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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흐린 기억 속의 악몽 (6/112)

6. 흐린 기억 속의 악몽2021.10.20.

퇴원 절차를 밟은 겨울은 보호자인 시후와 함께 나란히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겨울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16550872835576.jpg“막힐 것 같으니까, 한숨 자고 있어.”

조수석에 시체처럼 넋 놓고 앉은 겨울을 보며 시후가 말했다. 그녀를 배려하여 느리게 구르는 바퀴의 목적지는 기억에도 없는 둘만의 ‘신혼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울은 다른 생각에 잠겨 지금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다.

16550872835576.jpg‘사랑해.’

멍하니 앉아 있는 겨울의 귓가에서 전날 시후가 했던 고백이 맴돌며 흩뿌려졌다.

16550872835576.jpg‘사랑해, 겨울아.’

살면서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다른 남자도 아닌 강시후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다니. 이건 미쳤어…….

16550872835576.jpg“무슨 생각해?”

……아, 묘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린 겨울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16550872835644.jpg“……아니, 아무것도.”

……대체, 날, 왜, 사랑을. 얼이 나간 겨울은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사랑할 리가 없었다. 아니, 사랑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지독한 악연이었으니까. 그는 내게 그토록 매정하고 차가웠던 남자였으니까. 겨울의 머릿속에 싸늘한 얼굴과 깔보는 듯한 눈빛이 잔상처럼 그려졌다. 심장이 섬뜩할 만큼 끔찍한 기억이었다.

16550872835644.jpg“…….”

자그마하게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쌀쌀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차가운 밤공기를 맞자 겨울의 머릿속에는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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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년 전. 소나기가 내렸던 날의 첫키스 이후에도 겨울과 시후의 사이는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16550872835576.jpg‘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그 말에 겨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과 같이 친한 오빠와 동생 사이로 지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꽤 심상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얼마 가지 않아 겨울의 인생을 온통 뒤바꾸어 놓았던 그 사건이 발생했다.

16550872835661.jpg“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겨울의 아버지인 함병식 회장이 운영하는 제이지코스메틱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16550872835661.jpg“왜? 무슨 일인데?”

16550872835661.jpg“공장에서 연락이 왔는데 남원화학 측에서 일방적으로 원료 공급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화장품의 원료를 공급하던 납품업체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고 잠적을 한 것이었다. 당장 공장에서 보유한 원료로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었고, 급하게 다른 거래처를 물색했으나 전부 터무니없는 납품가를 주장하며 사실상의 거절 의사를 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라인에서는 제이지코스메틱의 화장품에 중금속류가 발견됐다는 뜬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그 말도 안 되는 루머를 부풀리며 줄줄이 기사화하기 바빴다. 결국 거액에 부채가 생기고 궁지에 몰린 제이지코스메틱은 부도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6550872864574.jpg“흑, 흐윽……. 우리 어떡해, 여보…….”

그 당시 겨울이 가장 많이 본 것은 오열하는 엄마와,

16550872835661.jpg“제발 한 번만 사정 봐주세요. 이번만 도와주시면 절대 은혜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군가에게 전화로 비굴하게 사정사정하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고, 한때는 뷰티 업계 1, 2위를 다투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화장품 기업으로 이름을 날렸던 제이지코스메틱은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시후의 아버지인 KU그룹 강성호 회장은 겨울의 아버지에게 인수합병을 제안했다. 이대로는 직원들마저도 전부 월급을 받지 못한 채 실직할 터였고, 제이지코스메틱과 연계된 회사들까지도 줄도산할 게 틀림없었다. 결국 함 회장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강 회장의 합병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KU헬시뷰티에 제이지코스메틱이 합병되고, 겨울의 아버지인 함 회장은 경영권을 뺏긴 채 친구였던 강 회장의 밑으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라이벌이자 오랜 친구였던 두 사람의 사이에는 전과 다른 위계질서가 생겼고, 그것은 그들의 자녀인 겨울과 시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한때는 세트처럼 붙어 다녔던 시후와 겨울은 자연히 멀어져, 서로 학교에서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른 어느 날. KU헬시뷰티에서 전무 이사로 일하고 있던 겨울의 아버지는 돌연 납품업체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16550872835661.jpg“아니야, 이건 음해야! 난 결백하다고! 제발 믿어줘!”

억울했던 겨울의 아버지는 강 회장에게 무혐의를 주장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 회사에서 무일푼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16550872864574.jpg“……우리 이제 어떡해, 여보? 겨울이는 고등학생에 이경이는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 못 했는데…….”

혜숙은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으며, 겨울의 아버지 병식은 억울함에 잠도 자지 못하고 술만 미친 듯이 들이켤 뿐이었다. 가족처럼 친했던 두 집안의 사이는 한순간에 원수가 되었으며, 겨울과 시후의 사이도 돌이킬 수 없게 악화하였다. 그렇게 약 한 달이 흐르고…….

16550872864574.jpg“흑, 흐윽……. 여보, 여보……!!!”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고 했던가. 절망 끝에 행복이 아닌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그해 겨울, 부과된 거액의 추징금을 갚지 못해 옥살이하던 병식이 깊어진 지병으로 인해 옥중 사망하고 말았다.

16550872864574.jpg“아이고, 아이고……! 우리 애들은 어떡하라고…….”

겨울은 아직도 오래전 아버지의 장례식을 잊지 못한다. 생전에는 아부하느라 바빴던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발걸음하지 않았던 그 초라한 장례식을. 너무도 형편없던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혜숙은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오열하며 허망하게 병식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고, 초등학생이었던 이경은 겨울의 품에 안긴 채 그저 엉엉 눈물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 겨울은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마지막까지 억울하다고 외쳤던 아버지의 모습과 학교에서 저를 보고도 모른 체하고 무시했던 강시후의 모습, 두 가지뿐이었다. 겨울은 확신했다. 강 회장이 아버지를 회사에서 내쫓기 위해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우리 아버지는 결코 부정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꿋꿋하게 믿고 독하게 생활하던 겨울을 바닥까지 무너뜨린 것은 어느 한 소문이었다.

16550872835661.jpg“야, 함겨울 집안 망하고 술집에서 일한다며?”

진짜 지옥은 이제 시작이었다. 제이지코스메틱의 장녀로 금탯줄을 잡고 태어난 겨울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싹싹해 원래 모든 학생의 선망 대상이었다.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으며 사교성도 좋아 학교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엄친딸로 통했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시기하는 학생도 많았고, 겨울을 깎아내리려고 호시탐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무리 또한 존재했다. 그런 족속들에게 겨울의 집안이 몰락했다는 소식은 그녀를 바닥까지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16550872835661.jpg“나도 들었어! 그리고 성국재단 이사장한테 꼬리치고 스폰 받는다던데?”

16550872835661.jpg“우웩. 진짜 토 나온다.”

16550872835661.jpg“그런 애가 어떻게 우리 학교에 뻔뻔하게 얼굴 들고 다니는지 몰라.”

불씨는 평소 겨울을 시기하던 학급 친구 하나가 퍼뜨린 터무니 없는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루머는 빠르게 기정사실처럼 퍼져 흘렀고, 한때는 자매처럼 친했던 친구들조차 한순간에 등을 돌렸다.

16550872835661.jpg“야, 저기 함겨울 지나간다.”

16550872835661.jpg“으, 거지 냄새 여기까지 나.”

하루아침에 전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겨울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저마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16550872835644.jpg“냄새? 무슨 냄새?”

그리고 겨울은 결코 참고만 있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16550872835644.jpg“쉰내라면 네 인중에서 나는 거 아니고?”

16550872835661.jpg“뭐, 뭐야?”

16550872835644.jpg“알지도 못하면서 좋다고 떠들어대니까 입에서 냄새가 나는 거 아니야.”

16550872835661.jpg“이런 미친년이……!”

16550872835644.jpg“할 줄 아는 게 욕밖에 없으면,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지?”

하루는 학교 도서관 앞에서 시비가 걸렸고, 겨울은 조금도 물러남 없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16550872835661.jpg“하! 너 대체 뭐 믿고 나대냐? 집도 쫄딱 망한 주제에.”

16550872835661.jpg“야, 야. 그냥 가자. 이런 년이랑 시비 붙었다가 거지 냄새 옮으면 어떡해.”

16550872835661.jpg“으, 그래. 가자.”

퍽.

16550872835644.jpg“아…….”

느껴지는 충격에 미간을 찌푸린 겨울이 제 어깨를 부여잡았다. 시비를 걸었던 여학생이 겨울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16550872835644.jpg“하, 씨…….”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책을 전부 떨어뜨리고 말았다. 복도에 엎질러진 몇 권의 책과 공책을 바라보며 겨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무릎을 대고 허리 숙인 겨울이 어질러진 책들을 주우려고 손을 뻗은 찰나였다.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검은색 신발의 앞코가 책의 끄트머리를 지그시 눌러 밟았다. 움찔한 겨울이 우뚝 손을 멈추었다. 뻐근하게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본 겨울의 눈동자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16550872835576.jpg“…….”

강시후였다. 제 책을 밟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그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16550872835576.jpg“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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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디를 뱉은 시후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책을 발로 툭 걷어차고 겨울을 지나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차가운 뒷모습을 보는 겨울의 가슴은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고 말았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간 겨울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밤이 새도록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망했을 때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믿었던 친구들이 등을 돌린 때에도……. 그 누가 뭐라고 하던 한 번도 터진 적 없었던 눈물샘이었는데, 강시후의 그 냉정한 태도가 기폭제가 되어 한꺼번에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16550872835644.jpg“흑…… 흐윽…….”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엄마는 전혀 알지 못했으며 초등학생 동생은 세상 모르게 잠만 잘 뿐이었다.

16550872835644.jpg“강시후, 나쁜 새끼……. 진짜 싫어.”

이토록 치욕스럽고 괴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다른 모두가 제게 등을 돌려도 강시후만큼은 제 편일 거라 내심 믿었던 모양이다.

16550872835576.jpg‘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역시 거짓말이었어. 다 거짓말이었다고! 다시금 떠오른 시후의 그 한마디가 다른 의미로 다가와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팠다.

16550872835644.jpg“……흐윽……흑.”

이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영원히 깊은 잠에 빠지고만 싶었다.

16550872835644.jpg“죽고 싶어…….”

하지만 그럴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 밉고 싫었다. ……너무도 외로웠던 17살의 추웠던 겨울.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흐느끼던 겨울은 그대로 쪼그린 채 잠이 들었다. 어느 온기 하나 느낄 수 없어서, 스스로의 체온을 느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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