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下
(*2/2 연참)
17
인간사, 투쟁의 연속.
머릿수와 쌓인 역사, 다양한 가치만큼 무수한 싸움들이 존재하겠으나 가장 끈질긴 것에는 이견이 없다. 바로 왕좌에 도전하는 싸움.
흰 수염 해적단의 최근 거점, 신세계 바인브릿지 타운.
정착된 거처를 지닌 두 명의 사황과 달리 흰 수염과 빨간 머리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음이 보통이다. 허나 이번은 달랐다. 세계 정부의 보복성 보도로 인해 항로 전역, 흰 수염의 현재 거점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가벼이 넘기진 않았으나 전례 없던 일. 크게 우려하지 않던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1번대 대장이 경계 강화를 명한 덕에 본대가 출항하면서도 연락선은 남겨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해적선 열세 척이 전파에 잡힌 것은 화요일 저녁.
정체는 최근 신세계로 넘어온 볼라 해적단으로 추정되었다. 선장은 <처형인> 뱅골 사이어, 현상금 이억 육천 대의 악명 높은 루키.
최근 가필로 해적단과 검은등자칼 대선단을 흡수한 세력 확장으로 소소하게 화제 되었으며 또 한 가지. 노골적으로 흰 수염 휘하 영토들을 건드려대 근래만 해도 어인 섬에서 도주한 전적이 유명했다.
연락선에서 빠른 파악이 가능했던 것도 그 탓이라며 자경대장은 전달을 마쳤다. 늦어도 내일 동트기 전 다다를 전망이란 비보도 함께.
모인 수에도 불구하고 적막이 광장을 감싼다. 싸늘했다. 얼마 전 성년식을 마친 청년, 자미르가 더듬더듬 손을 들었다.
“안 해칠, 싸우지 않을 가능성은 없나요? 우리가 항복하면.”
“모거니아다. 현상금이 높은 이유도 민간인 학살이…….”
자경대장은 말을 흐렸다. 자미르가 다급히 다시 물었다.
“열세 척이면, 몇 명…… 그니까 수가 얼마나 되는데요?”
“……대략 팔백정도라 하더구나.”
사 년 만에 결성된 타운의 자경대. 채 삼백이 안 됐다. 남녀 구분 없이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끌어 모으거든 가까스로 머릿수는 비슷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의미가 있을까? 빵을 굽던 손의 중년 여자가, 염소나 몰던 손의 소년 남자애가 해적을 상대로 총과 창을 들어봤자…….
모두의 뇌리 속 공통된 생각이 감돌았다. 철물상 안토니오가 무심코 내뱉었다. 다 죽은 목숨이군.
그 말을 신호처럼 공포가 군중을 휘감았다. 언제 침묵했냐는 듯 각자 할 말로 아우성쳤다.
모거니아가 팔백 명? 제기랄, 몰살이란 소리잖아! 전부 개죽음이야! 흰 수염은 어디 있는 거예요! 이대로 죽는다고요? 오, 주여!
우릴 지켜주는 게 약속이었어요! 대피소는 어디죠? 기준은 뭔가요! 우리 아이만이라도 안전한 곳에 숨겨주세요, 제발요! 엄마, 엄마 나 무서워…….
한 순간에 기진한 얼굴로 자경대장이 소리 질렀다.
“다들 진정하세요! 대피소는 다리 건너 곡물 창고입니다! 노약자가 우선이고 보호자는 아이들을 챙겨요. 그 외 싸울 수 있는 모두가 무길 들어야 합니다. 반드시요!”
“맙소사, 곡물 창고? 거긴 숨을 만한 곳이 아냐. 해적들이 거길 그냥 지나칠 것 같은가?”
“어쩔 수 없습니다, 맥스웰 씨. 타운 내 대인원을 수용 가능한 장소는 이제 거기뿐이에요. 기존에 있던 곳은 재작년 화재로 허문 거 기억 안 나십니까?”
부탁이니 여기서 더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맙시다. 자경대장이 간곡히 청하고 다시 외쳤다.
“창고 바깥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바리게이트를 쌓을 계획입니다. 불안해 마시고 질서 지켜 이동해주세요. 위험하니 아이들 손 놓지 마시고요!”
혼란 그 자체. 아이 한 명이 울자 곳곳에서 도미노처럼 울음소리가 퍼져갔다. 근처의 노인 한 명이 탄식한다. 이 광장이 또 피로 물들게 되다니…….
사람들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절망과 공포, 그리고 일말의 체념. 몰려오는 죽음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표정들이다. 지켜보던 바인브릿지의 마술사는 손을 말아 쥐었다.
이 모든 광경, 끔찍이도 현실감이 멀다.
와중에도 계산은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바인브릿지 타운 총 면적 62.87km², 총 인구 약 이천. 실면적은 그보다 작다. 내 결계로 커버 가능한 면적이 어느 정도지? 안 돼. 턱없이 모자라.
술식으로 보조하면? 벽마다 방호 마술진을 새겨서…… 이건 시간이 안 되잖아.
여러 갈래의 계산들이 전부 엑스 자를 그려낸다. 순간 이 젊은 마술사는 혼돈에 빠진다. 적당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 없는데, 오라힐리 테사는 6계급 고위 마술사다. 상아탑에 오른 현자였다. 답이 없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상하리만치 예민해진 감각도 테사의 신경을 매섭게 할퀸다. 창백한 목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마술회로가 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
“테사!”
쳐내진 손을 부여잡고 그웬이 비명 질렀다. 테사가 눈을 깜빡인다. 곤두선 탓에 저도 모르는 새 또 쳐낸 모양이다.
“너 정말! ……왜 그래 오늘. 어디 안 좋은 거 맞지. 그치.”
“아냐, 미안. 불렀니?”
“다섯 번이나. 너 지금 안색 정말 창백해. 쓰러질 거 같다고. 일단은 너도 대피소 쪽으로 가는 게 낫겠어.”
“……무슨, 그건 뭐야.”
바랜 적발은 어느새 질끈 묶어 올려져있다. 이걸 말하냐 그웬이 손에 든 사냥총을 들어올린다. 아버지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투로 답하는데, 가만 보면 총구가 흔들렸다.
“아이러니하지. 하필 상복 입은 사람들도 많은 날에 이게 뭐람.”
“싸우려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는 감각이 칼에 베듯 선연하다. 티내지 않고 마술사는 꼿꼿이 등을 세웠다. 이상을 감지 못한 그웬이 끄덕였다.
“그래야지. 이건 선택이 아니잖아.”
“…….”
“나보다야 테사 네가 더 도움 될 거 같지만. 몸도 안 좋아 보이고 강요할 순 없지. 대신 대피소 쪽 사람들을 지켜줘.”
“아냐, 그웬, 잠깐. 이건 그게 아니라.”
“거기, 너! 마술사!”
테사는 신음을 삼켰다. 손톱이 주먹 안을 파고든다. 날뛰는 마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정면을 본다. 갑자기 돌려세워진 원인은 목장의 맥스웰 씨였다. 어깨를 부여잡고 황소처럼 들이댄다.
“주인장, 어이, 넌 뭔가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그래서 해적들도 너한테 그렇게 친절하고 잘 대해준 거잖아. 응? 안 그래? 뭐라도 좀 해봐!”
“이봐요, 맥스웰 씨! 진정해요! 고작 한 명이라고요! 아무리 잘나도 팔백 명을 상대로 하긴 뭘 해요.”
근처에 있던 이들이 대신 뜯어 말렸다. 대부분 공방에 자주 드나들어 테사와 가까운 단골들이다. 선술집 빈센트가 위로하듯 테사의 등을 두드렸다.
“치료사 네가 이해해. 저 아저씨도 무서워서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는 거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일개 사람이 이런 재앙을 무슨 수로 막겠나. 다들 알아.”
치료사, 의사, 약사, 잡상인, 만물상, 주인장…… 타운 사람들이 마술사를 부르는 호칭은 대개 그랬다. 호칭이란 결국 하는 일에 대한 이미지다. 그들 눈에 테사는 아픈 걸 고쳐주고, 신기한 것들을 팔며 종종 신비한 일들을 해내는 젊은 여성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라힐리 테사는 마술사다. 타운 내 유일하고, 또 이 세계에 유일한 마술사. 이곳에서 단 한 사람, 마술사만이 그 의미를 안다.
빈센트가 그웬 쪽으로 테사를 밀었다. 그웬이 조심스럽게 어깰 안아 대피소 방향으로 이끈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왜 이래. 이거,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눈가를 짓누른 테사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스치는 사람들의 불안정한 속삭임, 아이들의 숨넘어가는 울음소리, 분주하게 엉키는 창대들의 부딪침, 긴장한 장정들의 땀 냄새.
눈앞으로 어지러운 영상이 점멸한다. 광장의 돌바닥 틈으로 짙게 고이는 핏물…….
“테사?”
적당한 길이 안 보여? 답이 없어?
거짓말 치지 마. 오라힐리 테사. 세계가 깔깔 비웃었다. 우매한 자들아, 저 마술사는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 너흰 다 속고 있는 거야!
“내가, 해야 돼.”
젊은 마술사가 이를 악문다. 사실 처음부터 알았다. 미친 듯이 날뛰는 감각이, 신경이, 회로가, 마력이 단 하나의 길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단한 문제다. 방어와 수호가 답이 아니면 남은 건 뻔하잖아. 도피 혹은…… <공격>. 타운에 닿기 전 열세 척을, 몰살시키는 선택지밖에 없다.
떠올리자마자 현대인의 가치관과 요정의 혈맥이 즉각적인 거부감을 일으켰다. 테사는 거칠게 턱을 손등으로 훔친다. 그웬의 부축을 밀어냈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도 눈뜬 마술회로가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미래를 전달했다. 피로 물든 광장, 사냥총을 쥔 채 나동그라진…… 친숙한 적발의 시체.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술사는 결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조금 다른 목소리가 그 이름을 찾아 부른다.
“텟사테싸!”
팔뚝에 새긴 졸리 로저 문신. 흰 수염 해적단이다. 인파를 헤치고 다가온 선원은 한참 찾았다며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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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스!”
한 달음에 복귀한 마르코가 사역마부터 급히 찾았다. 언제 어디든 목소리를 전하는 불사조는 그들이 나눈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다.
선실엔 없다. 보통 제 선실 아니면 아버지의 선실에 있는 터라 그쪽으로 발길을 트는데. “마르코, 이쪽!” 복도 쪽에서 하루타가 고갯짓했다.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니 작전실이다.
제일 먼저 통신실 쪽 크루들이 보였다. 처음부터 이쪽으로 왔는지 삿치도 있다. 들어가자마자 사역마가 마르코 쪽으로 날아왔다. 비벼오는 부리를 다독이며 물었다.
“아가, 네 주인은?”
영롱한 울음과 함께 어린 사역마가 갸웃거린다. 별빛만 흩뿌릴 뿐 아무 소릴 내질 않았다. 마술사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공방엔 없단 말이지.”
초조해진 마르코가 내려두고 전보부터 읽었다. 이미 다급한 연락이 수차례 오갔는지 기록된 대화 내역 시간대들이 틈 없이 촉박했다.
여러 대 전보벌레가 모인 곳으로 향하자 삿치가 묻고 있었다. “연락선에 전투 인력이 있었던가?” 마르코가 대신 답했다. “없어요이.”
1번대 대장의 심기가 심상치 않다. 크루가 눈치 살피며 덧붙였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마르코 대장 말마따나 거의 없다고 봐야지. 말 그대로 비상시를 대비한 연락 용도라.”
“다시 연결이요!”
마이크를 들며 통신 쪽 크루가 소리쳤다. 전보벌레는 연락선 담당의 용모와 비슷하게 변하며 다급한 땀을 흘러댔다.
—대피소는 임시로 찾긴 했는데, 곡물 창고래. 철목으로 된 구조긴 한데 오래돼서 사실상 기능은 못 한다고 봐야……!
“무사파. 2번대 무사파 맞나?”
—……어, 마르코 대장?
넘겨받은 마르코가 거친 손길로 머릴 쓸어 넘긴다. 갑갑했다.
“그래, 나여요이. 하던 일이 뭐든 일단 다 관둬.”
—뭐?
“마술사부터 찾아.”
“대장 잠깐, 지금 뭐라도 안 하면 거기 전부 몰살인데!”
—진심이야?
“찾아 전해, 아니 그냥 데려와서 나한테 바꿔. 책임은 내가 진다.”
아주 잠깐 침묵하고 무사파가 알겠다며 끊었다. 상대는 대장, 그것도 마르코다. 어련히 계획이 있겠지 싶었다. 전보벌레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놀라 반박한 크루들도 이해 안 돼도 일단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출항 준비나 해야겠군.” 상황을 지켜보던 삿치가 혀를 차며 나간다. 소식 있으면 알리란 말과 함께. 마르코의 상태를 살펴 그런 거라 최소 인력만 두고 모두 데려나갔다. 의외인 건 하루타. 나가지 않고 남는다.
그리곤 아버지에게 보고는 누가 했냐는 마르코 말에 나섰다.
“내가 했어. 준비되는 대로 알리래. 바로 출항하신다고.”
“그래.”
“……마르코, 미안. 내 실수야.”
그제야 마르코가 하루타를 돌아봤다. 어두운 표정으로 벽에 기댄 젊은 대장은 발치를 보고 있었다.
“다 잘라 말하면 누가 알아듣냐.”
“볼라 해적단. 어인 섬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놈들이야. 보고도 맨 처음 나한테 제일 먼저 들어왔고…… 내가 미리 처리했으면 이런 일.”
“하루타.”
어깰 짚어 말을 끊었다. 하루타가 고갤 든다. 하루타로선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먼저 어른이 된 형제는 평소와 같이 무던한 눈빛이었다.
“바다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나.”
“…….”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늘 그렇듯 그걸로 충분해.”
나가서 출항 준비나 하라며 마르코가 세지 않게 머릴 두드렸다. 하지만 마르코 너…… 하루타는 말을 삼켰다. 여기선 할 수 없는 얘기다. 그렇게 대장 한 명이 더 문밖으로 나간다. 작전실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가를 덮은 마르코에게서도, 대기하는 크루들도 말이 없다. 복도 바깥, 출항 준비하는 움직임들이 분주하다. 침묵하던 마르코가 손을 내렸다. 자국이 날 만큼 감싸 쥔 뺨을 문지르며 이내 중얼거린다.
“아무나 가서 카마리 좀 불러와.”
“카마리가…… 아, 조선공 카마리?”
“그래, 내가 급히 찾는다고 전해.”
한 명이 달려 나가고, 전보벌레가 다시 울린 건 딱 그때였다. 제일 가까이 앉아있던 크루가 황급히 마이크를 들었다. 바뀌는 전보벌레의 형상은…… 마르코가 일어난다.
왼쪽 눈가 아래 생겨난 아주 작은 눈물점. 꼬리는 끝이 그윽하게 올라가있다. 처연한 속눈썹이 그늘졌다. 반면 표정은 정적이리만큼 차분하다. 목소리가 울렸다.
—마르코.
간절히 기대는 목소리.
그에 끝내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제 표정이 얼마나 엉망일지 마르코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건네진 마이크를 쥐고 잠시 침묵했다.
“모두 나가.”
가라앉은 중저음 끝이 갈라진다. 크루들이 조용히 자릴 비켰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얼핏, 흐트러지는 대장의 얼굴이 보인다. ‘테사.’ 마지막으로 본 크루가 서둘러 떠났다. 봐선 안 될 것을 본 느낌이었다.
—계산을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삼사백 명까진 어떻게든 돼도 타운 전체는…… 정말,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진짜 싫은데.
“테사.”
—내 능력 밖이야. 방어는 못해.
방어는?
“……그럼 공격은.”
—…….
그 침묵으로 충분했다. 마르코가 전후사정을 파악하기엔.
‘야만인.’ 그날 테사가 깨트린 안경은 아직도 마르코의 서랍 깊은 곳에 담겨 있다. 마르코가 메마른 손길로 뺨을 쓸어내렸다. 야만의 시대에 살기엔 너무나도 고결한 내 연인아.
“내가 가, 테사. 최대한 빨리 갈 건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늦어도 동 트기 전이래. 그때까지.
“못 가. 알잖아요이. 그때까진 불가능해.”
—……왜! 왜 못 와?
“…….”
—해적들 싸움이잖아.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냐. 내가 왜,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
—말도 안 된다고요. 당신 미워요. 진짜 싫어. 끔찍해.
“내 사랑, 제발.”
진정해. 마르코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심리적 핀치에 몰린 테사가 마음 시렸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은 괜찮다. 다만 늘 차분한 이가 무너지고, 그걸 듣기만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시리도록 고통스러워서.
무력감이 든다. 살면서 최초였다. 서로 무거운 숨소리가 오간다.
한참 뒤 테사가 읊조렸다.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크기로.
—마르코…… 보고 싶어.
노련한 해적은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 무너질 때, 누군가는 버텨야 함을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만큼 그게 버거운 때도 없었다.
애써 가다듬고 마르코가 말했다. 머리를 식혀야 했다. 테사나 저나.
“갈게. 그래도 테사, 들어.”
—…….
“누구에게나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 와. 그래, 분명…… 죽여야겠지. 것도 꽤 많이. 그래도 때가 되면 그땐 망설이지 마. 거기엔 동정도, 머뭇거림도 있어선 절대 안 되고.”
나라고 이 수렁으로 널 끌어들이고 싶을까. 끝끝내 이리 된 현실이 저주스러울 뿐인데. 작전실 안,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크다. 마르코가 마이크 가까이 턱을 기울였다. 하지만 테사.
“명심해. 이 모든 건 내 탓이다.”
—…….
“네 싸움도 아니고, 넌 아무 책임 없어.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을 죽여도 그건 전부 내 몫이구만.”
전보벌레가 눈을 치켜뜬다. 마르코는 자상하게 일렀다.
“죽어가는 놈들이 원망하고 저주해도 너한테 닿을 일은 없어. 다 내가 짊어질 거니까. 넌 그저 날 생각해. 탓하고, 책임은 다 이쪽으로 미뤄. 그리고 살아남아 이기고. 그것만 해.”
—……어떻게, 어떻게 그래요. 당신 바보야?
“안 돼도 해. 그게 옳으니까. 다른 건 거들떠볼 필요 없어.”
지옥에 가야 한다면 내가 수만 번을 더 가지, 넌 안 보내.
속삭이는 중저음엔 친애가 담겨 와중에도 감미로웠다. 이 해적의 완전하게 무방비한 목소리는 드문 만큼 이 세상 들을 사람도 유일했다. 마술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울음 같은 웃음이었다.
—……친애하는 내 해적. 다 끝나면, 다 지나면 내 곁에 있을 건가요?
“밀어내면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민간인이 사황의 부선장을 무슨 수로 거부할까. 빨리 와요.
연인 간 밀어는 없어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치 보이는 것처럼 한참 응시하던 전보벌레가 눈을 감았다. 소리가 다 가신 작전실은 서늘하다. 마르코는 굳은 입가를 쓸고 일어났다. 아까부터 기다리던 문 앞의 인기척이 있었다.
“마르코 대장! 찾았다는데 통화 중이니 기다리래서.”
“잘했어요이. 카마리, 당장 출발 가능한 배 있겠지?”
“……뭐?”
당황한 카마리가 앞서는 마르코를 쫓아 걸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따져도 이미 발길의 방향은 확고했다.
“심해만 빠져나가면 그만이니까 대강 허울만 맞춰.”
뒤부턴 날아서 이동이다. 마르코가 바쁜 인원들을 지나친다. 코팅 작업은 미리 해두는 터라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무언의 압박에 못 이긴 카마리가 결국 앞장섰다.
출항 준비를 하고 있기에 늦은 시간이어도 분주했다. 소란 없이 움직여도 갑판 위 눈들의 개수는 무수했다. 심상치 않은 대장의 움직임에 1번대 크루들이 따라붙었다. 카마리가 배를 내리자 그제야 경악한 눈치다.
“대장, 지금 설마 단독 행동을…….”
“그 아, 아버지는 아시는 거요?”
마르코는 로그를 확인한다. 바인브릿지 타운까지 최대한 빨리 이동하면 닷새. 날아가면 얼마나 더 단축될지 모른다. 뭐, 괜찮겠지. 신세계의 바다가 아무리 날뛰어도 패기에 능한 불사조를 건드리긴 요원하므로.
“해저 바깥까지만 동행한다. 잔말 말고 항해할 줄 아는 놈 아무나 타.”
마침 같이 있던 항해사 고든이 1번대의 손길에 떠밀려 얼결에 올라탔다. 아니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가! 왜 내가! 잘 가쇼, 고든, 우린 로그 볼 줄 모르거든. 저 양반이 왜 눈 돌았는지 모르지만, 뭐 사정이 있겠지. 잘 부탁해?
견문색에 읽히는 대장 격 기척이 벌써 있었다. 막간의 여유는 여기까지다. 심해를 응시하던 마르코의 눈길이 힐긋 배 안쪽을 향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란 말이 이런 뜻은 아니셨겠지만.
“아버지께 전해. 무단이탈에 대한 처벌은 다녀와 받겠다고.”
네 개의 바다, 하나의 항로. 모든 바다 위 가장 위대한 아버지의 가장 신임 받는 아들. 흰 수염의 오른팔, 1번대 대장 마르코는 그렇게 처음으로 항해에서 벗어나며 생각한다.
나의 위대한 아버지. 이 노도를 이기려면 얼마나 더 많은 바다를 건너야 한답니까. 도무지 모르겠으니 너무도 무력한 이 아들을 쉽게 용서치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