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너라는 계절 (12/112)

12. 너라는 계절2021.11.10.

16550874199976.jpg“이혼해줘…….”

시후는 겨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리를 지키다가 우는 겨울을 뒤로한 채 침실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겨울과 시후는 3일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전처럼 얼굴 마주하고 밥을 먹는 일은 없었고, 방도 당연히 각방을 썼다. 심지어 일이 바빠진 시후가 거의 집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온종일 얼굴 한 번 못 본 날도 있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채로 한주가 흐르고 금요일이 되었다.

16550874199981.jpg“오픈 베타 첫날부터 서버가 터졌다…….”

한편, 시후가 대표로 있는 넥스트게임즈에는 때아닌 비상이 걸렸다.

16550874199981.jpg“이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요?”

새로 출시 예정인 게임 ‘히어로체이스(hero Chase)’의 오픈 베타 서비스를 시행한 지 첫날부터 서버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회의실 한가운데에 앉은 시후가 각 파트의 담당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꼽아보는 가운데, 바짝 경직된 직원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서렸다.

16550874199981.jpg“정식 출시까지 버그 제대로 안 잡히면 다들 사표 쓸 준비 하세요. 자체 테스트 10번이고 100번이고 돌려서 제대로 수정하고.”

16550874199994.jpg“저, 아무래도 정식 출시를 조금 미루는 게…….”

시후의 친구이자 프로그램 파트의 총괄팀장인 신재환이 소심하게 손을 들고 웅얼거렸다. 동시에 서늘하게 쏟아지는 시후의 시선에 재환이 곧바로 태세 전환했다.

16550874199994.jpg“말도 안 되죠. 그렇죠.”

16550874199981.jpg“마케팅 일정 다 잡혀 있는데 출시를 미룹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직원들은 모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16550874199981.jpg“3일 안에 고치세요. 제대로 잡아 오라고.”

16550874199994.jpg“3, 3일은 좀…….”

재환이 말을 더듬자 길게 찢어진 시후의 까만 눈이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곧장 두 손을 맞잡은 재환이 허허, 억지웃음을 지었다.

16550874199994.jpg“충분하죠, 네. 충분합니다. 제가 잠을 못 자서 제정신이 아니네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자신의 뺨을 퍽퍽 때리며 너털웃음 짓는 재환을 무시하고 시후는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0874199981.jpg“딱 3일 내로.”

경고 같은 마지막 멘트와 함께 시후가 성큼성큼 걸어 회의실을 나갔다. 그제야 숨을 돌린 재환이 쯧쯧 혀를 차며 시후가 나간 문에 대고 삿대질했다.

16550874199994.jpg“저, 저, 저, 성깔 더러운 강시 새끼.”

16550874228338.jpg“오늘도 야근이네요.”

서버팀의 직원 중 하나가 한숨을 쉬며 힘없이 책상에 엎어졌다.

16550874199994.jpg“언제는 야근 아니었나? 돈만 아니었으면 친구고 나발이고 당장 그만뒀지, 내가.”

넥스트게임즈는 업무 강도가 센 만큼 업계 최고 수준의 보상으로 유명했는데, 높은 연봉은 물론 영업이익의 10%를 전 직원에게 인센티브로 지급하는 파격적인 방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창립 멤버인 재환은 사내에서 최고연봉을 받고 있었기에 아무리 회사에 불만이 많아도 이직은 생각하지 않았다.

16550874199994.jpg“저놈 저거, 어제도 회사에서 날밤 까더니 오늘도 밤샐 작정이야. 와이프 다쳤다고 회사 안 나올 때는 숨 좀 쉬나 했더니…….”

16550874228338.jpg“대표님은 잠도 없으신가 봐요.”

16550874199994.jpg“잠만 없냐? 재수도 없지.”

16550874228338.jpg“재환 님도 없으시잖아요.”

찌릿 노려보는 눈빛에 직원이 움찔했다.

16550874199994.jpg“그래, 없지. 내 인생 재수 한번 더럽게 없지.”

한숨을 내쉰 재환이 제 미간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16550874199994.jpg“이 일정에 재수 있으면 그게 더 코미디 아냐? 월화수목금금금 이건 대체 무슨 버그야? 어떻게 잡아?”

재환의 말에 직원들이 한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16550874199994.jpg“하여간 강시후, 그 미친…….”

낄낄거리던 직원들의 표정이 일순 싸하게 굳었다. 재환의 뒤로 시후가 다시 등장한 탓이었다. 흠칫한 재환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귀신처럼 서 있는 시후를 보고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74199994.jpg“아니, 그, 대표야. 그게 아니고…….”

16550874199981.jpg“신 팀장.”

16550874199994.jpg“……넵.”

16550874199981.jpg“아침부터 신나게 수다 떠느라 입 아프겠어요, 그렇죠?”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16550874199981.jpg“이제 타사 게임 분석한답시고 거북목으로 롤이나 하고 앉아 있다가, 점심에 배 터지게 식사하시고 낮잠 좀 주무시다가, 발등에 불 떨어져서 오늘도 칼퇴 못한다고 징징거릴 건가?”

16550874199994.jpg“……아니요.”

16550874199981.jpg“아니면 입에 지퍼 잠그고 움직여.”

16550874199994.jpg“옙.”

거수경례한 재환이 직원들을 향해 돌아보며 괜히 으름장을 놓았다.

16550874199994.jpg“자, 여러분. 들었죠? 일합시다, 일! 오늘은 가족들 얼굴 봐야죠!”

그런 재환을 보며 헛숨을 터뜨린 시후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회의실을 나섰다. 대표실로 올라온 시후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근 며칠간 잠을 거의 자지 못해 무거워진 눈꺼풀로 피로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시후의 비서인 홍예나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16550874284113.jpg“대표님, 오늘 이븐(even) 대표와 오찬 약속 있으신데, 그 전에 검토해주셔야 할…….”

시후가 나가라는 듯 손짓하자 주춤한 예나가 곧바로 뒤를 돌았다.

16550874284113.jpg“네, 호출하시면 들어오겠습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예나가 태블릿PC를 시후의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갔다.

16550874199981.jpg“……후.”

액정화면에는 오늘 검토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시후가 가장 시급하게 결재가 필요한 일부터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문득 컴퓨터 옆에 놓인 결혼사진에 시선이 닿았다.

16550874199981.jpg“…….”

작은 액자 안에서 환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겨울과 눈이 마주치자 시후는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겨울은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시후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결혼사진을 찍었던 날이 떠오르자 설핏 웃음이 터진 시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상승했다.

16550874199981.jpg“……함겨울.”

시후의 엄지가 겨울의 사진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가만히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가 일순 뜨거워지며 사진 속 겨울의 얼굴을 쓰다듬듯 움직였다.

16550874199981.jpg“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그녀의 이름을 입을 담을 때마다 그랬다.

16550874284141.jpg

  지그시 눈을 감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기억들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솔직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팠던 기억들. 성숙하지 못했고, 그래서 후회했던 지난날……. 과거에 묶여 사는 건,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 시후가 겨울을 처음 본 건 17년 전, 14살 때였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식사 자리에서 처음으로 겨울을 만났을 때, 시후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함박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흑갈색 머리카락, 커다란 눈에 오목조목한 코와 입술. 살결만큼이나 흰 원피스를 입은 겨울은 꼭 살아 있는 인형 같았다. 어린 나이에 그 모습이 너무도 충격이었는지, 시후는 한참을 넋을 놓고 겨울을 보았다.

16550874199976.jpg“혹시 삼촌 있어?”

그때, 문득 그녀가 작은 입술을 벌려 물어왔다.

16550874199976.jpg“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지…….”

엉뚱한 첫마디였지만 그만큼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다. 겨울과는 죽이 퍽 잘 맞았고 아버지끼리도 친한 친구 사이었기 때문에 친해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함께 농구를 하고 게임도 하고, 수영장도 가고. 반쪽짜리 피가 섞인 이복동생 창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겨울이 훨씬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단순히 여동생에 불과했던 겨울이 여자로 느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녀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을까. 함께 농구를 하다가 뻗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 보일 때, 등까지 오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게 예뻐 보일 때, 교복 치마 아래로 나온 다리가 백옥처럼 하얗게 보일 때……. 문득 그녀는 여자로 다가왔고, 시후의 고요한 심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고등학생이 되자 어느덧 180센티를 넘긴 저와 달리 160센티가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체구는 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으며, 부드러운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겨울의 날씬한 몸은 시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는 온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았고, 햇살처럼 해맑은 미소는 더없이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시후는 점차 겨울에게 스며들어 갔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첫사랑이라는 것을.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고백은 하지 못한 채 3년이 흘렀다. 그날은 겨울과 함께 집 근처 테니스 코트에서 내기 경기를 하는 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소나기가 내려 겨울과 함께 근처 건물로 피신했었다.

16550874199976.jpg“비 엄청 많이 온다. 그렇지?”

16550874199981.jpg“응. 그칠 기미가 없네.”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한바탕 쏟아진 비에 흠뻑 젖은 겨울이 시야에 들어왔다. 추운지 여린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자 시후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겨울의 동그란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자 작은 머리가 콩, 하고 품으로 굴러떨어졌다. 가까워진 거리에 서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아기 분내 같은 향기가 났는데,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 체취가 시후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이끌리듯 손을 뻗은 시후는 겨울의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16550874199981.jpg“머리 다 젖었네. 춥겠다.”

16550874199976.jpg“어? 음……. 아냐, 괜찮아.”

미묘해진 분위기를 겨울도 느꼈는지, 그녀의 뺨에 약간의 분홍빛이 돌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가 온전히 제 가슴에서 여자로 피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너도 내가 남자로 보일 때가 있을까? 너도 지금 내가 설레는 만큼……. 두근거리고 있을까.

16550874199976.jpg“그…… 여름은 이래서 싫다니까. 갑자기 비가 막 오질 않나.”

16550874199981.jpg“그럼 넌 어느 계절이 제일 좋은데?”

16550874199976.jpg“음, 나는 겨울? 눈이 와서 좋아. 크리스마스도 있고, 연말도 있고, 새해도 있고.”

배시시 웃으며 고개 돌린 겨울의 얼굴에 시후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새끼 고양이 같은 커다란 눈망울과 발그레한 뺨, 촉촉하게 젖은 하얀 피부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16550874199981.jpg“겨울…….”

언제부터 너는.

16550874199981.jpg“나도 좋아해, 겨울.”

내 마음에 들어와, 이토록 크기를 키운 걸까.

16550874199981.jpg“난 겨울이 좋아.”

……너라는 계절을 사랑해. 일 년 내내 겨울이어도 웃음만 나올 것 같아. 시후는 가슴속에서 물결쳐 여울지는 뜨거운 마음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껴안고 싶고……. 첫사랑이었다. 충동에 이끌려 천천히 내려간 시후가 겨울의 입술에 느릿하게 입을 맞추었다. 부들부들한 카스텔라 같은 입술 위로 살짝 입술을 누르자 작은 몸이 당황한 듯 움찔 떨었다. 그 자그마한 반응이 귀여워서 더욱 짓궂게 굴어보고 싶어졌다. 느릿하게 입술을 벌린 시후가 겨울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에서는 단물이 배어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튼 시후는 겨울의 뺨을 감싸 올리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따뜻한 숨결이 얽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제 가슴께를 더듬거리다가 꼬옥 셔츠를 쥐는 작은 손이 사랑스러웠다. 하아, 입술 사이로 연약한 숨이 터졌다.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이 못내 아쉬웠다. 탐스럽게 익은 앵두처럼 새빨개진 얼굴이 귀여워, 숨소리 같은 웃음이 흘렀다.

16550874199981.jpg“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열아홉 소년의 서툰 고백이었다. 그녀가 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곁에 친한 오빠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19살의 무더운 여름. 잊지 못할 첫 키스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시후는 알지 못했다. 앞으로 겨울과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1655087433824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