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악역은 내가 할 테니 (13/112)

13. 악역은 내가 할 테니2021.11.14.

1655087440383.jpg“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겨울은 그 고백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과 다름없이 시후를 대할 뿐이었다. 시후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시후의 바람과는 다르게, 불행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겨울의 아버지의 회사, 제이지코스메스틱이 부도 위기에 봉착하면서 모든 것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위기에 처한 제이지코스메틱에 인수합병을 제안했고, 그로 인해 겨울의 아버지는 KU헬시뷰티에서 전무이사로 일하게 되었다. 아버지들 사이에서 생긴 위계는 겨울과 시후의 관계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어느 순간부터, 겨울은 시후의 연락을 잘 받지 않았다. 문자나 전화는 전부 응답이 없었고, 겨울의 반에 찾아가도 항상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1655087440383.jpg“겨울…….”

하루는 학교 복도에서 겨울을 발견하고 그녀를 불렀는데, 그녀는 아는체하지 않고 말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1655087440383.jpg“…….”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은연중에 겨울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제 존재는 더 이상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심장이 빠르게 뛰고 들끓은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화가 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 네가 네 인생에서 나를 지우겠다면, 나도 널 내 인생에서 지우겠어. 뒤틀린 애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을까. 그렇게 수개월이 흘렀다. KU헬시뷰티에서 전무이사로 일하고 있던 겨울의 아버지는 돌연 납품업체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16550874403843.jpg“그런 도둑놈과 친구였다는 사실이 끔찍하기 짝이 없어!”

분개한 아버지는 매일같이 집에서 소리를 지르며, 겨울과 절대 어울리지 말라며 엄포를 두었다. 한때는 친척처럼 친했던 두 집안의 사이는 완전히 원수가 되어버렸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겨울의 아버지가 옥중 사망하게 되면서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런 와중에도 시후는 오로지 겨울을 향한 걱정뿐이었고, 한참의 고민 끝에 휴대전화를 들어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수개월 만에 연락해보는 것이었다. 휴대전화를 쥔 손에는 땀이 맺히고 심장이 바쁘게 뛰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그녀는 말없이 전화번호를 바꾼 모양이었다. ……이제. 나와 연락도 하기 싫다는 건가. 정말 네 인생에서 나를 지워버릴 생각인 거야? 이렇게 영영 멀어질 생각인 거냐고. ……부정을 저지른 건 너희 아버지잖아. 어린 마음에 심기가 뒤틀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다음 날, 무작정 겨울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반으로 찾아갔다.

16550874403895.jpg“함겨울이 안 만난다고 전해달라고 하는데요, 선배님…….”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온종일 걱정하고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고, 은연중에 끓어올랐던 애증이 점차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16550874403843.jpg“강시후 너, 오늘 함겨울 그 계집애 반에 찾아갔다고 하던데.”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시후를 호출한 아버지가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1655087440383.jpg“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퍼억. 늘 손찌검을 달고 사는 시후의 아버지는 뒷말을 듣지도 않고 일단 주먹부터 들어 올렸다.

16550874403843.jpg“내가 그 계집애와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복부를 얻어맞은 시후가 물러서지 않고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가 한 번 더 시후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16550874403843.jpg“인간은 급이 맞는 것들끼리 어울려야 하는 거야.”

1655087440383.jpg“…….”

16550874403843.jpg“그 계집애 아비가 뒷구멍으로 받아 챙긴 돈이 얼마인지 알아?”

헛숨을 터뜨린 아버지가 주먹을 털며 옆에 놓인 골프채를 만지작거렸다. 시후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16550874403843.jpg“감히 내 회사에서 도둑질하려 드니까 그 꼴이 나는 거야.”

서늘한 철의 냉기가 시후의 목덜미 옆을 오싹하게 밀어냈다.

16550874403843.jpg“너도 어디 계속 그 쥐새끼 같은 계집애와 어울려 봐라. 그런 쪼끄만 년, 구실 만들어서 퇴학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기괴하게 웃은 아버지가 시후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16550874403843.jpg“너, 학교에 감시역이 몇이나 있는 줄 알아?”

1655087440383.jpg“…….”

16550874403843.jpg“항상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명백한 협박이었다. 겨울과 이 이상 얽히면 그녀의 인생을 망쳐놓겠다는 협박.

16550874434676.jpg

  이후, 학교에서 겨울을 우연히 만났을 때는 빼빼 마르고 핼쑥한 모습이었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으나 겨울은 곧바로 제 눈을 피했다. 그 행동에 시후는 제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1655087440383.jpg“……하.”

머리가 한 대 맞은 듯 얼얼했고 손발이 차게 식었다. 그녀를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마음을 키우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을 감아도 겨울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녀에 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16550874403895.jpg“야, 함겨울 집안 망하고 술집에서 일한다며?”

문득 이상한 소문이 교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이사장에게 스폰을 받는다는 둥, 유흥업소에서 일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루머가 팽배했다. 그런 헛소문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저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겨울에 대한 마음은 점점 더 뒤틀려져만 갔다. 지탱해주고 싶고, 미움받고 싶지 않고, 의지 되어주고 싶고,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그녀가 점점 더 미워졌다. ……그녀는 내게 의지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스스로가 제어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긋난 마음속에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하루는 겨울이 한 학생에게 어깨를 맞아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었다. 주워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짓밟고 싶은 가학적인 마음도 있었다. 욱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발을 뻗은 시후는 책의 끄트머리를 눌렀다.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으나, 저를 말없이 쳐다보는 눈동자에 심기가 뒤틀렸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화를 내던지, 욕이라도 하던지. 이런 짓을 해도 너는 나를 모른 척하는구나.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나는 너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넌 너무도 쉽게 내게 등을 돌렸다.

1655087440383.jpg“비켜.”

그래서 못되게 굴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뚜벅뚜벅 걸어 멀어졌고, 뒤돌아서는 미치도록 후회했다.

1655087440383.jpg‘……내가 왜 그랬지…….’

나는 너무 어렸고, 솔직하지 못했다. 나를 모른 척하는 네가. 내게 의지하지 않는 네가. 미워서 미칠 것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1655087440383.jpg“하…….”

어느 순간부터, 한숨이 습관이 되었다. 며칠 후, 시후는 우연히 겨울이 뒤뜰에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치기 어린 마음에 모른 척 지나갔으나, 겨울이 신경 쓰여 조금 뒤 다시 돌아왔다. 뒤뜰에 홀로 쓰러진 채로 버려져 있는 겨울을 발견했을 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작정 달려간 시후는 바닥에 쓰러진 겨울을 황급히 안아 들어 양호실로 정신없이 뛰었다.

1655087440383.jpg“…….”

시후는 양호실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겨울을 처참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맞은 건지, 가녀린 몸에는 자잘한 타박상과 찰과상이 있었고, 안 그래도 하얀 피부는 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에 열 오른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난 대체 지금까지 혼자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스스로가 못 견디게 싫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1655087440383.jpg“그 새끼들…….”

잇새를 짓씹자 욕설이 튀어나왔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피가 뜨겁게 들끓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겨울을 폭행한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16550874403843.jpg‘너도 어디 계속 그 쥐새끼 같은 계집애와 어울려 봐라. 그런 쪼끄만 년, 구실 만들어서 퇴학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매섭게 경고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싸늘하게 어른거렸다. 아버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결코 허황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655087440383.jpg“……하.”

겨울을 도우려는 행동이 되려 그녀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숨만 길어졌다.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스스로가 밉고 싫었다.

1655087440383.jpg“……왜 맞고만 있었어.”

그래서 괜히 피해자인 겨울을 다그치고 말았다.

1655087440383.jpg“소리라도 지르던가. 왜 아무것도 안 하는데?”

화가 났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스스로의 약함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16550874464216.jpg“신경 꺼. 네가 무슨 상관인데?”

1655087440383.jpg“…….”

16550874464216.jpg“내 일에 관여하지 마.”

……나도 너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아.

1655087440383.jpg“함겨울. 네가,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들잖아.”

하지만 좋아하니까.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겨울이 눈물을 보일 때마다 가슴에 칼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물론 더는 관여할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간의 마음은 점점 더 엇갈리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의 버려진 창고에 불이 나는 소동이 있었다. 누군가가 119에 신고를 했고, 많은 학생이 모여 연기가 피어오르는 창고를 둘러싸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본 시후도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도로 갈 길을 가려던 찰나였다.

16550874403895.jpg“저, 저기 안에 함겨울 있는데…….”

1학년의 한 남학생이 겁에 질린 얼굴로 창고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것이었다. 동시에 시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짜고짜 그 남학생의 멱살을 잡아 올린 시후는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물었다.

1655087440383.jpg“너, 그게 무슨 소리야.”

덜컥 겁을 먹은 남학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1655087440383.jpg“똑바로 말 안 해, 이 새끼야!”

위압적인 물음에 남학생이 눈을 질끈 감고 솔직하게 실토했다.

16550874403895.jpg“제, 제가 저 안에 함겨울을 가두고 나왔는데…….”

동시에 팍 멱살을 내팽개친 시후는 곧장 옆의 수돗가로 달려가 호스로 찬물을 온몸에 끼얹었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길이 치솟는 창고로 돌진해 굳게 잠겨 있는 문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쾅! 낡은 창고 문은 단번에 부서졌다. 바쁘게 둘러보는 시야 끝에 구석에 쓰러진 채 의식을 잃은 겨울이 들어왔다.

1655087440383.jpg“함겨울!”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튀어 나가듯 달려간 시후가 다급하게 겨울을 안아 들었으나 이미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그녀는 의식이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 위해 겨울을 안고 움직이는 찰나. 쿵! 천장에서 부서진 구조물의 잔해가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등을 숙여 겨울을 감싼 시후는 제 등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화상까지 입었는지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1655087440383.jpg“윽…….”

사방에 창천한 불길은 금방이라도 시후와 겨울을 삼킬 듯했다. 더 지체했다가는 겨울의 목숨이 위태로울 거란 생각 하나가 시후의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고개 숙이며 호흡한 시후는 의식을 놓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두 다리를 꽉 지탱하고 겨울을 품에 고쳐 안았다.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제 품으로 단단히 끌어당긴 시후는 매서운 불길 사이를 헤치고 겨우 창고를 빠져나왔다.

1655087440383.jpg“겨울아.”

시후의 교복은 등 부위가 전부 타서 빨갛게 녹은 살갗이 노출되어 있었다. 끔찍한 부상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고통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1655087440383.jpg“정신 차려, 함겨울.”

피가 전부 빠진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겨울은 의식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시후는 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1655087440383.jpg“제발…….”

이대로 겨울이 죽을까 봐 두려웠다.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하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울의 뺨을 쓸었으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1655087451994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