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래도 부부인데2021.11.21.
“대표님. 오늘 저녁 식사는 어떻게…….”
대표실 문을 연 예나가 뒷말을 흐렸다. 시후가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외투를 걸쳐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할 거야.”
“네?”
“퇴근한다고.”
놀란 예나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근 며칠 회사에서 숙식하며 집에 들어가는 법이 없었던 시후인데, 오늘은 저녁 7시가 되기도 전에 귀가를 말하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급한 건은 다 해결했으니, 나머지 일정은 다음 주로 전부 옮겨.”
“아…… 네, 알겠습니다.”
“홍 비서도 그만 퇴근해.”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다급하게 대표실을 떠나는 시후의 뒷모습을 보며 예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표야. 오늘 저녁은 요 앞에 고깃집에서 삼겹살에 소주, 콜?”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시후에게 재환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으나 그는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야, 갑자기 어디가?”
그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시후는 주차장으로 직행했다. 서둘러 겨울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차에 올라탄 시후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그러나 퇴근 시간과 맞물린 서울의 교통체증은 시후를 도로 위에 오랜 시간 묶어 놓았다. 빠르게 올라가는 층수를 초조한 마음으로 보고 있던 시후는 20층에 도착하자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자꾸만 엇나가는 와중에 묘한 기대감이 함께 부풀었다.
“I'm on the Next Level, Yeah!”
집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노랫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현관문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겨울은 큰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높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하얀 타월을 아슬아슬하게 몸에 두른 겨울이 보였다.
“절대적 룰을 지켜! 내 손을 놓지 말아!”
막 씻고 나왔는지 뽀얀 피부로 물기가 촉촉하게 서려 있었다. 그 몸을 감싼 하얀 타월은 겨울의 몸을 절반도 가려 주지 못했다. 아찔하게 가슴에 걸쳐있는 타월 위로 훤히 드러난 뽀얀 어깨와 가느다란 팔이 시후의 시야를 자극했다. 시후가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 조그마한 엉덩이는 이리저리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어린 시절 천진했던 겨울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했다.
“결속은 나의 무기! 광야로 걸어…….”
“겨울아.”
“가아악!!!”
언제까지나 지켜만 볼 수 없어 나직하게 부르자 겨울이 놀란 듯 들고 있던 맥주를 떨구었다. 그대로 뒤로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팔을 뻗은 시후가 겨울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 제 품으로 확 당겼다. 놀란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끔뻑거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화장기 없이 뽀얗고 촉촉한 얼굴은 11년 전과 변함없이 앳되고 풋풋했다.
“나 퇴근했어.”
“…….”
“근데 뭐 하고 있는 거야?”
새하얀 얼굴이 빨갛게 불타는 걸 보자 웃음이 흘렀다. 다시 겨울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하고 나니 왠지 모를 용기가 샘솟았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팔을 뻗은 시후가 겨울의 여린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말랑한 몸이 빈틈없이 딱 달라붙자 제 심장의 박동 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묘하게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겨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보고 싶어서 혼났는데.”
등을 더욱 감싸 안자 자그마한 몸이 가진 여린 곡선들과 탐스러운 굴곡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놀라서 움찔움찔 떠는 귀여운 반응과 합쳐져 본능적인 욕구가 샘솟고 말았다. 제어가 안 될 것 같아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겨울이 먼저 시후를 두 손바닥으로 확 밀쳐냈다.
“꺄아아악!”
다만 겨울이 두르고 있던 타월이 훌러덩 벗겨졌고, 찰나 동안 눈앞을 스쳐 지나간 뽀얀 속살에 시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놀란 겨울은 그대로 제 가슴을 엑스자로 가리며 주저앉았다.
“저, 저, 저리 가, 강시후!”
흘러내리는 타월을 끌어올리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뒤를 돌아야 신사적인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앵두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에 또다시 짓궂은 마음이 피어오르고…….
“옷은 왜 안 입고 있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욕망이 여기에.
“내가 입혀줄까, 겨울아?”
그 말에 겨울은 당황한 듯 타월을 움켜쥐며 도리질 쳤다.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꼭 사냥꾼에게 붙잡히기 직전의 토끼 같았다.
“이, 씨…….”
이내 커다란 눈이 휘어지며 울먹거리는 걸 보자 시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하면 괴롭히는 것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빠르게 이성이 돌아왔다.
“미안. 장난이었어.”
“……빨리 뒤 돌아.”
곧바로 뒤를 돌자 뒤에서 주섬주섬 타월을 끌어올려 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쓱하게 서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타월을 제대로 입은 겨울이 씩씩거리며 시후의 옆을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쪼르르 가다가 우뚝 멈춰선 겨울은 흘끔 시후를 돌아보았다.
“너, 봤지.”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인 겨울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어?”
“봤잖아!”
“아…….”
당황한 시후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안 보였어.”
차마 전혀 못 봤다고 할 수는 없어 양심상 한 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밖에 못 봤어.”
그 말에 겨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괘씸하게 노려보던 겨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시후의 정강이를 발로 퍽 걷어찼다.
“아…….”
아파하는 시후를 뒤로하고 겨울은 쿵쾅거리며 방으로 쏙 들어갔다. 정강이를 문지르던 시후가 이내 낮게 웃음을 흘렸다.
*** 방 안으로 들어온 겨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벽에 등을 기대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터질 것처럼 뛰는 제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 이렇게까지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리다니, 고장이라도 난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강시후…….”
며칠 동안 내내 싸하게 대하더니, 눈 마주쳐도 인사 한번 안 하고 무시하더니! 갑자기 왜 또 다정해진 건지……. 도무지 그의 심리를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옷을 갖춰 입고 나가자 다이닝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먹자.”
가사도우미가 차려놓고 간 몇 가지 반찬들을 보는 겨울의 눈빛이 껄끄러웠다.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자 식사는 조금 불편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오늘 왜 이렇게 일찍 퇴근한 거예요?”
겨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 며칠 잘 안 들어오길래, 오늘도 늦게 올 줄 알았어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실상은 겨울을 보기 위해 남은 일도 제쳐두고 달려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시후는 진실을 숨기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당분간 웬만하면 늦지 않게 퇴근하려고 해. 일정 맞으면 저녁 같이 먹자.”
겨울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떨구었다. 그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입을 다물자 잠시 침묵 속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내가 말한 건 생각해봤어요?”
한참 만에 입을 연 겨울이 나지막이 물었다.
“이혼이요.”
동시에 차갑게 굳는 시후의 표정에 겨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이 싸늘해진 표정으로 인해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겨울은 가까스로 외면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못 들은 척 넘어갈 생각이라면 이쪽에서 사양인데.”
동요를 숨기고 무덤덤한 척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잠시 잔으로 입술을 적신 시후가 낮은 음성을 내었다.
“함겨울.”
마침표를 찍듯이 이름을 부르자, 겨울은 심장이 칼날에 베이는 듯했다. 애써 시선을 들어 올리자 어둑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네가 과거에 있었던 일로 괴로운 거 알아.”
시후의 눈매가 진하게 가늘어졌다.
“하지만 난 우리가 언제까지나 과거에 매여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해.”
“…….”
“지난날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잖아.”
“……그쪽이 과거에 나한테 했던 행동, 말투, 눈빛 하나까지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집안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한 짓 또한. 누명을 씌워 죽음까지 몰아넣은 그 일을…….
“남김없이 빼곡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겨울은 입술을 아릿하게 깨물었다. 오래된 상처는 결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시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그 낮은 목소리가 겨울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뭐라고요?”
“나 너한테 진심으로 좋은 남편이 되어주고 싶어.”
그 말에 겨울의 눈꺼풀이 잘게 경련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러고 싶은 건데요?”
“…….”
“아니, 우리가 애초에 어떻게 결혼한 건진 모르겠지만…….”
겨울이 작게 한숨 지었다.
“내 기억 속 강시후는 이렇게 구질구질한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가.”
씹듯이 뱉어진 말이 겨울의 심장을 바싹 조였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칠흑 같은 목소리였다. 더 대화하다간 또 말릴 것 같아 겨울은 경직된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피차 피곤하게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말죠.”
토해내듯 숨을 뱉은 겨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강시후 씨, 보니까 일만으로도 바쁜 사람 같은데 괜히 나까지 신경 쓰지 말고 깔끔하게 헤어져요.”
냉랭한 음성이 시후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결코 풀리지 않는 과거의 굴레가 두 사람 사이에는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을 뚫고 겨울은 들고 있던 식기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나 먼저 일어날게요.”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이 시후의 옆을 지나려던 찰나였다. 손으로 부드러운 온기가 감기자 놀란 겨울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우리가…….”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쌌다.
“다시 사랑할 기회를 주면 좋겠어.”
겨울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가슴이 무언가에 찢기는 듯이 욱신거렸다. 진해진 시후의 눈동자가 겨울을 쓰다듬듯이 뜨겁게 움직였다. 그 과열된 시선에 겨울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나에게 시간을 줘.”
“……시간?”
“그래. 딱 세 달만.”
“…….”
“세 달 동안 하루에 한 번 눈 마주치고 인사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데이트하고.”
잡힌 손으로 끈적한 기운이 느릿하게 감겨왔다.
“가끔은 평범한 부부처럼 손도 잡고 포옹도 하는 거.”
하, 기가 막혔다. 결국은 되지도 않는 기회를 달라는 뜻이었다.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내가 왜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나한테는 없잖아요.”
“이유라…….”
시후가 비스듬히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자신 없나 봐?”
“……네?”
“나한테 넘어오지 않을 자신 없나.”
“무슨 말도 안 되는…….”
발끈한 겨울이 시후의 손을 확 뿌리치며 큰소리쳤다.
“자신 있거든요! 당신이 내 앞에서 원맨쇼를 하든 빨가벗고 춤을 추든,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까!”
“그럼 동의한 거다?”
……아, 결국 말렸다.
“하루 한 번, 3초 이상 눈 마주치고 인사하기. 일주일에 한 번 둘이서 데이트.”
눈앞이 아득해진 겨울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뭘 하든, 넌 눈 하나 깜짝 안 한다고 했으니…….”
시후의 혀가 느릿하게 굴렀다. 길어진 입술이 천천히 웃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움찔한 겨울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그래도 부부인데.”
부드럽게 뻗어진 손이 뺨을 어루만지자 겨울의 얼굴에는 열이 올랐다. 날렵한 눈매가 나른하게 웃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일순 끌어당기는 힘에 몸이 확 기울였다. 놀란 겨울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와 함께 숨을 멈추었다.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해.”
시후의 입술이 눈앞에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대신…….”
겨울의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이혼은 없어.”
여유롭게 미소 짓는 얼굴에 겨울은 심장이 떨어진 표정을 지었다.
“꿈도 꾸지 마.”
……아. 차라리, 악몽이라고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