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밤까지 하고 싶은 일2021.11.07.
“나를 호위하겠다고? 그게 무슨…….”
로제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푸핫 헛웃음을 뱉었다. 누군가에게 지켜주겠다는 말을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누가 감히 기사단장이자 제국 제일의 검인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대마법사인 발레리안조차 걱정하는 소리를 하긴 했어도 호위하겠다는 발언을 한 적은 없었다.
‘내 실력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이러나?’
발레리안이 직접 확인한 로제타의 실력은 스무 살 이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터. 첫 번째 깨달음을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경지에 오른 상태는 아니었기에 그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늘 한번 대련이나 해봐야겠군.’
로제타는 제 친구를 다정하게 응시하며 그를 박살 내는 상상을 했다. 대련 한 번으로도 충분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경지에 오른 경험이 있고, 무려 4번을 회귀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과, 이제 막 첫 깨달음을 얻은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얼마나 다른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할 발레리안을 상상하니 벌써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발레리,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귀엽네.”
발레리안은 로제타의 반응이 못마땅하여 눈썹을 찌푸렸다. 몇 번을 회귀했든 자신이 더 연상이거늘, 어린애 보듯 쳐다보는 저 시선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장차 소드마스터가 될 우리 로즈는 아예 다치지도 않나?”
소드마스터가 불멸인 줄은 몰랐는데. 그가 입꼬리를 비뚜름히 휘어 올리며 지적했다.
“그건 아니지만…….”
로제타는 아르문트를 지키다 입었던 상처들을 떠올렸다. 서른 살 로제타의 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흉터가 이곳저곳 남아 있었다. 칼에 찔려 생긴 흉터, 화상 자국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녀가 약해서 생긴 상처는 아니었다. 로제타는 분명 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난 괜찮아. 꼭 오겠다면 전하나 같이 지켜줘.”
다만 로제타는 자신의 상처에는 둔감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사인 이상 주군을 위해 다치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과장을 조금 보태, 아르문트를 지키다 생긴 흉터는 최고의 훈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쨌든 아르문트가 무사하고, 자신은 죽지 않았으면 모든 게 다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발레리안의 눈에는 이러한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싫어. 난 널 지킬 거야.”
발레리안이 뽀로통한 얼굴을 하고선 주장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가 귀여워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군가 자신을 지키겠다 선언하는 것이 영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어쨌든 괜히 연회에서 아는 척하지나 말고!”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은근히 눈짓하던 발레리안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참, 우리 관계에 대한 정보는 잘 감춰뒀지? 후원내용 같은 거.”
“응. 후원과 관계된 정보는 애초에 많지 않았어. 메이필드 남작가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한 후원은 아니었으니까.”
응, 그랬지. 로제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을 후원한 것은 로제타의 어머니, 메이필드 남작 부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반대할 것을 염려하여 최대한 비밀리에 발레리안을 도와주었다. 후원금도 그녀가 결혼할 때 가져온 패물을 팔아 마련했다. 그러나 결국 메이필드 남작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장 후원을 중단하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남작 부인은 그의 말에 순종하는 척 연기하였으나, 남작의 눈을 피해 무려 5년을 더 지원하였다. 남작 부인이 죽었을 때, 발레리안은 이미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최연소 대마법사 자리에 오른 후였다. 남작은 그제서야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어떻게든 발레리안에게 줄을 대려 하였으나, 당연히 먹힐 리가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다른 사람들은 천재 대마법사 발레리안이 한때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지방 남작가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만 어느 파티 자리에서 발레리안이 ‘아주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흘렸던 탓에, 숨겨진 연인이 있다는 소문만 항간에 나돌 뿐이었다.
“항상 비밀장소에서 만났던 게 참 다행이야.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도 나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나돌지 않으니.”
이전 생에는 소문 때문에 힘들었는데. 로제타가 아련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잘 확인하고 있으니까. 다만 한 가지 염려되는 건…….”
발레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로즈.”
“뭔데?”
로제타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발레리안이 ‘안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정도라면 가벼운 내용은 아닐 테다. 혹시 아르문트와 관계된 걸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셀레나에게 연락이 왔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르문트의 안위와 관계된 소식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러모로 로제타에게 안 좋은 소식인 것만은 확실했다.
“널 만나러 수도에 온다고.”
셀레나 메이필드. 메이필드 남작가의 차녀이자, 로제타의 이복 여동생. 그녀와 관계된 일은 무엇이든 간에 피곤하기 일쑤이기에.
“걔가…… 수도에는 왜?”
셀레나가 수도에 오는 건 몇 년 뒤에야 일어날 일이었다. 그녀는 친하지도 않은 로제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사교계의 여왕 노릇을 해보겠다며 설치다가 결국 창피를 당했다. 그러나 지금의 로제타는 황궁 하녀에 불과하다. 찾아온다 해서 이득 될 것이 하나 없다. 심지어 이번 생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 로제타는 메이필드 남작과 셀레나에게 잔뜩 모욕을 당했다. 명예도 모르고 하녀 따위에 지원했다는 이유로. 이후 로제타에게 옷 한 벌 보내주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런 상황에 셀레나가 수도에 온다니. 로제타는 혼란스럽고도 피곤한 기분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그보다. 그 염치도 없는 게 너한테 연락을 해?”
로제타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화르르 타올랐다. 셀레나가 발레리안에게 어떤 소리를 지껄였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다. 분명 그의 권력에 어떻게든 빌붙어보려고 온갖 헛소리를 해댔으리라. 한때는 발레리안을 거지라고 모욕했으면서 말이다.
“뭐, 가끔. 답장한 적은 없어.”
발레리안이 셀레나를 떠올린 듯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발레리안은 로제타가 예상하는 수준 이상으로 셀레나를 경멸했다. 그녀가 자신을 모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집안이 몰락한 뒤 그 정도 모욕 정도야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그가 셀레나를, 그녀를 받아준 메이필드 남작을 증오하는 까닭은 그 두 명이 로제타를 지독하게 괴롭혀왔기 때문이었다. 셀레나가 남작가에 들어온 것은 로제타가 열두 살일 때였다. 느닷없이 못 보던 여자아이를 데려온 남작은 한때 젊은 혈기로 실수를 저질렀으나, 아이에겐 죄가 없고, 또 일찍이 어미를 잃은 것이 안타까우니 사랑으로 셀레나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남작 부인과 로제타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맞이했다. 남작이 주장한 대로, 아이에게는 죄가 없으니까. 그러나 셀레나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영악한 아이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애를 듬뿍 받으며 자라나, 남작 부인과 로제타를 무시하고 비웃었다. 남작 부인이 죽고 난 뒤에는 편애가 더욱 심해졌다. 로제타는 집안에서 마음 둘 곳을 잃었고, 아버지와 동생의 은근한 괴롭힘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만약 로제타에게 검이라는 목표가 없었더라면, 분명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으리라.
‘유독 황태자에게 정을 준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발레리안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황태자가 자라온 환경은 로제타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점은 로제타에겐 따로 몰입할만한 목표가 있었고, 자신과 같은 조력자가 있었으나, 황태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으나, 발레리안은 그것이 로제타가 아르문트에게 헌신하게 된 이유라고 여겼다.
“어쨌든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끔 경고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로즈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썩 자애롭지 않은 상상을 했다. 마음만 같아선 로제타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셀레나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로제타가 질겁할 것이 뻔하다. 발레리안은 웬만하면 로제타에게만은 제 안의 잔혹성을 숨기고 싶었다. 행여나 그녀가 놀라 도망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음…… 이번 연회가 끝나고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발레리는 괜히 나서지 마.”
“……그래,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발레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분위기를 환기했다.
“피곤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로즈, 오늘은 자고 가?”
너랑 밤까지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그가 여우처럼 눈꼬리를 휘며 덧붙였다.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왜. 황태자 때문에?”
“아니, 친구들이 일찍 오라 해서.”
발레리안의 눈빛이 일순 몹시 사나워졌으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해졌다. 더 오래 함께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그 이유가 황태자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나도 네 친구들이 궁금한데. 우리 관계는 언제 티 낼 수 있는 거야? 자기야, 내가 창피해?”
그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장난을 쳤다. 자기라니! 로제타는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호칭에 몸서리를 쳤다.
“아직은 안 돼. 전하 앞에서 모르는 척한 것도 걸리고…… 너랑 같이 다니면 괜히 이상한 오해 받는단 말이야!”
“나는 오해 받아도 괜찮은데.”
발레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녀의 어깨를 간지럽혔다. 이내 그가 강아지처럼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로제타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장난 좀 그만 쳐. 그러니까 발레리도 연애를 못 하지!”
“흐음.”
“이번 생에도 평생 연애 못 하고 살기 싫으면, 나한테 집착 그만하고 다른 여자 좀 만나고 다녀!”
“싫어.”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평소처럼 잔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만나라는 말이 옷 사이로 들어간 가시처럼 거슬렸다. 어휴, 한숨을 내쉰 로제타가 단호한 태도로 경고했다.
“너 계속 그러면 우리 둘이서 평생 외롭게 늙어갈걸. 나야 연애에는 관심이 없다 쳐도, 너는 아닐 거 아냐. 그래도 괜찮겠어?”
흠칫. 발레리안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평생 둘이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자신이 마련한 타운하우스에서 로제타와 함께하는 삶. 함께 요리하다 장난을 치고, 소파에 앉아 머리를 기대며 휴식하고, 잠들 때까지 꼭 손을 잡고 있는……. 그런, 부부 같은 모습이.
두근.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뜨거운 숨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나는.”
발레리안은 붉은 입술을 느릿하게 벌리더니,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좋을 것 같은데.”
너와 단둘이 평생을 함께하는 거. 발레리안이 어딘가 퇴폐적인 느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두 눈 위로는 기묘한 빛이 번쩍였다. 그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 치밀어오르는 욕심을 누르려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짧은 손톱만 피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으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로제타는 여전히 그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발레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 중, 진심이 아니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 발레리안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로제타는 저녁이 되어서야 황궁으로 돌아왔다. 하마터면 본궁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들킬 뻔했지만, 재빨리 나무 위로 몸을 숨긴 덕에 무사히 황태자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 배정된 방문 앞까지 다다르자, 익숙한 얼굴들이 그녀를 반겼다.
“로지!”
“왜 이제 와?!”
“응? 오늘 저녁에 도착할 거라고 얘기했었는-.”
로제타는 차마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멜라니와 엘리아가 그녀의 손목을 다급히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빨리 와! 큰일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