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네 애인이 나와 닿지 말라던?2021.12.30.
다음날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결국, 그의 유혹에 제대로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르문트를 고양이 취급했던 걸 다 넘어가 준다는 제안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자위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그냥 그 얼굴에 홀렸던 거야.’
로제타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며 인정했다. 나긋하게 웃으며 자신을 유혹해오는 아르문트가 너무 섹시해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유혹에 약한 사람이었나.’
로제타는 이불을 말아쥐며 자책했다. 요즘 그와의 연애에 흠뻑 빠져 있었던 탓에 기강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르문트를 째려보았다. 그는 새벽까지 몸을 움직이느라 피곤했는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는 그의 허락을 얻어낼 수 없다는 건 확실해졌다.
‘아니, 이런 식이 아니라도 불가능할 거야.’
로제타는 그의 잘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조건을 건다고 해도 아르문트는 사냥제 동행을 허락해주지 않을 테다. 태도가 어찌나 단호한지 도무지 파고들만 한 틈이 없었다.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답답한 게 더 컸다. 약해빠진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말인가. 로제타는 쯧쯧 혀를 차면서도 슬며시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작거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인데도 질감이 아주 훌륭했다.
‘허락을 받는 건 포기하자.’
이 정도로 가능성이 없다면 매달리는 시간이 아깝다.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사냥제에 쫓아가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몰래 따라가지, 뭐.’
로제타는 두툼한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생긋 웃었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것이었다.
“아침부터 적극적인데, 로제. 어젯밤엔 그렇게 힘들다고 울더니.”
막상 일어나 생각해보니 부족했나 봐.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일어나자마자 속삭이는 내용이 야릇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어. 그대 손길 때문에 난 이미 이 상태거든. 그러니 그대가 책임져야지?”
아르문트가 제 아래쪽으로 눈짓하며 주장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로제타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침이라 그런 거잖아요!”
“아니. 그대 때문이야.”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로제타는 그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최대한 힘 조절을 했음에도 아르문트에겐 제법 셌는지 그의 눈이 금세 불쌍해졌다.
“그런 표정 지어도 안 통해요. 더 할 생각 마요!”
“알았어. 이상한 짓 하지 않을게. 그냥 안고만 있지.”
아르문트는 쿡쿡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제타는 못 이기는 척 끌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오늘 일정은?”
“아, 잠시 본궁에 다녀오려고요. 친구를 만나러……. 그, 저번에 말했던 루시아요!”
아르문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확인한 로제타가 재빨리 부연했다. 루시아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그의 얼굴이 다시 상냥해졌다. 역시나 그녀가 혹 남자를 만날까 질투를 한 모양이었다.
“친한가 봐. 제법 자주 만나는군.”
“음, 꽤 친한 편이에요. 오늘은 뭐 부탁할 게 있어서, 짧게 보고 오려고요.”
“부탁? 어떤 거?”
“별거 아니에요. 어쨌든 금방 올 테니 걱정 마세요.”
로제타가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르문트는 부드러운 손길이 퍽 만족스러워 눈을 감고 그녀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제 연인이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차마 짐작도 하지 못한 채.
***
“도와줘, 발레리!”
로제타는 발레리안의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비장하게 소리쳤다. 커다란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리자 발레리안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도와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로즈?”
“갑자기는 아니지. 내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잖아.”
로제타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려 미소 지었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발레리안을 향하는 시선은 어쩐지 사나운 데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발레리안은 지은 죄가 있으니까.
“며칠 전에 그런 짓을 해놓고,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르문트와의 데이트 날, 발레리안은 뜬금없이 그녀를 찾아와 온갖 헛소리를 지껄였다. 데이트에 끼어든 건 사안이 급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고 식성까지 조언해주는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복수가 두렵지도 않은지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사실 더 일찍 올 줄 알았는데.”
네 평소 성격이라면 진작 찾아와서 성을 냈을 테니까. 그가 가만히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런데도 오지 않길래.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아예 내게 관심이 없는가 했지.”
로제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듣고 보니 최근 발레리안을 찾아온 건 모두 부탁할 게 있을 때였다. 실제로 요 며칠 아르문트와 밀고 당기기를 하기 바빠 발레리안은 찾아올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지금 연구실에 온 이유도 그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다.
‘심술을 부릴 만했군.’
로제타는 머쓱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리안은 이 와중에도 그녀를 위한 커피를 내려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는 그녀가 오면 먹을 걸 내어주곤 했다. 정작 로제타는 회귀한 이후로 그에게 밥 한번 사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새삼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리 아르문트의 죽음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하나, 그래도 조금 더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미안.”
로제타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발레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반성이 빠른 건 서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됐어. 나도 네게 짓궂게 굴었으니, 무승부로 치고 넘어가자.”
역시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로제타가 몰래 혀를 찼다. 하긴, 발레리안은 그렇게 눈치 없는 짓을 할만한 사람이 아니다. 눈치 없는 척 연기하며 제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사람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럼 내게 심통이 나서 그런 연기까지 한 걸까?’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아는 발레리안이라면 둘만 있을 때 삐진 티를 냈을 것이다. 아르문트가 있는 자리에서 그럴 게 아니라. 굳이 그 중요한 자리에서 심술을 부리다니.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아니면 혹시, 그 자리에서 그럴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나?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른 순간, 그녀의 앞에 무언가 쓱 다가왔다. 시원한 커피가 담긴 유리잔이었다.
“그래서, 뭘 도와주면 되는데?”
발레리안이 커피를 내밀며 묻자, 로제타는 자신이 방금까지 생각하던 것을 잊고 대답했다.
“내가 사냥제에 잠입할 수 있게 도와줘!”
귀족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요한 행사인 만큼, 사냥제에는 초대받지 않은 사람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하다못해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신원도 확실하게 검사하며, 편의를 위해 다양한 마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특히나 황실 마법사들은 행여 암살자가 숨어들지 못하도록 사냥제가 열리는 숲 주위로 결계를 형성한다. 로제타야 물론 결계쯤은 충분히 없앨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꼬리가 밟힐지도 모른다. 그러니 확실한 잠입을 위해서는 발레리안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냥제에 잠입을?”
“응. 전하를 몰래 쫓아다니면서 호위하려고.”
“굳이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어?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내가 황태자 주위에 있을 텐데, 호위는 내게 맡기지 그래.”
발레리안은 이번 사냥제에 참석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귀족들에게 그가 아르문트의 편에 섰음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공평한 시합을 위해 아르문트를 졸졸 따라다니며 지원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나마 호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발레리안의 눈을 벗어나 아르문트를 공격할 수 없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로제타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지…… 불안해서 그래. 느낌이 안 좋아.”
미래가 지나치게 바뀐 것도 그렇고, 1 황자가 극독을 사들인 것도 그렇고.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둘이 아녔다. 이러다 갑자기 아르문트가 사냥제에서 습격을 받아 죽기라도 하면. 그녀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레리, 부탁할게.”
방어 결계에 흠집을 만드는 건 발레리안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마법사에게 걸리기라도 했다간 그의 명예에 큰 오점이 남을 테니까.
“……우리 로즈는 참 약았어.”
그러나 발레리안은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탁하는 로제타에게 결코 거절의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런 예쁜 얼굴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거절해?”
꾸욱. 그가 로제타의 이마를 누르며 눈웃음을 지었다. 기다란 눈매가 은근하게 휘어지는 모습이 몹시 장난스러웠다.
“발레리! 고마워!”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로제타는 이렇게 외치며 그의 품에 뛰어들려고 했다. 늘 그랬듯 그를 껴안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안기기 전 그녀의 몸이 멈칫했다.
‘아르문트가 싫어할 거야.’
타운 하우스로 가지 않고 여기서 대화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는데, 너무 흥분한 탓에 잠시 잊고 말았다. 로제타는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발레리안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치 빠른 발레리안은 귀신같이 이유를 알아차렸다.
“왜, 네 애인이 나와 닿지 말라던?”
“아니이. 그건 아니고.”
“남자 생겼다고 날 이렇게 멀리하다니. 서운한데, 로즈. 나만 널 각별하게 여겼나 봐.”
그가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그냥, 아르문트는 우리 관계를 모르잖아. 제대로 설명한다면 가족 같은 사이라는 걸 알고 이해하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말을 안 한 거니까. 이 상황에 이렇게 뒤에서 스킨십하면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로제타가 빠르게 덧붙였다. 그러자 발레리안의 눈썹이 짜증스럽게 휘어졌다. 그녀의 말에 불쾌한 요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족 같은 사이’라는 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황태자의 기분을 살뜰히 살피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쾌했던 건 바로-.
‘언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됐지?’
로제타가 황태자를 ‘아르문트’라고 불렀다는 점이었다. 그날 한소리 했다고 바로 이름을 부르게 시킨 모양이다. 하, 어이가 없어서. 발레리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럼, 이해하고말고.”
그가 생긋 미소지으며 말하자 로제타의 낯빛이 금세 밝아졌다.
“그런데 로제타.”
다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응?”
“스킨십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거지? 기준이 너무 모호하잖아.”
발레리안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동시에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손을 잡는 것도 안되는 거야?”
“으음, 악수까지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발레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조금만 더 고개를 돌렸어도 입술이 닿을 뻔했다.
“이렇게 가벼운 뽀뽀는?”
“발레리!”
로제타가 경악하여 뒤로 물러났다.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자 발레리안은 뭐가 문제냐는 양 해사하게 웃었다.
“너……!”
“설마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로즈? 먼저 내 볼에 입 맞췄던 건 너잖아.”
난 돌려준 것뿐이야. 그가 능글맞게 속삭였다.
“아기가 누나한테 뽀뽀 좀 할 수도 있지. 안 그래?”
“네 덩치로 아기는 무슨 아기야!”
“네가 그랬었잖아, 아기라고.”
로제타가 그의 볼에 입 맞춘 날 했던 대화를 일부러 들먹이는 게 분명했다. 로제타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냐 쏘아붙일까 고민하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우 같은 발레리안이 그걸 모르고 했을 리가 없다. 그에게 크게 신세를 져야 할 날도 코앞이니, 이번만은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로제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은근 성격 안 좋은 거 알지.”
“맞아, 안 좋아. 그래도 우리 로즈는 날 좋아하지?”
“어휴, 말이나 못 하면.”
그녀는 더 얘기하는 걸 포기했다. 애초에 이길 수가 없는 말싸움이었다. *** 달콤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사냥제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