날서 있었다.
그리고 잘 뻗은 손가락이 단 한 번, 휘둘러졌을 뿐인데. 사슬이 샐리의 목에서 풀려 나갔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인어가 낯선 자를 올려다봤다.
당신은…… 신의 사도인가, 신인가.
샐리는 늘 불운했다. 불행이 아니라 불운이다.
화목한 인어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이 인어는 거창한 고난을 겪진 않았어도 매번 사소한 불운들이 따라다녔다. 부모가 자신의 몫만 잊거나, 기다리던 줄이 눈앞에서 끊기는 등의 일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겪은 일에 이르러선 마침내 이걸 불행이라 부를 시점이라고 여겼다.
샐리의 불운은 주변에서 나름 유명할 정도였지만, 운 없다고 걱정만 끌어안다가 고루하게 죽고 싶진 않았기에. 외려 긍정적으로 성장한 성격이 끝내 꼬리를 잡고 말았다.
제도가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샤본디 파크. 영롱한 불빛과 달콤한 바람이 부는 곳. 눈부신 태양 아래 이상향을 동경하지 않은 인어가 없을 뿐이어서.
들리지 않을 기도를 샐리는 반복했다. 감히 욕심내 죄송하다고, 멍청해서 꿈조차 함부로 가지면 안 된다는 걸 몰랐노라고.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달라 아무에게나 빌었다.
끌려가며 긁힌 비늘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사소한 고통에 신경 쓸 여력 없었다. 그조차 사치였다. 지금 샐리의 삶이, 미래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으니까.
목에 걸린 사슬은 무겁고, 또 무서웠다. 견디지 못한 인어가 절망의 눈물을 떨굴 무렵, 불시에 그 사람은 그렇게 나타났다.
기도를 듣기라도 한 듯이. 마치 영웅처럼, 구세주처럼.
‘아직도 인어의 피로 불로불사를 꿈꾸는 멍청이들이 있다니.’
냉담한 얼굴보다 더 싸늘한 어조였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좌중을 압박했다. 공기조차 바뀐다. 샐리는 기이한 전율이 폐를 짓누름을 느꼈다.
인신매매단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한 걸음 딛을 때마다 박자 맞추듯 뒷걸음질 쳤다.
‘미개한 것들. 마술의 은혜에서 벗어난 주제에 과분한 것을 탐내는구나. 인어의 저주를 받기 전에 이 마술사의 심판부터 받을 테냐.’
덤덤해 도리어 부드럽게까지 들리는 말이었다. 등 뒤로 선 태양. 짙은 역광에 그림자가 져서…… 눈을 보고 싶다고, 샐리는 그 순간에마저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 겪는 미지의 존재. 몸속 깊은 데서부터 공포를 일으킨다.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범죄자들이 도주했다. 마술사는 인어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제야 드러나는 안개 낀 북해의 눈. 순간 건물 사이로 일광이 내려앉았다. 진주처럼 말간 피부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사로잡는 것이 있다. 두 눈 안, 황홀하게 발하는 별들을 보며 샐리가 멍하니 물었다.
‘혹시 신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요?’
마술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시선으로 일견하곤 샐리의 다친 꼬리 위를 쓸어내렸다. 손길에 따라 비늘이 새살처럼 돋아났다.
‘와…….’
‘어린 인어가 왜 혼자 뭍에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오랜 맹약에 따라 구했다. 마침 잘됐어. 그에 나 또한 마술사로서 종족 간 약조에 의거해 요청컨대, 내 가까운 미래로 옳은 방향을 일러주길 바라.’
‘……네?’
‘귀띔정도면 충분해. 보아 알겠지. 방금 막 공간이동에 휘말려 곤란한 지경이야. 대가는 충분하지 않나? 나는 오라힐리의 테사. 왕국과 협회로부터 공인받은 클래스는 6계급 고위 마술사다. 모자라다면 탑의 이름으로 채울게.’
‘……네?’
치료에 신경 쓰던 마술사가 미간을 좁혔다. 예민한 투로 응수한다.
‘어디 아프니? 그래, 애초에 인어가 무슨 연유로 위험을 자초했는지 의아한 참이었어. 왜 그랬지? 신종 자살 수법인가? 곤란해. 보다시피 이쪽도 난처한 지경이라고, 네 할 일은 하란…….’
‘…….’
‘잠깐.’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찌할 바 모르고 울상 짓던 찰나, 딱 눈이 마주치고 만다. 샐리가 화드득 고갤 떨궜다. 마술사는 그에 아랑곳 않고 인어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
저도 모르게 샐리가 탄성했다. 인지 너머의 세계가 마주본 눈에 담겨 있었다. 반면 마술사는 감상이 좀 다른 듯했다.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는다. 낮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설마 인어까지 다르다고? 이들은 신비 영역일 텐데 왜…….
홀려 넋 놓았던 샐리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소리쳤다.
‘미, 미래라면 보는 인어가 따로 있긴 해요! 마담 셜리라고 점술을…… 봐주는 분이…… 있는데…….’
‘…….’
‘네…… 이거 아닌 거죠. 죄송해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주눅 들어 인어가 눈치를 살폈다. 아름다운 마술사에게선 어떤 말도 없었다.
바보 같은 샐리, 은인한테 도움도 못 되고. 짓무른 눈가가 다시 축축해질 즈음 비로소 인기척이 났다. 샐리는 흠칫 어깰 떨었다. 차가운 손이 조심스럽게 눈가를 훔쳤다.
‘어리네. 본의 아니게 좀 읽었어. 넌 인간과 똑같구나.’
‘네? 전혀 달라요!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안 되는데…….’
어떻게 인간이 이런 말을 하지? 그들한테 우리는 한낱 물고기가 아닌가. 불가해한 것을 접하듯 샐리가 마술사를 살펴봤다.
‘내 말은…… 아냐.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마술사가 실소했다. 그러자 긴 눈매가 접히며 놀랍도록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인어는 또 넋을 놓다가 불현듯 놀라 손을 뻗었다.
‘어! 별들이…… 사라졌어요.’
‘응?’
‘아까 눈 안에…….’
‘아, 내 마술회로. 여기선 낯선 개념인 거 같기에 닫았어.’
읽었다 했지 않냐고 마술사가 지나가듯 덧붙였다. 날 접한 네 감상은 퍽 인상 깊었다며. 샐리가 뺨을 붉혔다. 생각보다 이 마술사는 차가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계속 영문 모를 얘기들을 하긴 하지만…….
마술사의 모든 말, 모든 행동이 인어가 평생 봐온 것들과 달랐다. 주위를 두른 기묘한 감각이 개중 제일이다. 불편을 눈치 챈 마술사가 무얼 하자 사라졌는데 그녀는 그걸 마술사의 존재감이라 일컬었다.
인어 앞이라 소개 겸 풀었지만, 괜한 짓이었다면서.
‘도움이 못 돼 미안해요…….’
‘멋대로 생각한 쪽 잘못이지. 잊어.’
무던하게 마술사는 자조했다. ‘아닌 척해도 나도 혼란스럽긴 한가 보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곤란한 처지란 말을 샐리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 나랑 함께 어인 섬에 가요! 음, 거기 가면 제 친구들도 있고…… 아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예요.’
작은 용기와 큰 호의. 물끄러미 듣던 마술사가 고갤 저었다.
‘아니. 제안은 고맙지만, 난 내 계획대로 움직이겠어. 방금도 그렇고 역시 요행은 내 길이 아냐. 또 실수하면 곤란하지.’
손길이 떨어졌다. 인어 목에 난 생채기가 마지막이었다. 보기만 해도 불쾌한 사슬을 가루로 만들며 마술사가 일어났다. 떠날 듯한 태도였다.
‘잠깐, 잠깐만요! 이대로 가려고요?’
‘그래.’
그리고 정말 그대로 사라졌다. 상투적인 인사 한 마디 없이.
올 때도, 갈 때도 바람. 예기치 않은 순간 불어와 인지 못하는 순간 떠나간다. 빈자리를 바라보며 어린 인어는 예감했다.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한동안 계속 뭍을 드나들 것 같다고.
“그니까 영웅담이군.”
삿치가 단정지었다.
“아니지, 고전 설화인가? 마술사와 인어의 뭐 그렇고 그런. 아가씨. 다섯 번이나 구해졌다니 심정은 이해하는데, 너무 낭만적…… 아니 그보다 무모하잖아! 구하는 텟사테싸는 뭔 죄야?”
“……영웅한테 빠지는 건 어린애의 특권이랬어요.”
“어이, 너 전혀 네가 어린애라고 수긍한 표정 아니거든?”
샐리가 짐짓 불만스레 빈 빨대를 빨아들인다. 투덜거리면서도 삿치는 빈 잔을 제 몫과 바꿔주었다. 유독 어린애한테 약해지는 것은 거의 요리사의 본능이라 봐도 좋았다.
그리고 어린애의 본능은 저를 향한 호의를 구분 짓는 일. 이들은 어른의 정서에 예리하리만큼 민감했다. 샐리는 안다. 삿치는 몰라도 다른 한쪽은 절대 이쪽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솔직히…… 좀 무서울 지경이다.
무수한 사선을 건넌 대해적은 단지 거기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선사한다. 샐리도 들어본 적 있는 이명이었다. 불사조 마르코. 흰 수염을 논할 때 늘 빠지지 않고 같이 회자되는 이인자…….
“예민하게 굴지 마, 마르코. 애라고.”
삿치의 질책에도 마르코는 말없이 느긋하게 얼음을 씹는다. 잘게 부서지는 소리에 샐리가 살짝 어깰 움츠렸다.
“인어의 피…… 불로불사요이. 테사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
대답해. 나른한 눈빛이 명령한다. 한껏 긴장하며 샐리가 기억을 더듬었다. 지나가듯 했던 얘긴데 중요한 건가?
“네. 텟사랑 한 얘긴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서…….”
들으라는 투로 삿치가 읊조린다. 미스터리 하나는 풀렸네.
마르코가 인어를 뜯어보던 시선을 다시 돌렸다. 단단한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그가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다.
삿치 말이 옳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대 밖 수확을 얻었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얘기인가 했더니…… 무려 주인공이 출처셨어. 테사를 떠올리며 마르코가 실소한다. 샐리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네가 그렇게 웃으니까 애가 놀란다, 인마. 진작 좀 풀지.”
“뭘 기대해. 하던 대로 했을 뿐이구만.”
“나름 예외야. 우리가 구해준 아가씨잖아.”
마르코는 새겨 듣는 눈치가 아니다. 삿치도 그냥 분위기를 풀고자 해본 말에 불과했다. 사실 그들은 웬만해선 민간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변수를 피하는 베테랑 나름의 요령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성적인 타입일수록 그런 경향이 짙었다.
그래도 삿치가 좋은 게 좋은 거라 한 번쯤 친절을 베푸는 반면 마르코는 굳이 무릅쓰지 않을 뿐이라서. 해적 주제에 일일이 사람 좋은 척해봤자 피곤하기만 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럼 마르코가 들은 종소리도 마술이 확실하군. 애초에 그거밖에 답이 없었지만 말야.”
“종소리요?”
“아가씨는 못 들었어? 뭐, 위험할 때마다 발동됐던 그게 한 가지 모습은 아니라며. 이번엔 우리한테 구조신호로 온 거겠지.”
그러면서 삿치가 눈을 찡긋한다.
“사실 아는 척해본 얘기고. 나도 몰라. 얘만 들었거든.”
눈짓을 따라 마르코 쪽을 바라봤다. 살짝이나마 웃는 모습을 봐 그런지 아까만큼 무섭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마르코가 툭 뱉는다.
“나라고 다 알까. 아마 공명 비슷한 거겠지. 테사가 나한테 뭔가 해두는 것 같긴 했으니.”
저도 모르게 샐리는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단순한 이름에 불과한데 저 해적이 발음하는 <테사>는 유독 어딘가 달랐다.
“저기…… 저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해.”
“텟사랑 어떤 사이예요?”
말하라더니 해적에게선 답이 없었다. 그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지른다. 인어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질문하는 얼굴부터 이미 미묘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마르코는 나지막이 삿치에게 물었다. ‘티 나나?’ 딴청부리며 삿치가 중얼거렸다. ‘심하게.’
주거 지역 인근 카페. 파라솔 그림자가 세 사람 위를 가린다. 잔의 얼음도 녹고 있었다. 느린 손길로 마르코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물 흐르듯 화제를 돌린다.
“대신 조언해줄 사이는 돼. 예를 들면 너 응석부리는 건 이제 관두라든가.”
어찌나 능숙한 솜씨인지, 샐리가 금세 잊고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 텐데. 무슨 의민지.”
셋 다 알았다. 마냥 설레던 십 대의 얼굴을 단번에 망치는 것도 재주라고 삿치는 혀를 찼지만, 그렇기에 만류하지도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는 해줘야 할 얘기다.
“듣자하니 제도에 마술사가 있을 때도, 떠난 뒤에도. 계속 기대고 있잖아. 구해주겠지, 뭐라도 해주겠지 기대하면서요이. 언제까지 그럴 작정이지?”
“…….”
“이번에 우리가 널 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라힐리의 마술이 반응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약에 취해 갇혀 어딘가로 운반되고 있었을 터다. 그 어딘가는 높은 확률로 노예 경매장 또는 천룡인의 컬렉션일 것이고.
“무모하게 사는 건 네 자유지만, 남의 수습을 당연시 하지도 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정말로?”
마르코가 묻는다. 한 치의 비꼼도 없이 담백한 어조로.
“제때 구함 받지 못해 노예가 되고, 능욕당하고, 죽어가도. 누구도 원망 않고 그저 네 선택에 따른 결과라 받아들일 수 있다?”
“…….”
“상상해 봐.”
해봤다. 그리고 샐리는 자신 있게 긍정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극적인 순간 언제나 배반 않고 나타나주었던…….
어린 얼굴이 이지러진다. 이제 막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에 접어든 나이였다. 마르코는 잔의 얼음을 흔들었다.
“무겁지. 그게 책임이다. 삶의 무게.”
“너무해요…….”
“원래 인생은 그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걔라고 안 그럴 거 같다면 네 착각이구만. 다들 이렇게 살아가.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 남한테 떠넘기고 한 몫을 다 해라.”
“…….”
“영원히 어릴 수 있는 건 일찍 죽어서나 가능한 일이거든.”
우리는 그런 가혹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간 마르코나 삿치나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해왔다. 의미 없는 죽음들이 너무도 많았다.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었다. 제대로 된 인도조차 받지 못하고 일찍이 사그라졌다.
답지 않은 친절도 전부 그 탓이다. 테사가 몇 번이고 살려준 어린 목숨이었다. 허비하길 원치 않았다. 넌 혹독한 세상이어도 되도록 오래 살아야지. 내 마술사가 슬퍼 않도록.
그러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이며 또 어려운 나이. 머릿속으론 이해해도 여물지 않은 가슴이 팔딱였다. 샐리가 치기로 반박했다.
“……아니요. 틀려요. 뭘 안다고 그래요? 한 번 구해줬다고 다 안다는 듯 가르치지 마세요. 뭐가 공평하다는 거야…… 어떻게 그래요? 텟사는 저랑 다른데. 엄청 강하다구요.”
“…….”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손짓 한 번이면 되는데요. 단지 그거 하나로 나 같은 건 몇 백 명이고 구원받을 수 있어요. 이 목숨이 어떻게 공평하고 동등해요?”
손톱이 다 벗겨지도록 긁어내도 풀어지지 않던 사슬도 단지 손짓 한 번에 가루가 되었다. 걸음 한 번에 수십 명이 물러났고, 경고하자 적들이 듣고 무릎 꿇었다.
마술사뿐만이 아니다. 흰 수염 해적단도 그랬다. 단 한 번의 등장에 수백만의 일상이 구원 받았다. 어떻게 이걸 기대하지 말라고 그래. 어떻게 그래.
샐리는 대 해적 시대에 태어난 인어다.
태생적으로 차별 받아왔고, 강자로부터 짓밟히는 폭력이 익숙했다. 책임지기보다 자비에 빌어 살아왔다. 생명의 무게가 다른 건 이 인어에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마르코가 침묵한다. 어쩔 수 없이 삿치가 대신 운을 뗐다.
“사람은 숫자가 아냐.”
“…….”
“그런 식으로 셈이 안 된다고.”
샐리는 제 논리가 질 것 같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른들의 망가진 표정을 보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다. 그래서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
“사, 살인자가 할 얘긴 아니에요.”
잠깐 정적이 돈 다음, 삿치가 앓는 소릴 냈다. 아 어린애랑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가치관 논쟁이라도 해야 돼?
가만 듣던 마르코가 대수롭잖게 응수했다.
“맞어요이. 우린 살인자지. 수천, 수만의 살인자 집단이다.”
“……비난하려던 건!”
“아니. 틀린 말 아니구만. 삿치 넌 네가 죽인 놈들 다 기억하냐.”
삿치가 텀을 두고 조소했다. 말이 돼? 못 하지.
“우리 둘만 해도 기억 못 할 만큼 거뒀어. 그럼에도, 인어. 우린 살인자지, 살인마는 아니거든.”
눈앞 목숨의 무게를 잊고 행위에 무감각해지면 거기서부턴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해적으로서 마르코가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어린 인어가 입을 다문다.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정말로 어린 태가 나서. 계속 무신경하던 이 해적도 한결 친절해진다.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바라지도 않고. 요점은 우리 같은 살인자 해적들에게조차 가볍지만은 않다는 거니.”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다. 어차피 빈다면 이리 쓰는 것도 가끔은 괜찮겠지. 시간을 가늠하던 마르코가 멀리 눈을 둔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는 일은 대부분 비슷해. 끝까지 맞서 싸우거나 받아들이거나 저주하거나 애원하거나. 내 앞에서 자기 인생을 들이대며 애걸하는 이들이 없었을까.”
적이라 해도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동료,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정인. 전부 별 다르지 않은 가치로 살아간 하나의 목숨, 하나의 무게였다. 거기서 눈감은 적 없다. 덜어낸 적도 없다.
“목숨에 차등 따윈 없어. 인지하고 업으로 쌓으며 나아갈 뿐.”
“그런,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째서요?”
왜 싸우는 거지? 어떻게 죽이고 죽는 투쟁을 계속 할 수 있는 거지?
“처음엔 사람처럼 살고자. 이젠 이 이름에 걸린 것들 때문에.”
턱짓으로 마르코가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탄탄한 육체를 감싼 셔츠 사이로 흰 수염의 졸리 로저가 보였다. 조금 전, 샐리가 보자마자 안도의 눈물을 흘렸던 심볼이다.
그걸 떠올리자 기분이 묘했다. 어린 인어는 한참 뒤 물었다.
“거기 걸린 것들이 뭔데요?”
장난스럽게 삿치가 팔짱낀다. 고뇌하듯 크게 침음한다.
“단순히 요약하면 <긍지>지만. 음, 조금 복잡하게 따져봐? 어디 보자…… 산하까지 포함하면 우리 총 전력이 수만이고, 그 수만이 떠받치고 있는 게…… 어인 섬만 해도 총 인구가 오백만이었던가. 그런 섬이 신세계에만 수십 개니까.”
“힉, 그런 걸 매번 생각하며 싸운다고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인어. 참지 못하고 삿치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릎까지 두드리며 하하 소리 내어 폭소한다.
“아니! 그렇게 복잡하게 안 살아. 우리가 그런 좋은 놈들로 보여?”
“뭐예요!”
“이젠 하나만 기억하지. 절대 쓰러지면 안 된다는 것.”
모욕을 당해서도, 무시를 받아서도, 패배를 해서도, 무너져서도 안 된다. 이를 제외한 복잡한 건 다 잊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거둔 목숨들이 무거워도 짊어지고 전진할 뿐이다.
“……그로 인한, 뭐든 전부 감수하구요?”
“그래, 아가씨. 애석하게도 적들만 죽는 것도 아니거든. 싸우다보면 내 동료들도 쓰러지지. 죽인 적들의 삶, 내 형제 동료들의 삶. 그거까지 전부 다 내 몫인 거야. 내 생의 무게.”
샐리가 논쟁에 열 오른 뺨을 감싸 쥐었다.
“어려워요. 해적들 다 이래요? 나쁜 사람 같지 않잖아요.”
“흠, 글쎄, 내가 보기엔 다 지옥 갈 놈들인데 우리가 그나마 조금 살만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넌 어때, 마르코.”
“해적이 다 똑같지요이. 따져봤자.”
무심히 일갈한 마르코가 샐리 쪽을 바라본다. 다시 처음처럼 웃음기 없이 건조해서 샐리가 움찔했다.
“다 불필요한 얘기고, 그냥 이것만 기억해라. 강자라고 더 가벼운 건 아냐. 이건 별개의 문제다. 마술사가 네 몫을 감당케 하는 일. 없게 해야 될 거구만.”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대신 진짜 딱 하나만 알려주세요. 정말 무슨 사이예요?”
해저에는 바람이 없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 해적의 가슴 속에는 불고 있는 바람 하나가 있다. 마르코는 담담하게 답했다.
“세상 모두가 지옥에 떨어져도 예외여야 할 단 한 사람.”
신이 있어 만약 내 몫의 구원과 은총이 존재한다면 그까지 주저 없이 발밑에 바치리라. 매일 용서를 빌어도 모자란 내 짓밟힌 성역…….
강청색 눈이 순간 일렁인다. 무던함 아래 일견 애수가 비치다 사라졌다. 금세 갈무리한 마르코가 심드렁한 투로 맺는다.
“나한텐 그래.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샐리는 생각했다. 농담이지. 이 사람 방금 자기 얼굴이 어땠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옆에서 삿치가 이마를 무겁게 짚었다.
어떤 정적이 셋의 테이블을 감싼다. 각자 다른 곳을 향한 침묵이다. 물보라가 이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적막이 깨진 것은 그들을 찾는 목소리로.
“마르코 대장!”
큰 소리에 깜짝 놀란 샐리가 들던 잔을 떨어뜨린다. 챙, 날카롭게 울리는 파열음. 마르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길하다. 미신만큼 뱃사람에게 정확한 것도 없는데.
“바인브릿지 타운에서 급보, 구조 요청이요!”
적습……! 크루가 미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대장 둘은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