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 침대에서 자야지, 부부인데2021.10.24.
악몽 같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겨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게 식으며 정리되었다. ……그렇다. 강시후는 내게 그런 남자였다. 우리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아,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했던 인간의 아들. 날 죽고 싶을 만큼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던 악마. 삶의 최대의 치욕과 설움을 느끼게 했던 남자……. 울컥 과거의 감정이 단번에 치고 올라오자 겨울은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래, 역시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내가 원수와 결혼했을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강시후의 집안과 우리 집안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끔찍한 악연인데, 양가 집안에서 이 결혼을 허락했다는 것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이 결혼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집에 도착했는데.”
……아, 하도 생각에 잠겨 있었던 탓에 이곳이 어디인지도 잠시 잊어버린 듯하다. 적막을 뚫는 시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겨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묘하게 느껴지는 기류에 어깨를 움츠렸다. 단정한 미간 사이로 실금이 그어졌다.
“여기가 어디…….”
“우리 집이잖아.”
놀란 겨울의 입이 떡 벌어졌다. 혼란스러운 듯 초점 없는 눈꺼풀이 느리게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당연히 혜숙과 이경이 사는 집으로 데려다줄 줄 알았으나 그건 겨울의 오산이었다.
“여기가 왜 우리 집이에요!”
“웬 존댓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결혼했잖아. 여기서 신혼생활 시작하기로 했는데.”
덤덤한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전신이 얼어붙었다. ……나와 강시후의, 신혼생활……. 뭉게뭉게 이상야릇한 상상이 피어오르고, 저도 모르게 뺨에 열감이 번졌다. 순식간에 토마토가 된 작은 얼굴을 바라보던 시후가 픽 숨소리 같은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낮게 터진 웃음소리에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떨리는 시선을 보던 시후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
“…….”
“강요하는 부분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잡으라는 듯 나직하게 뻗어진 손을 바라보다가 느슨하게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저를 주시하는 눈동자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자, 피곤할 텐데.”
겨울은 시후의 다정한 목소리와 행동이 더없이 꺼림칙하고 불편했다. 그녀가 아는 강시후는 절대 이런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정이야 어찌 됐건 결국 강시후와 결혼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고, 부부 사이에서 한 지붕 아래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 맞았다.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는 일단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기로 한 겨울은 시후를 쫓아 집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신혼집은 겨울의 기억 속에도 있는 곳으로, 원래 시후가 혼자 살던 헤르메스 청담의 펜트하우스였다. 결혼 후 따로 집을 구하지 않고 겨울만 이곳에 들어와 함께 살았다고 시후는 덧붙였다.
‘……내가 여기서 강시후와 둘이 살았다고?’
시후의 집에 갔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기에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시후와 단둘이 먹고 자고 생활했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여기가 우리가 같이 쓰는 방이야.”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방으로 안내한 시후가 가볍게 손짓했다. 강렬한 크림슨 톤의 벽지가 한 면을 두르고 있었고, 침실의 한 가운데에는 슈퍼킹사이즈의 거대한 침대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설마 저 침대에서 함께 잤었던 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겨울은 어깨를 파드득 움츠렸다.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은 아주머니가 해놓고 가셨어, 같이 먹자.”
시후가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 손짓하자, 불편하게 서 있던 겨울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적막한 가운데 어색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산해진미가 고루 차려진 휘황찬란한 식탁이었으나 겨울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꾸역꾸역 수저를 움직일 뿐이었다. 접시에 코를 박을 정도로 줄기차게 아래만 바라보며 식사하던 겨울이 흘끔 눈을 들어 시후를 보았다. 12년 전과 똑같이, 그는 최소한의 깔끔한 동작으로 조용하게 식사하는 타입이었다.
“훔쳐보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
시선이 느껴졌는지 시후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궁금한 거라. 너무 많아서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던 겨울은 일단 가장 알고 싶었던 것들부터 묻기로 하였다.
“……1년 전, 내가 그쪽한테 진 1억의 채무는 어떻게 된 거죠?”
“부부 사이에 채무가 어디에 있어. 우리가 연애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계산은 없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겨울은 애꿎은 입만 벙긋거렸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니면 따져야 하는지……. 작게 한숨 쉰 겨울은 다음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우리가 정확히 언제부터 사귀고, 언제 결혼했죠?”
잠시 물로 목을 축인 시후가 조금의 텀을 두고 답했다.
“……작년 11월부터 사귀었고, 3월에 결혼했어. 이제 결혼한 지 7개월 됐고.”
“왜 그렇게 급하게 결혼한 거예요?”
“서로 많이 좋아했으니까.”
“아니……. 그쪽 부모님이 반대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결혼한 거죠?”
12년 전 그 사건 이후, 시후와 겨울의 집안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이에서 반대도 없이 수월하게 결혼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우리 집안과 그쪽 집안, 굉장히 껄끄러운 사이잖아요.”
“맞아. 네 말대로 반대는 하셨지만 내가 그냥 밀어붙였어. 어차피 난 그룹 경영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집안에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거든.”
“그렇게 쉽게 놔주던가요?”
“승계에 미친 동생이 있으니까 굳이 나한테 집착할 필요가 없어.”
시후의 이복동생인 창영은 시후와 달리 KU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사활을 건 인물이었다.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KU헬시뷰티의 전략기획본부장으로 자리하고 있는 창영은 시후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을 거란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시후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 그쪽 집안은 여전히 날 싫어한다는 얘기네요?”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교통사고로 1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는데도 시댁에서는 아직 병문안은커녕 안부 전화 한번 없었다.
“왜, 서운해?”
“……네?”
겨울이 인상을 찌푸렸다. 12년 전 아버지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에 원인제공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족속들이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할 리 없었다.
“서운해하지 마.”
시후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딪혀오는 시선에 주춤한 겨울이 잔을 들어 입가를 적셨다.
“내가 그만큼 더…….”
날카로운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사랑해주면 되잖아.”
푸웁. 놀란 겨울이 그대로 물을 뿜어버렸다. 때아닌 낯간지러운 말에 사레가 들린 겨울은 제 목을 잡고 캑캑거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상황인가 싶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시후가 티슈를 뽑아 들고 다가왔다. 훅 접근한 남자의 손과 함께 입술로 문질러지는 감촉에 놀란 겨울의 눈이 커졌다. 꼼꼼하게 겨울의 입술을 닦아준 시후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괜찮아, 여보?”
겨울의 동공에는 또다시 균열이 일었다. ……저놈의 여보 타령, 웬 놈의 사랑 타령……. 강시후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지자 당혹감만 썰물처럼 밀려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남자.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어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껄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됐다. 시후의 집은 강남에서 최고가를 자랑하는 아파트의 슈퍼 펜트하우스였고, 1층과 2층을 합하면 무려 방이 7개나 되었다. 그중 손님이 사용하는 침실 정도는 있을 거로 생각한 겨울은 주위를 둘러보며 시후에게 물었다.
“나는 어디 방에서 자면 돼요?”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시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까 보여줬잖아?”
……아까? 아까 봤던 방이라면…….
“……안방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놀란 겨울의 이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설마 같이 자자는 소리……!”
“그럼 따로 자려고 했어?”
시후가 설핏 웃으며 성큼 겨울에게 다가왔다. 묘하게 뒤바뀐 분위기와 함께 긴장한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신혼이잖아.”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연한 손 틈 사이를 파고들며 끈적하게 뒤엉키자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한 침대에서 자야지, 부부인데.”
……뭔 소리야!!! 충격적인 선언에 겨울의 머릿속에서는 한바탕 전쟁이 일어났다. 혼란이 온 겨울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시후는 그녀의 하얀 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입술이 살갗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말랑하고 뜨거운 입술의 감촉이 손등으로 느껴지자 놀란 겨울이 숨을 집어삼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더듬더듬 떨리는 입술을 벌려 한마디 뱉었으나, 말끝은 허무하게 뭉개진 채 흐무러지고 말았다. 묵직한 숨과 함께 시후의 입술이 불현듯 밀려온 탓이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와 함께 점점 더 드리우는 남자의 그림자에 놀란 겨울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여린 발뒤꿈치가 바쁘게 바닥을 짚으며 뒤를 향하다가 턱, 하고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등으로 느껴지는 딱딱한 벽의 감촉은 이제 겨울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 그래, 여보?”
그야말로 독에 든 쥐. 가늘게 떨리는 뺨으로 커다란 손이 감기는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마치 피아노라도 연주하듯 살갗 위를 미끄럽게 어루만질 때마다 겨울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부부는 그래도 돼.”
어둑한 남자의 음성이 길게 늘어지며 겨울의 고막을 뜨겁게 데웠다. 단정한 속눈썹이 가녀리게 떨리며 그녀의 눈이 한계까지 확대되었다. 겨울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뒤흔들렸다.
“하, 하지만…….”
경직된 붉은 입술이 다급하게 달싹거렸다.
“난……. 나는…….”
혼란스러움에 겨울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앞으로 웃음소리가 살풋 나직하게 터졌다.
“농담이야.”
청량하게 웃는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커다란 손이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트러뜨렸다.
“이 옆에 게스트룸에서 자면 돼. 내가 미리 준비해놨어.”
이상하게 양 볼이 화끈거려 겨울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뺨을 가리자 시후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잘자, 겨울아.”
나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달구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 시후가 안내해준 게스트룸은 안방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매트리스는 호텔 침대를 연상시킬 만큼 푹신했고 침구는 뽀송뽀송하니 포근했으나, 겨울은 한참 동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하아…….”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고, 과부하로 인해 머리가 혼란스러운 탓이었다.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깊은 한숨이 폐부를 한 바퀴 돌아 입술 사이를 타고 흘렀다. 태산처럼 몰려오는 걱정과 함께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래도록 뒤척이던 겨울은 한참 만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달빛이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녘, 겨울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무울…….”
목이 말라 잠에서 깬 겨울은 비척비척 부엌으로 향했다. 불을 켜고 싶었지만 전등 스위치를 찾지 못해 단념하고, 창밖에 펼쳐진 야경의 불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반쯤 뜬 실눈으로 비틀비틀 방으로 돌아가 도로 침대에 누웠다.
“으음…….”
뭔가 이불의 촉감이 달라진 것 같았지만,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기에 그저 눈을 꼭 감았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한편 시후는 잠결에 무언가 말랑말랑한 것이 제 가슴에 폭 눌려 있는 감촉을 느꼈다. 팔뚝에 느껴지는 무게에 잠에서 깬 시후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시후의 동공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함겨울이었다. 그녀는 시후의 맨가슴에 대고 입술을 작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려 하기도 잠시, 가느다란 팔이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자 놀란 시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어정쩡하게 숨을 삼킨 시후가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