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작은 그림자 하나가 어둠이 뒤덮인 프리마 숲을 가로질러 달렸다.
‘어째서, 어째서!’
다람쥐 수인, 토리 무크.
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 인간 아이. 왜 나를 살려 준 거지?’
조금 전의 상황이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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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휙휙 돌아가던 묵직한 물맷돌. 그것은 다람쥐 수인에게 아주 위협적인 무기였다.
‘정면으로 맞으면 즉사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앞을 작디작은 인간 여자아이가 막아섰다.
“기다려, 뇨아.”
하찮은 발음이었지만 목소리에는 강단이 있었다.
“그냥 놔쥬자.”
“뭐? 안 돼, 루나. 어른들이 집안에 소동물이 있으면 냄새를 맡고 육식 수인족들이 올 수도 있댔어.”
“해치지 않으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꼬야.”
결국 하얗고 작은 여자아이가 물맷돌을 돌리는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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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등 뒤로 따라붙던 푸른 눈동자가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몰라.’
애써 잡생각을 떨쳐 낸 토리는 마침내 숲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달빛이 비추는 커다란 상록수 아래, 비스듬히 기대어 선 이든 라이언하트가 달려오는 토리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각하!”
“상황 보고를 왜 직접 하러 온 거지?”
“소인, 허억……, 허억. 급히 각하께 전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마도구도 내팽개치고서 직접 달려올 정도로 급한 일이라고?
이든이 눈매를 좁혔다.
평소 이든과 토리가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은 늘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도토리 모양의 마도구로 소통했다.
‘한데 이리 직접 급히 올 정도라면…….’
예기치 못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든의 표정이 한껏 굳어졌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어쩐지 입술이 무거웠다. 자꾸만 그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해치지 않으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꼬야.]
그 인간 아이에 관한 생각을 곱씹을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걸 어찌 말씀드려야 하지.’
고민에 빠진 토리가 정리되지 않은 문장을 입 안에서 굴리며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콰아아앙!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두 남자는 같은 생각을 했다.
‘저 방향은…….’
조금 전 토리가 달려왔던 곳, 니드 보육원 쪽이었다.
이든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시곗바늘은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 * *
얼마큼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으…….”
바닥에 고꾸라졌던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주변을 눈에 담았다.
원작대로 화재가 났다.
‘폭죽 개수를 줄여 놔서 피해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폭발의 위력은 생각보다 컸다. 어린아이의 몸은 내 예상보다 더 약했고.
“루나! 괜찮아?”
“우응.”
“날 잡아. 부축해 줄게.”
비틀거리며 다가온 노아가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우리가 겨우겨우 1층에 도착했을 때는 지하 창고를 집어삼킨 불씨가 나무 계단까지 옮겨붙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두면 더 큰 불로 번지게써.”
“걱정하지 마, 루나. 곧 어른들이 소방 작업을 하러 오실 거야.”
다정한 목소리였는데 어째서일까.
불안이 엄습했다.
‘이상해.’
머지않아 그 불안의 원흉을 찾아냈다.
‘이 정도 폭발음이라면 자던 사람들도 깨어나 불을 끄러 올 법도 한데.’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소설 속 구절이 떠올랐다.
<의문의 보육원 화재 사고.
그것을 사주한 자의 목적은 주인공을 제외한 전원 사망이었다.
그자는 그 사건을 통해 노아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심기 위해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반인륜적인 일일지라도 말이다.>
문득 보육원 식구들이 떠올랐다.
“수녀밈이랑 언니 오빠들이 아직 2층에 있는 거 같아.”
“설마.”
고개를 젓는 노아의 표정이 점점 불안함으로 물들었다.
그 역시 뛰쳐나와서 불을 끄거나, 화재를 알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아까 내가 알려 줬던 치료법 기억하고 이찌?”
“응. 수녀님과 애들은 내가 데리고 나올게. 루나 너는 밖으로 나가 있어.”
노아는 망설임 없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나도 이제 내 몫의 일을 해야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서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가 모두를 데리고 나오기 전까지 2층 계단으로 불이 옮겨붙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끼익, 끼익, 끽.
펌프질로 물을 채운 양동이를 잡아끌었다.
“읏챠!”
한 번에 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린아이의 몸으로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옮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물이 든 양동이를 반쯤 끌다시피 옮기기 시작했다. 낑낑거리며 한 발짝을 막 내디뎠을 때.
슈우우욱!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자마자,
팍!
간발의 차로 날이 시퍼런 양날 도끼가 잔디밭에 박혔다.
‘조금만 늦었으면 발목이 그대로 날아갈 뻔했어.’
도끼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온통 어둠뿐인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귀찮게.”
이어서 걸걸한 쇳소리가 섞인 사내의 혼잣말이 똑똑히 들렸다.
공포가 양 어깨를 짓눌렀다.
“하여튼 간에 코노미야 상단 놈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니까. 코흘리개 아이가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닐 정도면, 쯧.”
복면을 쓴 장신의 남자가 울창한 풀숲을 해치고 나왔다.
나는 곧장 직감했다.
그가 나와 우리 보육원 식구들을 반드시 죽일 거라는 것을.
‘살수까지 준비해 놨을 줄이야.’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원작에서는 지금보다 더 큰 폭발과 화재가 일어났다. 때문에 살수가 굳이 등장할 필요도 없이 엑스트라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폭발을 줄여 놓은 탓에…….’
살아남은 엑스트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살수가 나선 것이다.
“허튼 생각 말고 거기 딱 서 있어. 안 아프게 죽여 줄 테니까.”
그가 바닥에 박힌 양날 도끼를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도망쳐야 해.’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무작정 숲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어둠에 잠긴 숲은 양날의 검 같은 곳이었다.
살수의 눈을 피해 잠시 숨을 수는 있지만, 험준한 지형 탓에 멀리 도망칠 수는 없는, 그런 양날의 검.
특히나 나 같은 어린아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이 쥐새끼가 어디 숨은 거야?”
나는 비탈에 비스듬히 튀어나온 커다란 나무뿌리와 바위가 만들어 낸 숨골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분명 여기 어디 있는데.”
살수가 가까이 있었다. 묘하게 들뜬 목소리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어떡하면 좋지.’
바로 머리 위로 그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서 숨소리마저 죽였다.
‘이럴 때 나한테 신성력이나 특별한 재능, 하다못해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었더라면.’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대로 죽어야 한다는 게 너무 서글펐다.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순간 내게 허락된 건, 고작 신에게 간절히 비는 것뿐이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고작’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부디 나를 가엾이 여겨,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신께 내 기도가 닿지 않은 걸까.
“이 쥐새끼 같은 계집애!”
“흐아아!”
내 몸이 커다란 손에 잡혀 위로 끌어 올려졌다.
“여기 숨어 있었구나.”
“놔, 놔아!”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럴수록 살수는 내 목덜미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켁……!”
숨통이 컥컥 막혀 왔다.
피가 한곳으로 쏠렸고 시야가 차츰차츰 어둠에 갉아먹혀 갔다.
“제법 딴에는 머리를 쓰긴 했다만, 다 티가 난단 말이지.”
살수는 땅 위에 짓밟혀 누워 있는 풀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분에 일이 복잡해졌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겠지?”
그 이후로는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흐려진 시야로 위협적으로 허공을 휘두르는 흉기만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걸까.’
다가오는 죽음에 덜컥 겁이 났다.
‘내 소원은 그저, 화목한 집에 입양 가서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나는 것뿐이었는데.’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꿔서 또다시 단명해야 하는 걸까.
어쩐지 조금 서러워졌다.
터무니없는 생각이 나기도 했다.
‘……누군가 기적처럼 나를 구하러 와 줬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아까 살려 준 다람쥐 수인이라도 은혜를 갚으러 와 주었으면.’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스스로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곧이어 내 목을 내려칠 도끼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콰드드득!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스르륵.
뒤이어 나를 붙잡고 있던 살수의 손에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
내 몸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정신은 없었다. 드디어 트인 숨통에 그간 참았던 숨을 몰아쉬느라 바빴다.
“허억! 허억! 헉……!”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땅을 긁는 낮디낮은 음성이 가장 먼저 귓전을 때렸다.
“……버러지 같은 새끼군.”
살기 넘치는 음성을 듣자마자 심장이 조금씩 가열됐다.
‘설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질반질 깨끗한 구두와 긴 다리를 따라 올라가니, 그 끝에는 선연한 호박색 금안이 빛나는 이가 서 있었다.
‘이든 라이언하트!’
그는 무감한 얼굴로 살수를 처참히 뭉갰다.
콰드득, 콱! 빠드득.
익히 알고 있는 명성대로 이든은 잔혹했다. 거대한 거구가 뼈도 못 추릴 만큼이나.
“저런, 저런. 조금만 더 하셨다가는 제가 뒤처리를 안 해도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리챠드의 한마디에 이든의 발길질이 멈췄다.
“……처리해.”
“뭐, 이미 각하 덕에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만.”
“시끄럽다.”
리챠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피떡이 된 살수를 지나쳐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또 뵙게 되었습니다, 아가님.”
아무렇지도 않게 화사한 미소를 짓는 리챠드 탓에 순간 이 모든 상황이 꿈인 건가 싶었다.
리챠드는 나를 보며 이든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아이는 어쩌실 겁니까?”
“…….”
그제야 이든이 돌아섰다.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정확히 내게 향해 있었다.
정말, 맹수의 눈빛이었다.
“네 말이 맞더군.”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좁혀 올수록 피 냄새도 함께 가까워졌다.
“정말로 보육원에 불이 났어. 정확히 자정에.”
“그럼 이제 제 말을 믿으실 수 이써요?”
“글쎄.”
무슨 결정을 내렸을까.
무표정 속에 감춰진 그의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네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네가 죽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그건.”
“아. 네가 죽는다는 게 화재로 인한 질식사도, 이 버러지 같은 놈에게 살인을 당하는 것도 아니라…….”
처음으로 그의 표정에 담긴 생각이 읽혔다.
“내가 해치운다는 거였나?”
그것은 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