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27화 (27/29)

27회

새들은 비틀린 폐곡선으로

(*3/3 연참)

22

커닝엄 수요일의 학살Cunningham Wednesday Massacre.

오라힐리 테사의 데뷔극은 군으로부터 그리 명명되었다.

사해와 항로 전역, 뉴스 쿠가 날아올랐다. 그들이 전달한 신문에는 신세계 어떤 해역에서 벌어진 사건과 수배지 한 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즉시 이 새로운 억대 루키의 등장에 집중했다.

세계 정부와 해군이 실상보다 훨씬 축소했음에도 그랬다. 단신으로 삼억에 가까운 해적과 휘하 대선단을 몰살시킨 건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었으니까. 해적단에는 선장만 있지 않다. 따르는 자들에게 붙은 현상금도 수두룩했다.

시류에 밝은 사람들은 결과보다 낮은 금액에 의아해했고, 시류 가운데 선 자들은 의심했다. 이 시대를 거대한 게임 판으로 보는 한 명의 조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파트너. 흥미로운 뉴스가 있던데.”

걸터앉은 곳은 옥좌. 한 국가의 정점에 위치한 가장 고귀한 자리이나 차지한 이는 모순적이게도 흉악한 짐승에 가깝다. 무엇도 길들일 수 없는 난폭성에 찬 안광이 번들거렸다.

—알아보는 중이긴 한데 쉽지 않군. 극비로 분류되었어.

“훗훗. 곧 소장으로 진급하지 않나? 장성 급에 오르면 다르겠지.”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진 않아.

“뭐지?”

—불로불사. 이 주제에 아직 관심 남아있겠지, 도피?

드레스로자의 새로운 국왕이자 칠무해, 천야차 돈키호테 도플라밍고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만한 왕위 찬탈자는 창가로 걸어가 성 밖 광경을 내려다본다. 언제 봐도 흡족한 눈높이의 풍경. 그러나 아직 모자라다.

하늘에서 바닥으로, 바닥에서 하늘로. 기어오른 악당의 허기는 쉽게 포만감을 느끼지 않는다. 아마 시대를 다 잡아먹기 전에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뱃속 깊은 데서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들끓는 저음은 사냥철을 맞이한 맹수의 희열과도 닮아있었다.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해라, 베르고.”

그때까진 이 나라를 소화시키고 있을 테니. 시선 아래 이 아름다운 정열의 국가. 국민의 웃음과 신음이 거짓 왕의 귓가를 적신다. 도플라밍고는 다트 판에 새로운 수배지를 꽂아 넣었다.

“<사도>라…….”

신의 후손에게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붙은 이명에서부터 동족들의 음험한 냄새가 났다. 몹시 향기로운 악취였다. 빼앗은 궁성 한 복판, 숨죽인 광소가 길게 울렸다.

“이런, 정말 터졌군.”

신세계의 한 왕국에도 뿌려진 수배지는 예외 없이 제도에도 닿았다. 명왕은 관조적인 눈길로 금액을 셌다. 이억. 낙원에선 높고, 신세계에선 애매하다.

간당하게 본부 대장들이 체크할 정도인가. 해군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사실 그럴 필요 없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생포> 문구에서부터 노골적이지만 말이다. 억 단위 수배자에게 오직 생존이 조건된 것은 이례적인 경우였다. 레일리가 짧게 혀를 찬다.

“아직 젊은데…… 골치 아픈 인생을 살겠어. 분명 해적은 아니라 했지 않나? 흠, 이렇게 되면 흰 수염 쪽에서 거두려나.”

“해군 하는 짓이야 늘 비슷한걸. 해적이고 아니고가 중요할까. 자기들 손아귀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중요한 족속들인데.”

샤키가 담뱃재를 털었다. 이들은 며칠 전부터 이미 이 대형 루키의 데뷔를 예견하고 있었다. 커닝엄 수요일의 학살. 해군에서 그리 정리한 바인브릿지 타운의 사건은 목격자들이 제법 많았다.

극비인지라 쉬쉬하긴 해도, 이동 인구가 가장 잦은 제도의 정보통에게 흘러들 만큼은 충분해서. <사도>라는 이명 역시 제일 먼저 그들 틈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대로 붙일 줄이야…….

현상금 수배자의 이명. 이것은 해군에서 손수 붙인다기보다 보통 직관적이고 입에서 입으로 먼저 전해진 것이 택해진다. 목격자인 해병들이 그리 불러대 설마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극적인 이명을 그대로 갖다 쓸 줄은 차마 몰랐다.

우러러보건 경멸하건. 그 사정이 어쨌든 간에 여긴 자칭 <신>이란 작자들이 실존하는 세계이니 말이다. 조금이라도 이치가 돌아가는 자라면 이 수배지에 담긴 저의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치미는 불쾌감에 샤키가 살짝 찌푸렸다. 담뱃불을 당기는 손짓이 거칠다.

“기분 더러워라. 어떻게 봐도 자기들 개로 쓰겠다는 선전포고잖아.”

“어쩌겠나. 그들 뜻대로 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그리고 세상엔…… 우리 같은 방관자보다 그걸 더 간절히 원하는 자들이 있을 거고.”

레일리의 시선이 샤키의 등 뒤로 향했다. 샤키는 따라 뒤 돈다. 술 저장용 냉장고 근처 무질서하게 붙은 수배서들. 그 사이,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지는 한 장이 있다.

녹은 얼음이 위치를 바꾼다. 레일리는 술잔을 한 번 흔들고 들이켰다.

“생태계엔 늘 천적이 존재하지. 무조건적인 불리함은 결코 없다네.”

“…….”

“험난해도 답은 찾다보면 드러나. 자네가 팬인 이 젊은이가 그 전에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길 응원하자고, 샤쿠야쿠.”

명왕이 웃으며 잔을 내민다. 샤키는 제 잔도 따라 채웠다. 조명에 반사된 호박색 양주가 보기 좋은 빛깔을 띠었다.

“꽤 근사한 말을 하는걸, 아저씨.”

“이래 봬도 왕의 파트너였거든.”

맞부딪치는 건배 소리가 영롱하다. 탁자 위 수배지로 잔의 물기가 떨어졌다. <사도> 오라힐리 테사. ONLY ALIVE. B 200,000,000. 사진 속 이레귤러는 긴 흑발을 나부끼며 차갑게 압도하고 있었다.

신이 내린 자. 그 세간의 위명에 결코 잠식되지 않을 존재감으로.

/

‘저 자가 그 오라힐리의 테사인가요? 소문보다 괜찮은데요.’

‘겉으로만 봐선 모를 노릇이지. 스코틀랜드 협회에서 혈안이 돼 띄워주고 있다는 걸 모두 알지 않나.’

‘이해해야죠. 알라스터 공 사후 그 땅에서 이백년 만에 나온 천재라던데 얼마나 필사적이겠습니까. 그래도 상아탑에서 주목하고 있단 얘기가…….’

‘그럴 만해요. 눈을 떠봐도 제 아래 경지는 아니군요. 저 나이에 벌써. 이러다가 우리 세대 때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될 지도요.’

스코틀랜드의 어린 천재. 그레이트브리튼 북부에 위치한 옛 땅의 가장 강대한 마술사 일족에서도 제일 강력한 힘을 타고난 테사 오라힐리에게는 탄생 시점부터 소문들이 줄을 이었다.

기대로, 질시로, 경외로. 사람들은 제각기 목적으로 이 젊은 마술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기 여념 없었다. 그건 테사가 북맹주의 대표 제자가 되고, 랭크를 갱신해 세우고, 왕립 마술원을 차석으로 졸업하면서 점점 더 불어났고, 상아탑에 입적하자 절정에 이르렀다.

영예로운 상아탑의 스물아홉 번째 현자. 전 세계가 들썩였다. 더군다나 젊고 빼어난 용모까지 겸비하니 매스컴은 안달이 나 못 견뎌했다. 6계급 마술사가 탑에 오르는 일이 공정하냐 따지는 갑을논박은 일반인들한테 더 이슈였다.

‘이걸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킨.’

사촌이 한숨 쉬었다. 킨은 미들네임 키안드라의 애칭으로, 마술사의 중간이름은 오로지 혈족들에게만 불린다. 같은 피로 연결된 일족들은 이름에 얽힌 증명에서 벗어나기에 강한 유대의 증거였다.

나이 차가 적은 사촌들은 늘 테사를 안쓰럽게 여겼다. 신문에 지저분한 뉴스가 실리면 제일 먼저 나서는 것도 그들이었다. 외려 개의치 않는 것은 테사였다.

‘왜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지? 사촌이여, 그건 외부의 소리들이 내게 닿을 때나 가능한 일이야.’

줄곧 상승선을 그리는 경지는 이 마술사의 에고를 날로 견고하게 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떠들던 테사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어차피 기준은 타인이 아닌 테사 자신에게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고삐를 틀어쥐고 테사는 보이는 정면에만 몰두했다. 이 젊은 마술사의 관점엔 사선이 없었다. 오로지 순수한 직선만이 존재했다.

다시 연구에 집중하는 테사를 보고 사촌은 뒤 돌았다. 그는 이유 없이 불안한 마음에 숙부를 찾아 이 대화를 전달했다. 테사의 친부이자 오라힐리의 수장인 그가 말했다.

‘탑과 공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다.’

그 말인즉슨 이 전제가 깨어지면 위험하단 뜻이었다. 이유를 묻자 수장은 대답 대신 이미지를 띄웠다. 파도에 쓸려 흔적 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이었다.

오라힐리 테사는 오늘 기분이 좋았다. 먼지 쌓인 공방을 청소하고, 손수 요리를 만들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바삐 움직이자 활기가 돌았다. 테사의 반듯한 이마로 땀이 맺힌다.

요리는 근래 새로 생긴 취미였다. 남이 해준 대로 먹거나 마술을 부려 만들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서. 물론 늘어난 식욕도 한 몫 했다. 마르코가 가르쳐준 대로 테사는 재료들을 손질하고, 수프를 끓였다.

평화롭다. 음식이 졸여지는 소릴 배경음 삼아 테사는 발을 흔들었다. 나직한 허밍이 울린다. 곁에 한 사람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일상. 해적이 배로 돌아간 지도 오늘로 이틀째. 곧 오겠지 생각하면서도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하게 됐다.

그 마음을 알았을까. 차분한 노크 소리가 울린다. 잠시 졸았던 테사가 번뜩 깨어나 달려갔다. 몸보다 웃음이 앞섰다.

“……누군지 보고 안겨요이.”

“그래서 싫어요?”

“나한테 묻는 거 확실해?”

거슴츠레 눈을 뜨고 확인하듯 살핀다. 능글맞은 투지만, 작게 턱을 깨무는 입술은 다정했다. 테사가 마르코의 단단한 뒷목을 쓰다듬었다. 조곤조곤 대화가 이어진다.

좋은 냄새 나는데. 요리 중이었나? 응. 보고 싶었어요. 안 본 사이 어리광이 더 늘었구만. 누가 자꾸 받아주니까 그렇죠. 싫다는 얘기 아니니 이쪽 좀 봐주지 그래. 됐어요, 재수 없어. 너무 극단적이잖아요이. ……. 오라힐리 테사.

마르코가 피식 웃었다. 은근한 손길로 테사의 손바닥과 손목을 문지른다. 해적은 이 작고 고요한 맥박이 좋았다.

“이래서야 어느 쪽 성격이 나쁜 건지.”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낄 때면 더 치닫고 싶은 욕심도 들어서. 마르코는 고갤 숙여 박동하는 부분을 깨문다. 거기서부터 느릿느릿 올라가자 테사가 해적의 귀 뒤를 만지작거렸다.

그에 아주 나른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테사는 숨죽인다. 마르코가 이러면 공기의 밀도부터 달라졌다.

무슨 해적질이 아니라 연애질만 수십 년은 한 사람 같아. 생각드니 억울하기도 해 테사가 손을 털어냈다.

“수 쓰지 마요. 지금만 봐도 명백한걸.”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뭐가.”

샐쭉하게 흘기는 눈매. 마르코는 한 마디 할까 싶다가 관뒀다. 의도하지 않는데 자극받는 사람 잘못이지, 상대 탓이 아니었다. 욕망 정도는 알아서 조절할 일이다. 어른의 얼굴로 해적이 본성을 다스렸다.

“왜 말을 하려다가 말아요?”

“알고 싶어?”

“응.”

“그래도 안 돼. 의외로 순진한 누가 듣기엔 적당히 걸러지지가 않구만.”

드는 손짓에 따라 테사가 턱을 치켜 든다. 햇살에 반사된 청회색 홍채…… 유리처럼 반짝인다. 극도로 대비된 색의 머리카락이 말간 뺨을 스쳤다. 마르코는 순간 말을 잃었다.

아는지 몰라도 가끔 이 해적은 눈과 행동이 각기 다른 양상을 띠곤 한다. 귀한 걸 다루듯 만지면서도 눈빛에는 감춰지지 않는 폭풍이 서렸다. 영원 같은 찰나가 흐른다. 잠긴 목소리로 마르코가 읊조렸다. 내 사랑…….

테사도 모르지 않는다. 마르코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순간에만 이렇게 불렀다. 들끓어 도저히 견디지 못해 뱉어내듯.

달뜨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누구 것인지 헤아릴 바 없다.

눈동자 속의 점까지 보이는 거리였다. 마르코가 테사의 아랫입술을 신음하듯 씹고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거를 필요 없겠어.

“애태우면 애타고, 빌라면 빌고 나쁘고 힘든 건 다 내가 할 테니 넌 그냥 마음대로 해. 갖고 놀든, 내팽개치든.”

“…….”

“이미 이쪽은 더 갈 데 없이 너로 엉망진창인 것 같으니까.”

아무것도 뜻대로 가능한 게 남아있지 않다. 배에 결박된 포로처럼 사로잡혀 그저 이끄는 대로 뒤흔들리며 자비만을 바랄 뿐. 마르코는 불현듯 그 사실을 자각했다.

성마른 욕망이 입술을 가른다. 겹쳐진 각도가 꺾이듯 기울었다. 테사는 뜨거워진 귓가로 사내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기 어린 신음이 울릴 때마다 앉은 허벅지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어디 비교조차 못하게 키스까지 잘하는 남자였다. 집중하면 의식이 멀어질 정도로 혼미했다. 움켜쥐는 테사의 손에 따라 셔츠 자락이 구겨진다. 느리게 떨어지며 마르코가 속삭였다.

“되도록 제정신일 때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도 한계인가 보다. 저를 위해서가 아닌 상대를 위해서. 어떤 때보다 신중해야 하는데도 마음이 홀로 달음박질치고 굴러 떨어졌다. 마르코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상기된 뺨으로 테사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 들어…… 네 수배가 떴거든 오늘.”

“…….”

“언제까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테사.”

“……알아요. 하려는 얘기는요?”

기나긴 장고였다. 오라힐리 테사란 사람을 만나고 사랑한 이래 마르코의 모든 순간이 이 과정에 속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의 인생을 지키고, 일상을 유지해서. 살육과 악의로부터 멀어져 평화와 선의에만 둘러싸여 살도록.

오늘 아침, 말없이 전달받은 수배지 한 장에 무슨 지옥을 갔다 왔는지, 어디까지 처박혔는지 누구도 짐작 못 할 것이다.

테사는 마르코의 숨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사무치도록 무거웠다.

“수많은 생각을 했어. 정말로 많이, 오래. 그리고 결정했고……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몰랐던 이기심이 하필 이 순간에 기어 나오는구만.”

“……마르코.”

“테사, 내 사랑아. 지금부터 하는 말은 최선도, 차선도 아냐.”

가까이 마르코가 눈을 내리깐다. 테사는 지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걸지도 모를 그의 밑바닥임을 깨닫는다. 일렁이는 눈빛은 음울하고, 진득했다. 또……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건 내 더러운 욕망이 건네는 네 인생 최악의 제안이다.”

“…….”

한 번만 물을게. 제발 수만 번 고민해.

“나와 함께, 바다로 가겠어?”

날씨는 맑음. 파도는 낮고, 바람은 없다. 이 화창한 날 어딘가의 인생들은 돌처럼 구르기 시작한다. 마르코를 바라보는 테사의 눈동자는 한겨울 호수처럼 파문 없이 잔잔했다. 약간의 텀 뒤, 평정심을 되찾은 해적이 나직하게 일렀다.

“지금 대답하지 마. 해도 안 들을 거니까. 최소한 오늘 내내 고민하고, 길수록 좋고, 모레 새벽까지도 괜찮아.”

“만약…… 내가 안 가겠다고 하면.”

“…….”

마르코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은 때때로 소리 내어 꺼내는 말보다 직설적이다. 해적의 지금 답도 그랬다. 테사가 생각했다. 눈앞 이 사내는 지키지 못할 말 따윈 꺼내지도 않는 부류의 사람이다.

이건 그들이 선 곳이 모와 도로 나뉜 갈림길 앞이란 의미…….

환상 같은 먼 비명이 울린다. 테사의 낯이 즉각 굳었다. 무어라 말하려던 마르코가 다시 다문다. 누구의 간섭도, 방해도 있어선 안 되는 오라힐리 테사만의 순간이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라도.

때마침 탄 냄새가 퍼지기 시작한다. 올려둔 채 잊고 있던 요리였다. 찡그린 마르코가 불가로 다가갔다. 애써 끓인 수프는 밑바닥까지 졸아져 남김없이 타들었다.

부는 바람이 없는 덕에 환기가 잘 되지 않았다. 입맛이 돌 일도 만무하고, 마르코는 한숨 쉬며 주변을 정리했다. 테사가 꺼낸 듯한 두 사람 몫의 접시들도 다시 집어 옮겼다.

“……테사, 이거 아무래도.”

“갈게요, 나.”

놀라 순간 손에 힘이 빠졌다. 미끄러진 접시가 잡을 새 없이 떨어진다.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청각을 들쑤셨다. 곧바로 마르코는 테사부터 확인했다. 사건 이후 소음에 부쩍 민감해진.

“괜찮아요? 조심 좀 하지!”

아무렇지 않았다. 테사의 말끔한 낯엔 걱정스러운 기색만 역력하다.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을 마르코가 반사적으로 저지했다.

“오지 마. 다쳐.”

그러나 이번에도 늦었는지. 테사가 작게 신음하며 비틀거린다. 마르코는 서둘러 안아들었다. 하필 맨발, 게다가 중앙이 제대로 찢겨 피가 금세 바닥에 고인다.

“누가 누구한테 조심하라고 지금……!”

“닥터. 잔소리 할 땐가요? 아프거든요.”

“기다려. 소독약은? 붕대는 어디…….”

잠깐.

왜 가만히 있지?

아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손수> 모든 걸 했지?

그 순간의 기분을 뭐라 형언해야 할지 평생을 다 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두커니 마르코는 멈춰 섰다. 그저 전신의 피가 빠져 나가는 느낌으로…….

실내의 싸한 한기가 밑에서부터 치달았다. 인지하자 몸서리칠 만치 서늘한 온도였다. ‘공방 안은 늘 최적의 온도로 유지되니까요.’ 지나간 시간 속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진공한다. 마르코? 의아한 눈치로 테사가 그를 불렀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 무구한 어조였다. 마르코는 다시 테사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 그는 육안으로 보일 만큼 무너지고 있었고.

단두대 앞에 선 자처럼 마르코가 묻는다. 오라힐리 테사.

“너…… 마지막으로 마술을 쓴 게 언제야.”

[작품후기]

♬ Amore - Ryuichi Sakamoto

'그가 처음 흘린 눈물은 너무도 깊어 내 몸 속으로 들어가니.'

p.s. 해군이 흰 수염 해적단과 테사 관계를 정확히 파악 못한 건 전적으로 마르코 공입니다 본문에선 생략됐지만 마르코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 숨겼어요

p.p.s. 마술사들의 핵심은 <에고>. 살인은 위기 자체가 아닌 발화점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