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녀는 어른이 되었다2021.10.10.
시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일요일 점심시간을 지날 때쯤이었다. 늦잠을 청하며 평일에 쌓였던 피로를 풀고 있던 겨울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팔, 팔천만 원?!”
기절초풍하게 놀란 겨울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쳤다. 차 수리 견적이 무려 8,000만 원 상당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어. 정확히 8,925만 원.
냉정하게 들려오는 시후의 목소리에 겨울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했다. 10년 전 받았던 1,000만 원에 이번 8,925만 원까지 도합 약 1억. 졸지에 1억을 갚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일단 만나. 얼굴 보고 얘기해.
“……어디서?”
-문자로 주소 찍어줄 테니 거기로 5시까지 와.
제 용건만 깔끔하게 던진 시후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짜증스럽게 액정을 쏘아보았다.
“하, 싸가지…….”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무려 1억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다. 시후의 갑질에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던 겨울은 막 도착한 문자를 껄끄럽게 확인하였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헤르메스 청담 2001호.]
……헤르메스 청담? 놀란 겨울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문자에 적힌 주소는 아마도 그의 자택으로 보였는데, 이곳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꿈의 아파트였기 때문이었다.
“……이 아파트 50억도 넘지 않나?”
등골이 선득해지는 감각과 동시에 겨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야.”
주눅 들지 말자. 절대 주눅 들지 말자고! 스스로 그렇게 세뇌하며 갔으나, 아파트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겨울의 고개는 자연히 수그러들고 말았다. 억만장자들과 온갖 셀럽들이 한 바가지로 서식하고 있을 것만 같은 아파트는 경비가 매우 삼엄했기 때문이었다.
“몇 호에 가십니까?”
“2001호요.”
“펜트하우스요?”
멈칫한 경비의 눈매가 의심스럽게 길어졌다.
“일단 신분증 먼저 주시겠어요?”
무전기로 누군가와 짧게 대화한 경비는 곧 사람 좋게 웃으며 겨울을 안으로 안내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호텔처럼 꾸며놓은 로비가 보였는데, 그곳에는 화려한 분수대가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장식되어 있었다. 그보다 더욱 안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는 금색으로 휘황찬란하게 테두리 지어 있었으며, 카드키를 찍고 정해진 층으로만 이동할 수 있었다. ……설마 이런 호화스러운 집에 혼자 사는 건가? 느껴지는 박탈감에 입술을 꽉 깨물자 엘리베이터는 시후가 기다리고 있을 최상층 펜트하우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강시후 그 남자는, 항상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살아왔던 것일까.
“바닥에 뭐 떨어졌어?”
그래, 틀림없다.
“목 부러진 거 아니면 고개 좀 들지.”
그러니 겨울의 자존심도 이토록 가차 없이 짓밟는 것일 터였다. 말투 하나하나 어쩜 저렇게 재수가 없는지, 이를 바득 간 겨울은 내리깔았던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가 흠칫 놀랐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온몸에 물기가 촉촉하게 서려 있는 그는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탄탄한 가슴근육과 선명하게 쪼개진 복근을 차례로 훑은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당황한 겨울이 다시 고개를 내리고 주춤 뒷걸음질 치자 시후가 귀찮다는 듯 머리를 털며 미간을 좁혔다.
“들어와. 거기 서 있지 말고.”
시후의 말에 길고 긴 대리석 현관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경계하는 눈을 했다. 픽 웃음을 터뜨린 그가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집에 아무도 없어. 혼자 사니까.”
“……그러니까 문제인 거예요.”
“그게 왜 문제인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묻는 모습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어떻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를 막 불러요?”
“찾아온 건 너잖아.”
“그쪽이 불렀잖아요. 옷은 왜 벗고 있는지…….”
겨울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시후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해?”
“…….”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놀리듯이 웃는 입꼬리를 보며 미간을 좁힌 겨울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현관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창밖으로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전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 1세대뿐인 슈퍼 펜트하우스답게 구조는 복층으로 되어 있었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무채색의 인테리어는 감각적이었다. 복도는 달리기해도 될 만큼 길었고, 방은 무려 다섯 개나 있었으며, 거실은 공놀이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광활했다. 얼마나 깔끔하게 관리를 했는지 모델하우스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생활감이 없는 집 안은 절로 입을 벌어지게 했다. 젊은 남자 혼자 살기에는 과도하게 넓고 좋은 집. 저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고 집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셔츠를 대충 걸쳐 입은 시후가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커피 안 마셔요. 할 말만 하고 갈 거니까.”
딱 잘라 말하자 눈을 가늘게 뜬 시후가 헛숨을 터뜨렸다.
“내가 마실 건데.”
“……네?”
“착각도 정도껏 하지.”
……참자. 참아. 일부러 약 올리려는 의도가 다분했기에 주먹을 꽉 쥐고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앉아.”
오만하게 높은 콧대가 비스듬히 움직이며 거실 한쪽에 놓인 소파를 향해 턱짓했다. 가만히 서 있던 겨울이 느릿하게 다가가 푹신한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내리자, 시후가 건너편에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았다. 화가 날만큼 인정하기 싫지만, 저렇게 아무렇게나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조차도 한 편의 화보 같은 남자였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더 섬세하고 날렵해진 얼굴선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여자를 홀렸는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물론 겨울에게 강시후란 그저 귀신 같은 남자,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원수일 뿐이었다.
“무슨 생각해?”
시후가 문득 물어왔다.
“다른 남자 생각이라도 하나.”
농담인지 뭔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에 겨울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자꾸 저렇게 의문스러운 말을 던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작게 숨을 고르자 탁,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공허해진 공간을 고요히 울렸다. 비장하게 얼굴을 굳힌 겨울은 핸드백 안에서 준비해온 서류 봉투를 꺼내 탁자에 펼쳐보았다.
“이게 뭐야?”
“일단 읽어 보세요.”
내밀어진 봉투를 열어 그 안의 서류를 꺼내 본 시후의 미간이 소리 없이 모여들었다. 까만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조항들이 모조리 맘에 들지 않는 탓이었다.
“1년에 2,500만 원씩, 4년에 걸쳐서 갚겠다고?”
“네. 매달 208만 원에 이자 10퍼센트에 해당하는 20만 원까지 포함해서 228만 원씩 4년에 걸쳐서 갚을게요.”
하, 시후가 헛숨을 터뜨렸다.
“넌 내 얼굴을 4년이나 보고 싶은가 봐?”
“……지금 당장은 동생도 저도, 큰돈이 없어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이경이 돈 때문에 휴학하는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겨울은 동생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저 자신이 전부 떠맡기로 했다.
“4년만 양해 부탁드릴게요.”
염치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겨울의 사정상 한 달에 228만 원씩 4년간 갚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최적의 대안이었다.
“그래도 4년에 10퍼센트 이자면 대략 천만 원인데,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난 4년이나 질질 끌고 싶은 생각 없어.”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겨울이 작게 한숨 지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도 당장 갚고 싶지만 사정이…….”
“일단 그 존댓말부터 집어치워.”
싸늘한 말에 겨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사용한 존댓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돈 떼먹고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10년 전 그 돈 얘기라면.”
울컥한 겨울이 가까스로 감정을 누르며 목소리를 내었다.
“난 분명히 돌려주려고 갔어. 받지 않은 건 강시후 당신이고.”
“나는.”
시후가 씹듯이 뱉었다.
“네가 내 앞에서 사라져도 된다고 한 적이 없어.”
왠지 화가 난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최대한 차분히 감정을 다스린 겨울이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존댓말 그만두라고.”
“……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원하는 게 뭔지.”
원하는 대로 말끝을 잘라먹은 겨울이 독하게 쏘아붙이자 시후의 눈매가 진해졌다.
“10년 전, 네가 내 뺨 때리고 도망갔던 날 기억해?”
그 가느다란 눈에 베일 것만 같아 차마 대답할 수 없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10년 전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러웠던 그날 일을.
“사과해.”
“…….”
“네가 어떻게 사과하는지에 따라, 변제해야 할 금액을 조율해보도록 하지.”
툭 벌어진 겨울의 입술 사이로 묵직한 숨이 흘렀다.
“하는 거 봐서 뭐, 절반 정도로 탕감해줄 수도 있고.”
그 말에 잇새를 꽉 깨문 겨울이 주먹을 힘껏 쥐었다. 단돈 몇만 원에도 벌벌 떠는 제 처지와 반해 이 남자에게는 5,000만 원에 가까운 큰돈도 그저 없어도 되는 수준의 우스운 돈이라는 사실에 모멸감이 밀려 들어왔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비참한 감정과 함께 겨울의 머릿속에는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꼴같잖은 자존심 세우는 게 특기인가?’
겨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11년 전 시후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매연처럼 피어올랐다.
‘주제 파악 좀 하지. 너나 네 가족이나, 자기 주제를 모르니까 그따위로 사는 거야. 알아?’
순간적으로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함겨울, 너.’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학교 그만둔다고 소문 쫙 났던데. 네 처지에 그만둬서 뭐 어떡할 건데?’
겨울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돈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진짜 소문처럼 술집에서 일하기라도 할 건가.’
싸늘한 조소가 입술 끝에 걸렸다. 밀려오는 치욕감에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겨울이 몸을 떨었다.
‘아니면 뭐, 내가 네 스폰서라도 해줘?’
그 말에 겨우 붙잡고 있던 겨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었다. 짜악! 무작정 손을 뻗은 겨울이 시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자존심과 함께 겨울의 여린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미친 새끼…….’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싶지 않은데, 수치스럽게도 눈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강시후 넌…… 진짜 최악이야.’
크게 찢어진 상처를 다시 한번 후벼 파이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받은 겨울은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듯 뛰었다. 정확히 10년 전, 인생 최악의 기억을 떠올린 겨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잊고 싶었던 상처가 다시금 흉측하게 벌어지며 덧나기 시작했다. 10년 전 그날부로 시후는 겨울에게 있어서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존재가 되었다.
“…….”
찰나의 순간, 겨울의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정답은 하나였다. 이건 애초에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자존심은 밥 먹여주지 않는다. 겨울은 더 이상 10년 전 열여덟의 세상 물정 모르던 소녀가 아니었다. 스물여덟의 닳고 닳은, 아주 비겁하고 비굴하게 자란 어른이었다. 지금 당장 겨울에게 중요한 것은 알량한 자존심이 아닌 1억의 채무였다.
“10년 전 뺨 때린 일, 돈 들고 사라진 일도 전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무너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