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에덴 제국의 수도, 비스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낡고 허름한 건물.
그 앞에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가 멈춰 섰다.
잠시 후, 마차의 문이 열렸다.
“지독하게 구질구질하군.”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다 쓰러져 가는 보육원을 보자마자 내뱉은 첫마디였다. 무미건조한 어투만큼이나 무정한 눈빛이었다.
《니드 보육원》
너덜너덜한 간판만 봐도 이곳의 재정 상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쉽게 해결되겠어.’
그는 귀족이지만 마부의 도움 없이 사뿐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딱딱한 밑창을 가진 구두를 신었음에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신비로운 등장에 떠들기 좋아하는 아낙네들이 관심을 가졌다.
“처음 보는 가문의 휘장인디.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인가?”
“신년제에 참여하려고 온 동맹국의 귀족일 수도 있고.”
“이 사람아. 그런 사람이 보육원에는 뭣 하러 오겠나?”
“뭐, 좋은 일이라도 하시려는 거겠지. 왜 그, 노블라수 오불리자? 그런 말도 있잖어!”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개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숙덕거리는 여인네들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들은 순간 등줄기로 살기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하나 묻지.”
고저 없는 목소리. 이름 모를 그 귀족이었다.
그녀들은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우리 얘기를 들은 걸까? 멀어서 들리지 않을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보다도 어느 틈에 다가온 거지?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귀족에 대해 감히 입을 놀리다가 걸린 빈민의 운명이란 뻔했다.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하거나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할 터.
그녀들은 냅다 바닥에 엎드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손바닥을 비비는 것뿐.
발소리 하나 없이 사내의 구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광이 날 정도로 잘 닦인 구두 표면에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 비쳤다. 그들은 곧 내려질 처벌을 두려워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책임자는 어디 있는지 아는가.”
예상 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
“귀가 먹은 건가?”
“예, 예? 아, 아닙니다. 누구를 찾으시는 건지…….”
“이 보육원의 원장. 어디 있는지 아냐고 물었다.”
짜증 서린 목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든 한 여자는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느릿하게 벌어지는 입술 틈으로 언뜻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를!
“흐아아아앙!”
여인이 품에 안고 있던 어린아이가 사내를 보고 울음을 터트리자, 그는 작게 인상을 썼다.
“!”
헉. 이 남자는……!
여인은 그제야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뿐사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우아한 걸음걸이.
흔들리는 흑발 사이로 보이는 인간의 것이 아닌 신비로운 눈동자.
눈가의 살벌한 상처까지!
최근 에덴 제국 사교계를 뜨겁게 달궈 놓았던 소문 속의 남자였다.
이든 라이언하트 백작.
[이방인 용병 출신이지만, 소유권 문제로 전쟁이 잦은 변방에서 공로를 쌓아 작위를 인정받았다지.]
그를 둘러싼 소문은 무수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나 모두가 확신하는 건, 그의 손에 수많은 이의 피가 묻었을 거란 것.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부디 자비,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든은 겁에 질린 여자들을 내려다보며 이유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전신을 덮쳐 오는 불쾌함에 그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 가던 중.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저기요, 아조씨.”
어린애의 어눌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돌아선 이든은 자신의 무릎만치 오는 작은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저 밀가루 반죽은.’
새하얀 은발을 가진 아이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흙 위에서 뒹굴기라도 한 걸까.
아이는 이름 모를 풀떼기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옷이며, 두 손이며, 양 뺨이 잔뜩 꼬질꼬질한 와중에도 꼬마의 두 눈동자만큼은 시리도록 빛났다.
“…….”
순간 그는 그 푸른 눈동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수녀밈 찾아왔써요?”
맹랑한 꼬맹이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원장을 아는가?”
“녜.”
“어떻…….”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으려던 그는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은 옷차림새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요기가 우리 집이니까여.”
눈치가 빠르군.
이든은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들어가실 꼬에요?”
제법 당돌하기까지 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아니면 귀족의 무서움을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는 굳이 꼬마를 나무라지 않았다.
“읏챠!”
아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장작더미 위를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뛰어넘어 그에게 다가왔다.
“따라오세여.”
“…….”
함께 불어온 기분 좋은 잔바람이 그의 코끝을 맴돌았다.
그는 부드러운 풀 향기에 어쩐지 날카로웠던 신경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를 뒤따랐다.
앞장서던 아이가 보육원의 문 앞에 다다르자 멈춰 섰다.
이내 휙, 뒤돌아선 아이는 무언가 바라는 듯 이든을 올려다보았다.
“뭐.”
“…….”
아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어서 콩알만 한 밀가루 반죽 같은 아이는 자신의 양 옆구리에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올렸다.
“아이 챰, 문은 아조씨가 열어야죠.”
뭐?
당찬 아이의 발언에 이든의 눈썹이 까닥, 움직였다.
‘조그마한 게, 제법이야.’
이든이 문을 열어 주자, 그 안으로 쏙 들어간 아이는 끝까지 당돌했다.
“밖에 나갔다 왔으면 손은 꼭 씻어야 됨미다.”
* * *
보육원 지붕 위로 정오의 햇살이 평화로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방문객이 손을 씻을 수 있게끔 수돗가가 있는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내내 머릿속은 그에 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곳, 니드 보육원에서만 지냈던 나로서는 이렇게 화려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기시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예전에 봤던 사람인가?’
그랬더라면 분명 기억했을 텐데.
오늘이 첫 만남인 게 확실한데, 어째서인지 그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아조씨 누구에오?”
“…….”
뒤따라오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우리 수녀밈 친구에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니, 그가 마지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수녀밈 친구 누구에오? 그럼 노아도 알아요?”
“…….”
“아조씨 혼자 왔써여? 아까 마차 타구 온 것 같은데, 아조씨 마차도 운전할 줄 알아요?”
무수한 질문 세례에 남자는 대답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삐딱하게 올라간 한쪽 눈썹을 보니 내가 귀찮은 모양이다.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해라.”
무정한 말을 뱉어낸 남자가 어서 안내나 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치. 완전 재미없는 아저씨야.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잠자코 뒷마당의 수돗가로 향했다.
“여기서 손 씻으면 됨미다.”
금세 그에게 흥미를 잃은 나는 아까 모아 놓은 풀떼기들을 수돗가에 펼쳐 놓았다.
빨리 원장실만 알려 드리고 언니들이랑 엄마 아빠 놀이 하러 가야지.
나는 소꿉놀이의 음식 재료로 쓸 이름 모를 풀떼기를 씻기 위해 노후한 펌프에 마중물을 부었다.
“물은 제가 틀어 주께요.”
늘상 소꿉놀이에서 풀 씻기는 내 담당이었기에 능숙히 펌프질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발 받침대 위에 올라선 나를 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땅콩만 한 게 힘은 좋군.”
나는 펌프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대답했다.
“나 땅콩 아닌뎨.”
당돌한 꼬맹이라고 생각했을까.
낮게 코웃음을 치는 그를 뒤로하고 손잡이를 힘껏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녹슨 철이 끼이긱,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찬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앗, 차거!”
이놈의 낡아 빠진 펌프가 오늘내일하더니 결국 맛이 갔나 보다. 우리는 사방으로 튄 찬물을 한껏 뒤집어썼다.
“!”
놀란 남자가 뒷걸음질치다가 철 양동이를 발로 차고 말았다. 양동이가 시끄러운 소리로 우당탕탕 굴러가는 바람에 근처 나무에 쉬고 있던 새들이 놀라 도망갔다.
“양동이 잃어버리면 안 되는뎨.”
수녀님께서 아껴 쓰라고 하셨단 말이야.
나는 포르르 달려가 소중한 양동이를 다시 주워 왔다.
놀란 건 그도 매한가지였던 모양이다. 슬쩍 쳐다보니 견고했던 그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있었다.
뭐야. 이제 보니까 완전 겁쟁이 아저씨였잖아?
동공이 확장된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를 보고 나는 으흐흥, 웃음을 흘렸다.
“아조씨 놀래써요?”
“……누가. ……아니다.”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잔뜩 곤두서 있으면서 아닌 척하시기는.
약간 상기된 그의 뺨을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나는 어른들의 비밀을 지켜 줄 줄 아는 착한 아이니까.
“괜챠나요, 아조씨. 내가 비밀로 해 줄께요.”
펌프의 손잡이를 원래대로 돌려놓고서 그의 앞으로 폴짝 뛰어갔다.
내 움직임을 따라오는 호박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또, 아까의 그 이상한 기시감이 찾아왔다.
“이상하다. 분명 아는 사람인뎨.”
“뭐?”
맹수를 닮은 신비로운 눈동자.
눈가에 있는 커다란 흉터.
험악한 인상이지만, 칼에 베인 흉터만 제외하고 본다면 미남인 그는 쉽게 잊힐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우리 만난 적 이써요? 제가 아조씨를 어디서 본 거 같은뎨,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요.”
“…….”
가늘어진 눈매를 보니 더욱 기시감이 커졌다.
흐음, 진짜 어디서 봤지?
“이상하댜.”
“나를 본 적 있다고?”
“우응, 녜.”
“확실한가?”
“……아마도?”
말을 끝내기 무섭게 남자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나는 오늘 너를 처음 보는데.”
날카로운 눈동자를 보고 숨을 덜컥 집어삼켰다.
어쩐지 사람이 아니라 맹수와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사자’ 같은…….
“기억해 내거라. 나를 어디서 봤는지, 또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잔뜩 긴장해서일까. 하필이면 그때 내 시선을 앗아간 것은 그의 붉은 입술이었다. 멍하니 그것을 응시했을 때 나는 틀림없이 보았다.
벌어지는 입술 틈으로 드러난, 송곳니.
그것은 아기의 연약한 살갗 정도는 쉽게 뚫어 낼 것처럼 날카로웠으며,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것에 가까웠다.
한데, 어째서 그에게서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아조씨, 이빨이 뾰족…….”
……헙!
순간 낯설지만 익숙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뭐야, 이 기억?’
그동안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깨어났다.
‘마치 내 것이면서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 기억은…….’
난데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은 내가 ‘루나’로 사는 3년 동안 잊고 지냈던, 빙의 전의 기억이었다.
‘여기가 소설 속이라니!’
그제야 나는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빙의된 몸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동안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빙의한 소설이…….
모든 캐릭터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사망 플래그가 휘몰아치는 피폐 소설인 거야?!
아직 모든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아 더욱 불안해졌다.
‘내 사인은 뭐지?’
쿵, 쿵, 쿵.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뎨…….”
부정해 봤지만, 한번 떠오른 기억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나는 분명 죽는다.
소설 속 곳곳에 숨어 있는 무수한 사망 플래그 중 하나 때문에!
“기억이 났나 보군.”
그가 나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어서 알고 있는 것을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걸 말했다가는…….’
시선이 마주친 그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침묵하겠다?”
그의 미간에 금이 생겼다.
호박색 동공 속 내 얼굴이 겁에 질려 가고 있었다.
니드 보육원의 막내인 나, 루나.
이 세계에 빙의한 후 고작 3년밖에 살지 못했는데,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여태까지는 내내 기억을 잃고 살아 마냥 해맑게 지냈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 줄을 똑바로 잡아야 했다.
‘온갖 죽음의 위기가 난무하는 이 소설 속에서 살아나려면!’
일단 첫 번째 위기는 바로 내 앞의 이 남자. 소설 속 가장 악명 높은 악당의 손에 죽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