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길들여지지 않은 수인족과 마주쳤을 때 살아남는 방법.
먼저 ‘종(種)’을 파악하라.
초식 수인족인 경우, 당신은 쓸 만한 노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육식 수인족일 경우는 당신의 생존 확률이 조금 떨어질 수 있다. 하나, 당신이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수인족은 폭력으로 굴복시켜라.
아주 희박한 확률로 수인족의 우두머리를 만나는 게 아닌 이상,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에덴 제국의 베스트셀러,
«짐승을 길들이는 법» 中 발췌
* * *
매주 일요일, 수녀님을 따라갔던 신전에서 어깨너머로 봤던 책의 구절이 기억났다.
나름의 사망 플래그였던 걸까.
책 속의 희박한 확률이 왜 하필 내게 나타난 건지.
눈앞의 사내를 보니 막막했다.
‘이든 라이언하트…….’
인간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수인족의 우두머리인 남자.
니드 보육원 뒤쪽으로 이어진 프리마 숲 너머, 제국의 경계에서 있어야 할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 잡아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저 살벌한 눈빛 좀 봐.
과연 ‘사자’ 수인다웠다.
사냥감을 손에 쥔 맹수는 어떠한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제 말 안 믿어 주실 거쟈나요.”
“판단은 내가 한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든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하고 난 후, 내가 살아남을 확률은?’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원작 소설을 여러 번 읽은 기억.
그리고 빙의 전, 동물 용품을 만들었던 내 재능.
‘이 두 가지면 충분해.’
생존에 승산이 있었다.
“목적이 뭐지?”
“녜?”
“네 배후에 누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그는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에게 잡힌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저는 그냥 아기인뎨요.”
“위장 마법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
예리한 눈빛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이렇게 의심을 사 버린 이상…….
‘어설픈 거짓말이나, 일방적인 목숨 구걸로는 살아남기 힘들 거야.’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복수를 위해 철두철미하게 본 신분까지 숨기고 에덴 제국에 잠입해 있는 이든 라이언하트.
만약 내가 그의 복수 계획에 방해된다면…….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이겠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그의 복수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심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조씨. 우리 자리부터 옮길까요?”
“잔꾀도 바닥 났나 보군.”
“비밀 얘기를 해야 됨미다.”
“무슨 비밀.”
“쉿.”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이 상황에서 그를 어떻게 구슬려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몰래 엿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쟈나요.”
맹수에게 물리더라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되는 법이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거야.’
그것이 설사 세계관 최강 악역을 속이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 * *
이든은 신중했다.
아마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복수는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한 것일 테니까.
“따라와.”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는 나를 숲속으로 데려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그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올라타라.”
그가 내게 명령조로 말했다.
고작 네 살짜리 어린애에게 무슨 수로 마차 문을 직접 열라는 걸까.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 봐도 소용없는 높이였다.
나는 심히 불친절한 그에게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문은 아조씨가 열어 줘야죠.”
나름 용기를 낸 소신 발언이었다.
그는 표정을 조금 구기긴 했지만, 별말 없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읏챠.
드디어 마차 안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남자아이를 입양하시기로 한 거 아닙니까?”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다.
가을철 밀밭을 오려 붙인 것 같은 탐스러운 금발을 가진 남자였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리챠드다!’
앞으로 비스에서 라이언하트 가문의 집사로 알려질 자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역할이었다. 책 속에서 그를 묘사했던 문장을 가져오자면,
‘이든의 오른팔이자, 골든 레트리버 강아지 수인’이었다.
“오.”
어느새 마차 앞에 선 리챠드가 나를 빤히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
이든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드디어 각하의 얼굴을 보고도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아이를 발견하셨군요.”
“뭐?”
리챠드는 겁이 없는 걸까, 아님 눈치라는 게 없는 걸까.
그는 딱딱하게 굳은 이든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거렸다.
“생긴 건 토끼를 꼭 닮으셨는데, 용감한 아기님인가 봅니다.”
“입양할 아이가 아니다.”
“예? 그럼 어찌 마차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저런, 설마.”
리챠드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든에게 작게 속삭였다.
“배가 고프실 때를 대비해서…….”
“내가 그 정도로 한가해 보이나.”
“전 그저 두 분에 함께 계시는 그림을 어쩐지 앞으로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 번 해 본 말입니다.”
웃는 낯으로 농담을 뱉는 리챠드를 이든이 살벌하게 쏘아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 등 뒤로 쭈뼛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리챠드.”
“예, 각하.”
“한 마디만 더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네놈의 묘비명으로 새겨 주지.”
“저는 맛없습니다만.”
“어련할까.”
이든이 마차의 문을 잡으며 덧붙였다.
“주변 정찰이나 다녀오도록.”
“분부를 받잡아야겠지요?”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리챠드!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든은 기어이 리챠드를 내쫓아 버렸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다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아, 이대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이든은 품속에서 작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5분, 카운트다운 시작하지.”
5분이라니.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째깍째깍, 부지런한 시계 초침 소리가 고요를 밀어냈다.
장소를 옮기는 동안 할 말을 미리 정해 두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난감할 뻔했다.
나는 혹시라도 이든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냉큼 입술을 열었다.
“꿈속에서 백쟉밈을 봤써요.”
“꿈, 이라.”
갑자기 호칭이 달라지자 그의 눈매가 예리하게 바뀌었다.
“저는 예지몽을 꾸거든요.”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차갑게 식은 호박색 눈동자에서 그의 속마음이 읽히는 것 같았다.
명백한 살기가 느껴졌다.
“해치워 달라고 용을 쓰는군.”
“진짜인뎨…….”
거짓말을 하려니 입 안이 말랐다.
‘거짓말인 걸 들키면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겠지.’
수돗가에서부터 들고 온 풀떼기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 싶을 때 나오는 오랜 습관이었다.
“백쟉밈한테 전 엄청나게 수상해 보이겠지만, 그래도 절 죽이시면 안 됨미다.”
도대체 어느 대목이 웃겼던 걸까.
피식 코웃음을 터트린 그가 어디 한번 계속해 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전 백쟉밈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아가가 될 테니까여.”
“어째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비스에 정착할 생각이시죠?”
“…….”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좋았어, 잘 하면 먹혀들겠어.
나는 용기를 가지고 준비한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에덴에서 태어난 아이를 입양하시려는 거구여.”
에덴 제국의 수도 ‘비스’는 제국민만이 정착하여 살 수 있다.
타지 출신이 법적으로 비스의 정착권을 얻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입양’이었다.
이든이 우리 보육원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왜 하필 우리 보육원으로 오신 건지도 알고 이써요. 우리 보육원은 다른 곳과는 달리, 후원해 주는 곳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자냐요. 그러쵸?”
“……네 윗선이 꽤 쓸 만한 정보원을 부리나 보군. 한데 말이다.”
그가 회중시계의 뚜껑을 닫고,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거짓말로 나를 속일 생각이었더라면 조금 더 성의 있게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제 말을 안 믿는 쪽으로 판댠 내리신 고에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지. 난 꽤 쓸 만한 세작들을 두고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예지몽을 꾸는 성녀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들고 온 적 없다.”
“…….”
그의 말이 옳다.
‘이건 내가 방금 살기 위해서 생각해 낸 계책이니까.’
이 세계관에서의 예지 능력은 수많은 마법사들이 갈망해 왔으나, 아무도 갖지 못한 능력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능력을 가진 이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이었으므로.
‘……하지만 말이야. 이곳이 소설 속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난 이 소설을 완독했으며, 심지어 내 기억력은 제법 좋은 편이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정보들로 예지몽을 꾸는 척 속일 수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지금 저를 죽일 꼬에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말과는 다르게 그는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기회를 잡을 차례였다.
“굳이 백쟉밈 손에 피를 묻힐 필요 업써요.”
“어째서.”
“어차피 전 내일 쥭을 테니까.”
이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서 덧붙여 말했다.
“보육원에 큰불이 날 꼬에요. 사고사 쪽이 이목을 덜 끌지 않게써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구겨진 표정이 마치 ‘숫자나 겨우 뗐을 것 같은 어린애가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온 거지?’라고 묻는 것 같았다.
“전 천재 아가니까요.”
“그것도 예지몽과 관련된 능력이라고 할 건가?”
“녜. 정답임미다.”
“…….”
“…….”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서로를 경계하듯 살폈다.
“……이건 또 무슨 술수일까.”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그의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반쯤 걸쳐진 회중시계가 잡혔다.
나는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어 그에게 시간을 보였다.
“아직 5분 안 지났슴미다!”
그가 내게 약속한 시간 중, 1분이 남아 있었다.
“…….”
째깍째깍.
투명한 금빛 동공 위로 시계 초침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반사되어 보였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이내 작은 실소가 뱉어졌다.
“확실히 다르군. 보통의 애들과는.”
“저를 살려 쥬세요.”
“지금 목숨을 벌어 봤자 어차피 내일 죽을 텐데?”
“백쟉밈께 제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할 수 있쟈나요.”
“네 하루 치 목숨의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기회를 얻으실 수 있찌요.”
“기회?”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눈 기회. 그리고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대신전에서 가장 원하는 능력을 손에 넣으실 수 있눈 기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제 말이 뽕이 아니라면 백쟉밈께 엄청 도움 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백쟉밈이 비스에서 자리 잡기에도 엄청 유리할 꼼미다.”
“확실히.”
“그리구 이건 정말 정말 비밀인뎨요.”
그의 옷깃을 잡아끌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 대신전의 비밀도 알고 이써요. 백쟉밈의 새와 쥐가 듣지 못할 비밀임미댜.”
“그럴 리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신관님이 남에게 들키기 싫오하는 거기도 해요.”
“그게 무엇이지?”
나는 그의 옷깃을 놓아주며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