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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우리 로즈는 내가 지켜야지 (71/145)

71화. 우리 로즈는 내가 지켜야지2021.11.04.

다음날 로제타는 하루 휴가를 신청했다. 당일에 급하게 올린 휴가 신청인데도 금방 승인이 떨어졌다. 하녀장 마리아는 그녀를 가는 눈으로 응시할 뿐 군소리를 보태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적어도 십 분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텐데 말이다.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정부라고 알려진 한, 그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당히 친하게 지내던 사용인들도 눈치를 보며 지나가기 바빴다. 반대로 얼굴만 아는 사이이던 몇몇은 친한 척하며 다가오기도 했다. 로제타는 그런 태도 변화가 자못 아쉬웠다. 다섯 번의 인생 동안 발레리안이 아닌 사람과 우정을 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금방 멀어지다니 뒷맛이 영 씁쓸했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으니, 멜라니와 엘리아, 리처드와 러크가 바로 그들이었다. 멜라니와 엘리아는 한결같은 태도로 로제타의 연애를 응원했다. 황태자 전하와 아주 잘 되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흐뭇해하면서도, 또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로제타의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알기에 말을 아끼는 듯했다. 한편 리처드와 러크는 제 주군이 연애하는 모습이 영 못 봐주겠는지 늘 질겁한 표정을 짓기 바빴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정말 연애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가 이렇게 착각할 정도면 문제가 있긴 있구나 싶었다.

16549578039894.jpg‘지금껏 혼자만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바보였을지도.’

로제타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또다시 떠올리며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르문트와 자신 사이에 흐르던 그 아찔한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선을 넘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리라. 다행히 아르문트는 그녀에게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으로 돌아갔다. 나지막한 굿나잇 인사만을 남기고는 말이다. 그가 떠난 뒤 로제타는 지독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생각으로 혼란스럽던 머리는 지끈거렸고, 아르문트와의 대화를 수십, 수백 번 복기한 탓에 심장은 아프도록 벌렁거렸다. ‘어쩌면’이라는 단어로 시작된 의심은 이제 ‘역시’가 되었다. 로제타는 연애 쪽에선 확실히 눈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머저리는 아니었다. ‘그대이기 때문에 달랐던 거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는 입 맞추고 싶지 않다’ 등의 말을 듣고서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바보는 없다. 여태까지 그가 남긴 증거가 한둘이 아니라면 더욱이 그렇다.

16549578039894.jpg“후우…….”

로제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젯밤 있었던 일을 몇 번째 되새기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 아르문트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만약 그가 자신에게 고백하더라도 거절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그의 마음을 깨닫게 되자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16549578039894.jpg‘거절하면 전하와 멀어질지도 모르고, 그러면 호위하기 까다로워지니까. 그래서 고민이 되는 거야…….’

로제타는 새벽부터 중얼거리던 말을 다시금 머릿속에 박아넣었다. 스스로에게 주문이라도 걸듯이 말이다. 그녀의 가장 큰 목적은 아르문트를 지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쩌면 연인이 되면 그를 가장 곁에서 호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의 고백을 거절하면 전속 하녀 자리마저 잃을 수 있다. 그러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제타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제법 그럴듯한 내용이라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포장하기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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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문에 노크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발레리안의 연구실에 다다라 있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로제타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예상대로 연구실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고풍스러운 나무 옷장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발레리안이 옷장 안의 포털을 활성화한 모양이었다. 명백히 그녀를 초대하는 신호였다. 로제타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의 기척이 있나 확인한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신하고 옷장 문을 열었다. 그러곤 환하게 빛나는 포털 속으로 지체없이 몸을 던졌다. 피부가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열린 옷장 문 사이로 발레리안의 침실이 보였다.

16549578039894.jpg‘우욱. 속이야…….’

로제타는 역시 마법 따위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다리가 힘이 풀려 작게 휘청거렸다. 금방 다시 중심을 잡으려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붙잡아 지탱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

1654957803992.jpg“안녕, 로즈?”

특유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했다.

16549578039894.jpg“좋은 아침, 발레리.”

1654957803992.jpg“응, 좋은 아침이네.”

통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그의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졌다. 발레리안은 오늘 집에만 있었던 건지 유독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끈으로 동여 꽁지머리를 했고, 옷도 화려한 마법사 복장 대신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니트를 입었다.

16549578039894.jpg“한여름에 니트라니, 안 더워?”

로제타가 식겁하여 묻자, 발레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1654957803992.jpg“네가 좋아하는 차림이잖아. 별로야?”

게다가 이거 여름용으로 따로 만든 거고. 그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16549578039894.jpg“아니, 멋있어.”

로제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해맑은 웃음도 곁들였다. 근육의 라인이 은근히 드러나는 니트는 발레리안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본디 단순한 차림일수록 그 사람의 미모가 더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그녀의 대답에 발레리안의 몸이 흠칫 굳었다. 이내 더욱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4957803992.jpg“그렇게 깜찍하게 굴어도 넘어갈 생각 없어.”

16549578039894.jpg“응?”

발레리안은 성큼성큼 앞서 걷더니 소파에 앉았다. 로제타 또한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착석했다. 그가 느릿하게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1654957803992.jpg“설명해봐, 로즈. 그 새끼가 왜 어제, 너를 껴안았는지.”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로제타를 빤히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16549578039894.jpg‘미소로 넘어가려는 건 역시 실패군.’

로제타가 속으로 쯧 혀를 찼다. 발레리안의 예상대로 일부러 의상 칭찬을 하며 말을 돌린 그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애교로 넘어가기에는 발레리안의 상태가 퍽 심각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잡았다.

16549578039894.jpg“그 새끼라니…… 황태자 전하이자 내 주군인데.”

1654957803992.jpg“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편을 드는 거야?”

좋지 않은 선택지였다. 발레리안의 입가에 옅게 감돌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로제타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16549578039894.jpg“아니, 난 당연히 발레리 편이지! 전하는 주군이고 발레리는 가족인데!”

1654957803992.jpg“……됐으니 방금 물은 거나 대답해봐.”

16549578039894.jpg“그게, 그러니까…….”

그녀가 말을 어물거렸다. 차마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로제타의 얼굴은 벌게졌고, 반대로 발레리안의 표정은 서늘해졌다.

16549578039894.jpg“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녀가 겨우 운을 뗐다. 무슨 말이길래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거지. 좋지 않은 직감에 발레리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원치 않던 내용이 이어졌다.

16549578039894.jpg“전하가 날, 좋아…… 하는 것 같아.”

말을 마친 로제타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좋아한다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머리로 생각하던 것을 입에 담은 것뿐인데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1654957803992.jpg“……황태자가 네게 고백했어?”

16549578039894.jpg“아니, 아직은 아닌데.”

아직은, 이라. 발레리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4957803992.jpg“그래서, 너는?”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물어오는 그의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16549578039894.jpg“응? 나?”

1654957803992.jpg“너는 어떻냐고.”

황태자를, 좋아해? 그가 한 단어 한 단어 씹어뱉듯 덧붙였다.

16549578039894.jpg“뭐? 당연히 아니지! 좋아하긴 내가 무슨……!”

로제타는 격렬하게 부인했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있길 망정이지, 손에 찻잔을 들고 있었다면 분명 바닥에 내던졌으리라.

16549578039894.jpg“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발레리. 내가 어떻게 감히 전하를 좋아해?”

발레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지만, 반응이 지나치게 거센 게 걸렸다. 이어진 설명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는 뭐가 감히란 말인가. 능력도 없는 황태자 따위가 로제타를 좋아하는 게 감히지. 그의 서늘한 눈빛을 확인한 로제타는 괜히 제 발이 저려 서둘러 부연했다.

16549578039894.jpg“만약 전하가 고백한다고 해도 거절할 거야! 전하는 루니엘라 영애랑 이어질 사람이니까.”

이렇게 말하면서도 옷 안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 어딘가가 불편했다. 반면 이번 설명으로 발레리안의 기분은 많이 풀어진 듯했다.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1654957803992.jpg“그래, 잘 생각했어. 그 자식과 엮이기엔 우리 로즈가 아까워. 훨씬.”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이제야 커피를 내어주려는 모양이었다.

16549578039894.jpg“푸핫, 그렇게 생각하는 건 발레리 너밖에 없을걸.”

1654957803992.jpg“그럴 리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야.”

로제타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발레리안이 팔불출인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제국 제일검 자리에 오른 자신이라면 몰라, 지금 자신은 남들이 보기엔 흔한 하녀에 불과한데 말이다. 저 정도면 팔불출도 아주 중증이었다. 어쨌든 발레리안의 기분이 풀렸다니 다행이다. 그녀는 안도하며 발레리안이 만들어준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16549578039894.jpg“발레리. 어제 회의는 어떻게 흘러갔어?”

아르문트의 가슴 떨리는 언행 때문에 잠시 뒷전이 되긴 했지만, 정확히 회의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발레리안은 우아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며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두 설명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로제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황후가 자신을 마녀로 몰아갔다는 얘기를 들을 땐 코웃음을 쳤고, 발레리안이 멋지게 등장하는 장면에선 뿌듯하게 웃었다. 그리고 루니엘라 공작이 개입한 부분까지 진행되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1654957803992.jpg“네가 처음 미래를 얘기해줬을 때는 그 루니엘라 공녀가 황태자와 약혼한 게 의아했는데. 어제 보니 가능성이 있겠다 싶더라.”

그렇게까지 의사를 드러냈는데 약혼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발레리안이 무심한 얼굴로 덧붙이며 슬며시 로제타의 반응을 살폈다. 행여나 그녀가 실망하거나, 상처 입은 얼굴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로제타는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16549578039894.jpg“이번 연회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겠네.”

1654957803992.jpg“이틀 뒤에 열리는 연회? 거기서 시중을 들려고?”

발레리안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표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소중하디소중한 로제타가 하녀가 되어 남의 시중이나 들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했다.

16549578039894.jpg“아, 하녀로 가는 건 아니고…….”

로제타가 또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은 죄가 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16549578039894.jpg“어쩌다 보니까, 파트너로 참석하게 됐어.”

1654957803992.jpg“……황태자의?”

16549578039894.jpg“으응, 전하의.”

뚝.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로제타는 열심히 호위를 위해서라며 말을 이었으나 변명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1654957803992.jpg“그렇단 말이지.”

발레리안이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역시 무언가 음모를 꾸밀 때 짓는 미소였다. 그는 여우처럼 웃으며 선언했다.

1654957803992.jpg“그럼 나도 가야겠네.”

16549578039894.jpg“뭐? 발레리 원래 그런 파티 잘 안 가잖아!”

1654957803992.jpg“호위를 위해서야.”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의 변명을 따라 하는 모습이 능청스럽기 그지없었다. 로제타는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16549578039894.jpg“전하 호위는 나만으로도 충분히-.”

1654957803992.jpg“아니. 누가 그놈을 호위한대?”

그런 자식은 관심 없어.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16549578039894.jpg“뭐? 그럼 누굴…….”

1654957803992.jpg“너.”

발레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1654957803992.jpg“네가 그 새끼를 지키는 동안, 우리 로즈는 내가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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