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느 날 남편이 생겼다2021.10.13.
“죄송합니다. 10년 전 뺨 때린 일, 돈 들고 사라진 일도 전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무너지고 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제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겨우 숨을 고른 겨울은 대리석 바닥을 노려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른 그가 뭐라도 말하길 기다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고요뿐이었다.
“…….”
시후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겨울을 빤히 쳐다보자 두 사람 사이에 길고 긴 정적이 흘렀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말없이 커피잔을 비운 시후는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내가 알던 함겨울은 어디 갔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겨울의 고막을 찔러 왔다.
“시시해졌네, 재미없게.”
그 말에 속에서 불길이 이는 듯했다.
“나가. 약속대로 수리비는 절반으로 떼줄 테니까.”
뾰루지처럼 아프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존심마저도 헌신짝처럼 찢긴 겨울은 눈물을 삼키며 뒤를 돌았다. 뚜벅뚜벅 현관으로 걸어가는 내내 입안에 쓴물이 올라왔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핸드백 체인이 생명줄인 양 움켜쥔 겨울은 화가 주체 되지 않아 억지로 숨을 골랐다.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우뚝 멈춰선 겨울은 결국 폭발했다.
“……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울컥 감정이 터진 겨울은 그대로 다시 뒤를 돌아 거실에 서 있는 시후에게로 무작정 달려들었다. 그대로 들고 있던 가방을 그의 가슴에 퍽 던져버렸다.
“나쁜 새끼!”
가슴 속으로 솟구치는 감정이 증오인지 서러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만 더 해봐!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
이성을 잃은 겨울은 고성을 내지르며 퍽, 퍽, 하얀 손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후려쳤다. 여린 손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엉망이 된 손으로 한 번 더 그를 후려치려는 찰나였다.
“아!!!”
순간 무자비하게 힘이 실린 손이 겨울의 손목을 꽉 움켜잡고 벽으로 거세게 몰아세웠다. 겨울의 등이 으스러지듯이 거실 벽에 쾅, 부딪혔다.
“놔! 이거 놓으라고!”
겨울은 비명처럼 소리치며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휘갈기기 위해 뻗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쪽 손마저 휘어 잡혀 벽으로 꾹 눌려 제압당하고 말았다. 온몸이 세게 진동할 정도로 강렬한 힘이 겨울을 짓누를 듯이 꽉 압박했다. 그는 겨울의 머리를 한 손으로 거칠게 휘어잡고 그녀를 뚫어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계속 생각나더라고, 네가.”
씹듯이 뱉어진 말이 겨울의 목을 꽉 조여왔다.
“단 한 순간도, 내 머릿속에서 잊힌 적이 없어.”
어둑하게 쏟아진 음성이 겨울의 가슴에 생채기처럼 아린 자국을 새겼다.
“넌 항상 날 미치게 만드는데…….”
짙은 눈매가 겨울을 탐닉하듯 사선으로 내려오며 더듬었다. 잡힌 손목으로부터 찌릿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말해 봐, 함겨울.”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은 아랫배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너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과열된 숨결이 겨울의 심장을 무례하게 덮쳐왔다. 숨이 멎을 것 같아 겨울이 입술을 벌리고 가파르게 호흡했다. 파도가 휩쓸고 난 자리처럼 겨울의 가슴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었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끈적하게 달라붙은 입안 때문에 그 어떠한 말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겨우 입술을 벌린 겨울은 힘겹게 한마디를 던졌다.
“……까불지 마.”
겨울은 시후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안 돼.”
독하게 쏘아붙이자 시후가 겨울의 턱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 손길에 뻐근해진 볼이 얼얼해 겨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파였다. 날렵한 고개가 비스듬히 틀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모조리 삼켜버릴 것처럼 덮쳐온 시후의 입술이 정확히 겨울의 입술 앞에서 멈추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질척해진 혀를 느리게 굴리며 발음했다. 언뜻 스친 입술에 겨울의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천천히 뻗어진 손이 겨울의 뺨을 쓸어내렸다. 어루만지는 듯한 감촉에 겨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검은 눈은 겨울을 꿰뚫을 듯했다.
“믿을래?”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금은 악몽이 되어버린 11년 전 첫키스 때, 시후가 제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17살의 기억이 회색빛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동시에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왈칵 터지고 말았다.
“하…….”
후드득, 눈물이 뜨겁게 차올랐다. 케케묵은 상처와 아픔들이 뒤죽박죽으로 올라오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참아왔던 감정이 삽시간에 폭발하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어?”
대답 없이 울고 있는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는 마치 담배 연기를 내뿜듯이 묵직한 숨을 토해냈다. 눈물이 끊임없이 뚝, 뚝 떨어지자 겨울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겨울아.”
마치 11년 전처럼 다정하게 불러오는 목소리에 겨울의 가슴은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뻗어진 커다란 손이 무더운 열기가 맺힌 겨울의 눈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투명한 이슬방울이 시후의 엄지를 촉촉하게 적시며 사라졌다. 탁, 그런 그의 손을 뿌리친 겨울은 차갑게 뒤돌아섰다. 재빨리 손으로 눈물을 거둬낸 겨울은 도망치듯이 현관을 빠져나왔다. 쫓기듯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겨울은 떨리는 숨을 뱉으며 벽에 기대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아 금색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11년 전 열아홉 살의 소년의 목소리와 조금 전 서른 살의 강시후가 속삭였던 말이 겹쳐지며 혼란스러움이 가중되었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아…….”
작게 한숨 지은 겨울은 떨리는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 겨울이 떠나고, 홀로 남은 시후는 한참 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눈물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울릴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저…….
“하…….”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꺾었다 내린 시후의 시야에 까만색 휴대전화가 문득 들어왔다.
“저건…….”
겨울의 휴대전화였다. 가방은 물론 모든 짐을 전부 두고 그냥 떠나버린 것이었다.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시후는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편 아파트 로비를 막 빠져나온 겨울은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라앉는 기분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서둘러 집으로 향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함겨울!”
4차선 도로의 횡단 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우뚝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시후가 저 멀리 건너편에서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아…….”
그의 손에는 겨울의 가방과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어?”
그 순간, 거대한 트럭이 엄청난 속도로 맹렬하게 시후에게 돌진해왔다. 놀란 겨울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안 돼……!”
기겁한 겨울이 소리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끼이이이익! 타이어가 심하게 구르는 소리의 잔상이 고막을 울렸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
“윽…….”
온몸이 부서질 듯이 욱신거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절로 신음이 흘렀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에 들어차는 것은 눈처럼 새하얀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겨울은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고치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겨울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 겨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일으켰다. 몽롱해진 정신으로 오른쪽을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눈물을 가득 띄우고는 달려들었다.
“엄마, 엄마! 누나가 눈을 떴어!”
이경은 호들갑을 떨며 겨울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어머머, 세상에 하느님……. 이경아! 얼른 의사 불러와, 얼른! 어서!”
혜숙이 이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소리치자 그가 튀어 나가듯이 병실을 박차고 일어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겨울은 눈을 뜨자마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소란에 상황 파악을 하기가 어려웠다.
‘왜 내가 병원에 누워 있는 거야?’
분명히 마지막 기억은 차에 치이기 직전의 강시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내가 여기에…….’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그저 미간만 좁힐 뿐이었다.
‘뭐지? 꿈인가?’
밀려오는 당혹감과 함께 뺨을 꼬집어 봤으나 느껴지는 감각은 너무도 선명했다.
‘꿈은 아닌데…… 그렇다면 설마…….’
강시후가 차에 치이는 걸 보고 충격받아서 기절을……? 그렇게 생각이 닿자마자 심장이 아랫배로 쿵 내려앉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경황없이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혜숙은 그런 겨울을 와락 끌어안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세상에……. 의사 선생님이 별다른 외상은 없다고 했는데, 네가 의식을 못 찾아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무슨 말이지?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우는 엄마를 안아주기 위해 겨울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정황으로 보아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없었다.
“우리 딸,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자. 퇴원하고 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줄게.”
……어? 순간적으로 겨울은 혜숙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전체적으로 묘한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보던 겨울은 문득 제 머리의 길이를 보고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히 머리가 어깨선을 조금 넘는 길이였는데 지금은 등의 절반을 덮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대략 손바닥 한 뼘 정도의 길이가 길어진 것이다.
“……이게 무슨…….”
놀란 겨울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각인 되는 것은 새하얀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의 숫자였다. <2022년 10월>
“……뭐야?”
온몸의 피가 일순 달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히 강시후네 집으로 찾아갔던 오늘은, 2021년 10월 17일이었다.
“엄마…….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이야?”
“응? 오늘 10월 14일이지.”
“아니, 몇 년도냐고.”
“당연히 2022년이지…….”
“2, 2022년?!”
“당연하지. 갑자기 그건 왜 묻니?”
……2021년이 아니라 2022년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덜컥 공포심이 몰려왔다. 쿵쿵쿵, 겨울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대체 뭐냐고……!
“참! 얼른 강 서방한테 연락해줘야겠다. 겨울이 너 일어난 거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혜숙이 해맑게 웃으며 옆에 치워둔 핸드폰을 빠르게 주워들었다.
“강 서방? 그게 누구야?”
“얘가 잠이 덜 깼나. 누구기는? 네 남편이지!”
“뭐래. 내가 무슨 남편이 있…….”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거칠게 확 열렸다. 흠칫 놀란 겨울의 시선이 자연히 문으로 흘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뛰어왔는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의 시후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시후를 보며 너무 놀란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가, 강시후?”
당황한 겨울이 휘둥그레 뜨여진 눈으로 멍청하게 시후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온 시후가 돌연 겨울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온몸을 확 감싸는 남자의 체온에 흠칫 놀란 겨울이 훅 숨을 멈추었다.
“여보.”
뻗어진 손이 겨울의 어깨를 강하게 품어 안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겨울의 코끝에서 어른거렸다. ……여보? 여어보오? 허. 허어. 허. 황당한 상황에 어이가 없어 말이 채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미친 건가?!’
이 인간. 여보라고 했어, 지금? 경악해서 파르르 떨고 있는 겨울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여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