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깨어나다2022.02.24.
로제타는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구덩이 속으로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주변은 빛 한 줌 찾아볼 수 없이 새카맸고,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두 잊고 어둠에 제 몸을 맡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점차 정신이 돌아오며, 몽롱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말이 없어요!”
익숙한 미성의 목소리. 누구의 것이더라. 아, 테오도르 신관의 것이다.
“대마법사 님의 대처가 워낙 빨랐던 데다가, 또 매일 오셔서 치유마법을 써주신 덕분인지 회복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요.”
“그 말은…….”
“예, 이 기세라면 이틀 내로 깨어나실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 신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지 머리가 웅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아늑한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 아직은 더 쉬고 싶었다. 곧이어 소음이 잦아들고 편안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나지막하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로즈.”
발레리다. 로제타는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평생을 들어온 것이니 헷갈릴 리가 없었다.
“만약, 만약에 말이야. 내가, 너를…….”
속삭이는 음성에 잠이 더욱 밀려들었다. 로제타는 차마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수마에 몸을 맡겼다.
“분명, 이틀 안에 깨어난다 하지 않았나.”
“……예, 전하.”
“그런데 왜. 일주일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이어지는 듯했으나 이미 정신을 놓은 그녀에게는 윙윙거리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도 백방으로 조사해봤지만……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분명 대부분 회복하셨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긴 조심스럽지만, 어쩌면 머리를 다쳤던 것이 문제가…….”
“살려.”
“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살려내.”
“……예, 전하.”
또다시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그쯤부터 로제타의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로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을 저토록 애타게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도 점차 명확해졌다.
“사랑해.”
아르문트였다. 그는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로제타의 귓가에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였다.
“그대가 너무 간절해서…… 미칠 것 같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일어나야 해, 얼른 일어나야 해!’
로제타는 어떻게든 눈을 뜨려고 애를 썼지만, 눈꺼풀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일어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제발…… 제발 눈을 떠.”
아르문트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손도 처량하게 바들거렸다. 그가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를 깨닫자 반쯤 꺾였던 의욕이 하늘을 뚫을 듯이 치솟았다.
‘내 남자가 울고 있는데 자빠져서 잠이나 자고 있을 순 없어!’
천근이든 만근이든 들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녀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온 신경을 제 눈에 집중했다.
‘일어난다!’
그리고 번쩍 눈이 떠졌다.
“헉!”
로제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밝은 빛이 시야를 채웠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숨만 훅훅 몰아쉬었다. 평온한 정적 속에 짹짹거리는 새소리만 창문을 넘어 들려왔다. 이내 호흡이 진정되고 눈부심도 한결 잦아들었다. 로제타는 천천히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담겼다. 한동안은 올 수 없었던 곳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직접 쓸고 닦은 곳이니 모를 리가 없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방. 아르문트의 침실이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다는 것은 아르문트가 무사하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그 사고에서 다행히 살아남은 모양이고 말이다. 아직 첫 번째 깨달음밖에 얻지 못한 몸으로 흑마법을 파훼하려 하고, 무방비하게 샹들리에 아래에 깔린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녀는 아르문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저도 모르게 뛰어나갔고, 마찬가지로 저도 모르게 흑마법을 파훼했다. 그만한 기회가 다시 오지 않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로제타는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은 걸 알았으니 더더욱.
‘마력핵은 발레리가 챙겼겠지?’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추론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발레리안이 사고가 일어난 즉시 자신에게 달려왔으리라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그이니 마력핵의 존재도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로제타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도 알았을 테고 말이다.
‘엄청 화났겠군.’
이 또한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만나자마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며 역정을 내리라.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행동을 하면 쏜살같이 달려와 노발대발하던 그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로제타는 그의 긴 잔소리를 예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상처가 다 나은 건 아닌지, 움직일 때마다 몸 곳곳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고통에 익숙한 그녀에게 이 정도는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을 무시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로제타가 돌연 우뚝 멈춰 섰다. 무언가 이상했다. 어딘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분명 며칠은 누워 있었을 테니 근육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정상일 텐데.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쌩쌩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여 제 몸을 살폈다. 그리고 곧 자신의 기운이 두 배는 늘어난 것을 깨달았다.
“이건…….”
깨달음이다. 로제타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첫 번째 생에서는 스물다섯에서야 얻었던 두 번째 깨달음을 오 년이나 앞서 깨우친 것이었다. 여러 번 회귀하며 몇 년을 앞당긴 전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빠른 적은 처음이었다. 하녀 일을 한답시고 훈련도 제대로 못 했는데, 최단기록을 달성할 줄이야. 아무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온 기운을 짜내 흑마법을 파훼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로제타의 낯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해졌다. 아직 첫 번째 생에서 다다랐던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한참 남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도 감개무량했다.
‘앞으로는 더 편하고 확실하게 아르문트를 지킬 수 있을 거야!’
로제타가 푸른 눈을 반짝거리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돌린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르문트와 눈을 딱 마주쳤다. 제 몸 상태에 너무 집중하느라 정작 주변은 신경 쓰지 못한 결과였다.
“아르…….”
로제타가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다가 멈칫했다.
-“제발, 그만해.”
불현듯 자신을 밀어내던 아르문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가 이름을 부르는 걸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좋은-.”
약간의 착잡함을 느끼며 마저 인사를 하려 했는데 입이 막혔다. 성큼성큼 커다란 보폭을 옮긴 아르문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절박함이 느껴지는 손길이 그녀의 몸을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로제타는 눈만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로제.”
거칠게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로제타.”
손바닥 아래에 닿은 그의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헐떡거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 아르문트? 울어요?”
깜짝 놀란 로제타가 그의 몸을 살짝 밀어냈다.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확인한 그의 눈가가 붉고 촉촉했다. 조심스럽게 얼굴 쪽으로 손을 뻗자 아르문트는 얌전히 그녀의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댔다.
“미안해.”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로제타의 손을 적셨다.
“그대가 거짓말을 했대도 좋아. 계속 나를, 속인다 해도 괜찮아.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 좋아. 같잖은 질투심도 이젠 드러내지 않을게.”
“…….”
“그러니 제발…… 제발, 로제. 내 곁에서 떠나지 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하는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사랑해.”
애달픈 사랑 고백을 듣고 나서야 잠들어 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새벽 내내 자신의 곁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그 간절한 목소리. 모두 아르문트의 것이었다. 돌연 코끝이 찡해지며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어쩐지 그녀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대는, 아직 나를…….”
사랑하나? 아르문트는 차마 묻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그녀의 마음이 달라졌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아르문트는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죗값이었다. 곧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르문트가 젖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볼과 코끝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로제타는 울 것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가 제게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설사 또다시 시간이 돌아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와 모든 것을 반복해야 한다 할지라도.
“아르문트, 당신을 사랑해요.”
그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마치자 결국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서럽게 울던 이전과 달리 이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마 당신보다 제가 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로제타가 장난스럽게 덧붙이자 아르문트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오며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이 마주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아르문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자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전하, 이거 두고 가셨-! 로제타! 깨어난 거야?!”
눈치 없는 방해꾼이 끼어들었으니, 바로 러크였다. 그는 황태자 앞이라는 것도 잠시 잊었는지 그녀가 깨어난 기쁨에 방방 뛰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두 명의 서늘한 시선뿐이었다. 아차. 그제야 자신이 연인의 꿈만 같은 재회를 방해했다는 것을 깨달은 러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저는 신관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는 너무 당황했는지 뒤를 도는 것도 잊고 뒷걸음질을 쳐서 자리를 떠났다. 그 바보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문트와 로제타는 동시에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자식은 분위기 초 치는 데 재능이 있어.”
“하하, 그러게요. 그래도 은근 귀엽기도 한 것 같아요.”
“……저런 게 귀엽나?”
“뭐, 어떨 때는요.”
아르문트가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러크가 사라진 자리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같잖은 질투심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고작 몇 분 전이건만, 타고난 본성은 차마 버리지 못하는 그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테오도르 신관과 리처드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로제타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몹시 기뻐했는데, 특히 리처드는 남몰래 눈물도 한 방울 흘렸다. 로제타가 위험한 상황에도 제 주군의 안위에만 신경을 쓴 것이 내심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호위기사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