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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열심히 유혹하는 중 (86/145)

86화. 열심히 유혹하는 중2021.12.26.

16549580842429.jpg“조건?”

느닷없는 말에 아르문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16549580842434.jpg“조건이라고 하면 좀 그런가. 그럼 부탁이 하나 있어요.”

로제타는 또다시 표현을 수정했다. 어떻게든 그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해 최대한 애를 쓰는 것이었다.

16549580842429.jpg“말해봐.”

스킨십 중에 조건과 부탁을 운운하다니,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아르문트는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는 로제타의 말이 몹시 달가웠다. 어지간해서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정말이지 너무나 욕심이 없었다. 그에게 작위를 달라 요구하지도 않았고, 하녀를 그만둘 테니 제 거처와 생활비를 지원해달라 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그 흔한 보석이나 장신구 하나 바란 적이 없다. 누군가는 이것을 제 연인이 저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증거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르문트는 무엇 하나 더 주고 싶어 아쉽기만 했다. 때로는 제 마음대로 준비해 떠안겨줄까 고민도 됐지만, 로제타가 원하지 않는 선물은 진정한 선물이라 할 수 없을 테다.

16549580842429.jpg‘조금 더 날 의지하면 좋겠는데.’

아르문트는 하녀복을 입고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종종 이렇게 생각하고는 했다. 그런 그이기에 로제타의 부탁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16549580842429.jpg“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과장된 말로 라그나르 제국을 달라 한다 해도 망설임 없이 안겨 주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새 제 나라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물론 로제타가 그런 부탁을 할 리는 없겠지만.

16549580842434.jpg“정말요? 고마워요, 아르문트. 제 부탁은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말에 로제타의 낯빛이 금세 환해졌다. 도대체 무얼 원하길래 푸른 눈동자가 저렇게 반짝거릴까. 아르문트는 제 아랫도리의 사정도 잠시 잊고 기대했다. 그리고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16549580842434.jpg“곧 있을 사냥제에 절 데려가 주세요.”

아르문트가 침묵했다. 너무 느닷없는 얘기인지라 차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방금까지만 해도 저리듯 아프던 아래까지 잠잠해졌다. 로제타와의 연애에 흠뻑 빠져 사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어느새 사냥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황태자인 그는 의무적으로 참가해야만 했고, 동행할 호위와 하인도 이미 모두 정해둔 상태였다. 호위로는 리처드가 간다. 시중을 들 하인으로는 황태자 궁에서 그나마 오래 일한 청년인 말콤이 함께였다. 그런데 갑자기 로제타 자신을 끼워달라니. 아르문트는 도무지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16549580842429.jpg“파트너로서 기다리는 걸 말하는 거라면, 안 그래도 괜찮아. 승리의 입맞춤은 돌아와서 해줄 테니, 굳이 피곤하게 귀족들 사이에 앉아 있을 필요 없어.”

사냥제 참가자들의 파트너들은 준비된 별관에 앉아 제 파트너의 승리를 기원하고는 했다. 정확히는, 승리한 파트너가 당당히 돌아와 제게 명예로운 입맞춤을 해주길 기대했다. 귀족 영애들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순간인 데다, 그 주인공은 다음 사냥제가 열릴 때까지 명예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제타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당연히 그걸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이를 정정해주었다.

16549580842434.jpg“아니요. 사냥제 내내 전하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싶다는 말이에요. 하인은 총 세 명까지 데려갈 수 있잖아요.”

16549580842429.jpg“안 돼.”

거절이 이렇게 빠르다니. 방금까지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장담해놓고! 로제타가 억울한 마음에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

16549580842429.jpg“안 돼, 절대로.”

사냥제는 분명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행사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섬뜩한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귀족들은 사냥제의 낭만만을 칭송할 뿐, 그곳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많은 기사와 하인들이 주인을 지키다 허망한 죽음을 맞았고, 때로는 숨어든 암살자들로 인해 귀족이 사망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사냥제가 열릴 때마다 늘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자신 또한 언제든 그 사망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소중하디소중한 로제타를 데려가라고? 아무리 그녀의 부탁이라고 한들 그것만큼은 결코 들어줄 수 없다.

16549580842434.jpg“위험할까 봐 그러는 거라면, 전하도 아시잖아요. 저 엄청 힘센 거-.”

16549580842429.jpg“안 된다고 했어.”

아르문트가 차갑게 일갈했다. 로제타는 불쌍하게 눈썹을 늘어뜨리며 부탁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협상의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방금까지는 귀여운 애원이었다면-.

16549580842434.jpg“그럼 저 앞으로 전하랑 키스 안 해요.”

이제는 협박으로.

16549580842429.jpg“뭐?”

16549580842434.jpg“키스 안 한다고요. 다른 것도 다 안 해요! 이름도 안 불러!”

유치하다는 건 알았지만 로제타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지킬 수 있다면 마땅히 감행해야 하니까. 아르문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16549580842429.jpg“로제타. 아무리 그래도 안 돼.”

16549580842434.jpg“어허! 안으려고 하지 마세요. 사냥제에 데려가 주기 전까지는 저도 안 돼요.”

로제타가 재빨리 몸을 물려 그가 제게 손대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주 단단하게 마음먹은 모양인지 표정도 사뭇 진지했다.

16549580842429.jpg‘이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다니. 나도 중증이군.’

아르문트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곤 덤덤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16549580842429.jpg“사냥제는 그대가 참석하기엔 너무 위험하다. 스킨십을 못 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어. 내겐 그대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다정한 말이었으나 지금 로제타에겐 그 다정함이 너무나 쓸모없었다.

16549580842434.jpg‘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그녀는 아르문트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의지를 다졌다. 이글거리는 시선을 마주한 아르문트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어쩐지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사냥제 전까지 제 연애가 썩 순탄치 않으리라는 직감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불길한 생각은 곧 현실이 되었다. 데이트 이후 로제타는 정말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입맞춤을 허락해주지도 않았다. 키스는커녕 손을 잡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교제하지 않을 때도 손 정도는 잡았었는데. 아르문트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로제타와 살을 맞대는 것이 몹시 그립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것보다는 그녀의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금욕하는 삶을 살아오던 아르문트였다. 그러니 사냥제까지 정도야 충분히 금욕생활을 참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깨달았다. 한번 그 즐거움을 맛본 이상, 이를 알지 못하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하여 아르문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로제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결정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다짐을 깨고 입을 맞춰오게끔 유혹하겠다는 결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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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가을의 새벽. 유독 바람이 많이 불어오는 어느 날 밤, 로제타는 제 방 침대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항상 아르문트의 품에 안겨 잠들다, 이렇게 홀로 자려니 영 낯설었다. 회귀한 시간을 포함하여, 30년이 넘는 평생을 혼자 잠들었던 그녀이건만, 따뜻한 품에 익숙해지는 건 너무나 금방이었다.

16549580842434.jpg‘괜히 그런 선언을 했나.’

그녀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저녁 인사를 할 때만 해도 아르문트가 입 맞추고 싶어서 안달 난 것이 뻔히 보였다. 불쌍한 고양이 같은 눈으로 저를 보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단지 그뿐, 그는 절대 사냥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로제타 자신만 더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16549580842434.jpg‘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나을까…….’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아르문트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때, 벽 너머로 낯설고도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자고 있어야 할 아르문트가 이상하게도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16549580842434.jpg‘광증.’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왜 갑자기? 로제타는 번쩍 몸을 일으키며 원인을 분석했다.

16549580842434.jpg‘설마 스킨십을 못 해서? 그 스트레스가 광증이 나올 정도로 컸다고?’

아무리 애가 탄다 해도 그건 좀 심하지 않나. 그녀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재빨리 아르문트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덮쳐올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그의 방 안은 아주 조용했다. 그는 보통 때와 달리 얌전히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검은색 가운도 흐트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다만 로제타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전혀 얌전하지도, 멀쩡하지도 않았다.

16549580842429.jpg“안녕, 로제.”

아르문트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짐승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16549580842429.jpg“나와 놀아주러 온 건가?”

말투나 발음이 이전에 비해 몹시 자연스러웠다. 마지막으로 광증이 발현됐을 때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가?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짐승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16549580842434.jpg“전하, 괜찮으세요?”

로제타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르문트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는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49580842429.jpg“거기서 그러지 말고, 얼른 이리와.”

광증 상태가 맞군. 로제타가 확신했다. 유혹하듯 말하는 모습과 대사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휴,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얼른 기절시켜서 잠이나 푹 자게 도와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해서 멈춰 서고 말았다.

16549580842434.jpg“저, 저, 전하. 지금 뭐 하세요……?”

아르문트가 느릿하게 가운의 허리끈을 풀기 시작한 탓이었다. 느슨해진 가운 사이로 튼실한 가슴 근육과 조각 같은 복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훌륭하기 짝이 없는 몸매였다.

16549580842429.jpg“그야…….”

기어코 가운이 침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힘이 빠진 여체가 자연스럽게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 아르문트의 당황스러운 행동에 놀라 힘이 빠진 건지, 아니면 아닌 척 그에게 넘어가고 싶었는지 그 진심은 로제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16549580842429.jpg“열심히 그대를 유혹하는 중이다만.”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아르문트의 커다란 손이 로제타의 손목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 두툼한 근육이 담겼다.

16549580842429.jpg“이거,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지. 로제타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볼을 파르르 떨었다. 실제로 그녀는 아르문트의 튼실한 근육을 좋아하다 못해 환장했으니까.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16549580842434.jpg“전하, 지금 제정신이죠.”

로제타가 애써 화난 척 인상을 찌푸리며 지적했다.

16549580842434.jpg“광증 상태일 때는 저한테 ‘그대’라는 표현 쓴 적 없거든요.”

16549580842429.jpg“아, 맞아. 그랬었지.”

아르문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16549580842429.jpg“그걸 잊고 있었군. 아직 기억이 다 나는 건 아니라서.”

16549580842434.jpg“아니, 어떻게……!”

광증이 발현된 척하며 유혹을 하다니! 이게 한 나라의 황태자가 할 짓인가! 로제타는 너무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 아르문트는 매우 뻔뻔하게도 속눈썹을 팔랑거릴 뿐이었다.

16549580842434.jpg“……잠깐, 다 나는 게 아니라는 건…… 일부는 기억이 난다는 거예요?”

16549580842429.jpg“글쎄, 어떨 것 같나?”

로제타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자신이 아르문트와 했던 일이 하나둘씩 떠오른 탓이었다. 그 무엇 하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발, 제발 기억 안 나라! 그녀가 간절히 바랐다.

16549580842429.jpg“걱정 마, 그리 대단한 기억은 없으니까.”

아르문트는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주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16549580842429.jpg“나를 고양이 다루듯 조련했었지. 먼지떨이를 장난감처럼 쓰면서 말이야. 아, 고양이 간식까지 줬었나?”

쪽. 아르문트가 그녀의 눈가에 가볍게 입 맞췄다. 지은 죄가 있는 로제타는 차마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16549580842429.jpg“얌전히 굴면 보상 삼아 입 맞춰준다던 건 꽤 자극적이었어, 로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도 흥분돼서 미칠 것 같았거든.”

쪽, 이번에는 입술이었다. 마찬가지로 로제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그렇게 여러 번 입을 맞췄으면서, 낮에는 아무것도 모른척하다니. 우리 로제타는 앙큼하기도 하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80842429.jpg“다 넘어가 줄게. 그러니 넌, 내 유혹에 넘어가 주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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