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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물안개 (22/112)

22. 물안개20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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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란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동공이 거칠게 흔들리고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라탄 남자는, 전날 퇴근길에 나타나 강시후와 이혼하라고 종용했었던 그 불길한 남자가 분명했다.

16550876482042.jpg“…….”

겁먹은 겨울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폐쇄된 엘리베이터에는 이 남자와 자신, 둘 뿐이었다. 순간 숨이 턱 틀어막히며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비명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한 발짝 뒷걸음질 치자 차가운 벽의 감촉이 등으로 와닿았다. 눈을 질끈 눌러 감자 소름 끼치는 음성이 귓가를 찔러왔다.

16550876482045.jpg“어제 내 경고를 흘려넘긴 모양인데.”

괴한의 고개가 느슨하게 돌았다.

16550876482045.jpg“오늘도 이 집으로 들어온 걸 보면 말이야.”

겨울은 온몸의 피가 증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16550876482045.jpg“내가 분명 목숨이 아까우면 강시후와 헤어지라고 하지 않았나?”

날이 선 물음이 겨울의 숨통을 옥죄어왔다. 더듬더듬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겨울은 남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핸드폰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112를 눌렀다. 여차하면 통화버튼을 누를 생각을 하며 시선을 들어 올리자 괴한이 그런 겨울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흠칫한 겨울은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

16550876482042.jpg“……대, 대체 누군데 자꾸 그런 말을…….”

16550876482045.jpg“그건 네가 알 거 없고.”

16550876482042.jpg“…….”

16550876482045.jpg“핸드폰으로 뭘 하고 있는 거지?”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20층에 도달했다. 겨울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앉는 심장을 느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강제로 움직였다. 뛰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따라 내린 괴한이 겨울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16550876482042.jpg“아!”

16550876482045.jpg“지금 설마, 신고하려고…….”

흠칫한 겨울이 팔을 뻗어 남자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도로 뺏으려 했다. 하지만 키가 큰 남자가 손을 확 위로 올렸고, 당연하게도 겨울의 손은 핸드폰에 닿지 않았다.

16550876482042.jpg“내놔요! 빨리……!”

까치발을 세운 겨울이 남자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무서웠으나 여기서 핸드폰까지 뺏기면 정말 끝이었다. 핸드폰을 뺏으려는 겨울과 뺏기지 않으려는 남자의 실랑이가 한바탕 벌어졌다. 서로 양보하지 않고 옥신각신하다가 겨울은 핸드폰의 끄트머리를 움켜잡는 데 성공했다. 확 아래로 끌어당기는데, 그 힘에 부딪힌 남자의 선글라스와 모자가 동시에 벗겨져 날아갔다. 일순간 드러난 괴한의 민얼굴과 함께, 그를 알아본 겨울의 눈이 한계까지 뜨여졌다.

16550876482042.jpg“…….”

쾅. 순간적으로 겨울은 이명처럼 들리는 총성을 느꼈다. 무언가가 관자놀이를 관통한 것처럼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16550876482042.jpg“……뭐야.”

남자의 까만 동공과 맞닥뜨린 겨울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상상도 못 한 정체에 숨이 턱 틀어막히고 입이 떡 벌어졌다.

16550876482042.jpg“……너 뭐야?!”

겨울은 경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정체를 들킨 그는 당황한 듯 선글라스와 모자를 주울 새도 없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넋이 나간 겨울은 그가 자취를 감춘 후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이윽고 집으로 들어온 겨울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바닥에 주르륵 쓰러졌다. 놀란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고, 손발은 덜덜 떨렸다.

16550876482042.jpg“……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겨울이 가파른 숨을 토해냈다.

16550876482042.jpg“도대체 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조금 전 그 괴한의 정체는 틀림없는…….

16550876482042.jpg“강시후였어.”

이혼하라고 협박했던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강시후 본인이었다. 혼란에 잠식된 머리를 움켜쥔 겨울은 밀려오는 당혹감에 입술을 벙긋거렸다. 마스크는 벗겨지지 않았지만 길게 찢어진 눈과 새까만 동공……. 180센티가 훌쩍 넘는 큰 키와 월등한 체격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남자는 강시후가 맞았다.

16550876482042.jpg“대체 뭐야……!”

진짜 미친놈인가? 시후는 며칠 전, 이혼해달라는 겨울의 말에 구질구질하게 애원하며 세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세상 둘도 없는 사랑꾼인 것처럼 굴었고, 솔직한 심정으로 겨울도 흔들리고 있던 차였다.

16550876482042.jpg“근데…….”

그랬던 남자가 뒤에서는 정체를 숨기고, 목숨이 아까우면 자신과 헤어지라고 협박을 했다고? 이건 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면 주작으로 오인당할 수준의 일이었다.

16550876482042.jpg“설마 이중인격……?”

정신병자? 미친놈? 그렇지 않고서야 도무지 이 상황이 납득가지 않았다.

16550876482042.jpg“그럼 1년 전에는 뭐야…….”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강시후는 작년에도 나타났었다. 이경이 시후의 차를 들이받기 전에 그가 나타나 동생 단속을 하라고 말했던 것을 겨울은 똑똑히 기억한다.

16550876482042.jpg‘그땐 다시 재회하기도 전이었는데…….’

그럼 전부터 내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16550876482042.jpg“진짜 이해가 안 가!”

혼돈에 빠진 겨울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현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겨울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도저히 답이 도출되지 않자, 역시 강시후 본인에게 직접 따지기로 하고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아까 한껏 당황한 얼굴로 도망갔으니 제 전화를 안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

1655087654458.jpg-응, 겨울아.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담담한 목소리에 겨울은 황당한 숨을 뱉었다.

16550876482042.jpg“야, 강시후!”

1655087654458.jpg-어?

16550876482042.jpg“너, 대체 뭐 하는…….”

1655087654458.jpg-왜 그래. 목소리가 왜 그렇게 떨려?

16550876482042.jpg“……뭐?”

1655087654458.jpg-무슨 일 있었어?

태연하게 물어오는 말에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1655087654458.jpg-잠깐 기다려. 나 지금 집 앞이라. 들어가서 얘기하자.

16550876482042.jpg“…….”

안면을 싹 바꾼 시후의 태도에 소름이 돋아났다. 곧이어 띠, 띠, 띠, 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고막을 세게 찔러왔다. 떨리는 고개를 억지로 뒤로 돌리자 시후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넋이 나간 겨울은 한 대 맞은 듯한 얼굴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1655087654458.jpg“겨울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를 보자 벌어진 입술 틈으로 헛숨이 흘렀다.

1655087654458.jpg“방금 집에 온 거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걱정스럽게 손을 뻗은 시후가 주저앉아 있는 겨울의 어깨를 감싸 일으켰다.

16550876482042.jpg“……이거 놔! 손대지 마!”

겨울은 그런 그를 확 뿌리치며 미간을 세차게 좁혔다.

16550876482042.jpg“무슨 생각인지 똑바로 말해! 너 대체 정체가 뭐야!”

1655087654458.jpg“어?”

16550876482042.jpg“지금 앞뒤 안 맞는 행동, 다 설명해야 할 거야!”

핏대를 세운 겨울이 차갑게 따졌으나 시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16550876482042.jpg“솔직히 말해. 이중인격이야? 아니면 무슨 꿍꿍이냐고!”

1655087654458.jpg“겨울아…….”

격양된 겨울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 달랜 시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1655087654458.jpg“미안한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16550876482042.jpg“…….”

1655087654458.jpg“나 없는 새에 무슨 일 있었어?”

그 말에 맥이 탁 풀린 겨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결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1655087654458.jpg“아니면…… 내가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이게 연기라면 그는 이미 할리우드에 진출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16550876482042.jpg“하…….”

한순간 멘탈이 너덜너덜 넝마가 된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섰다. 퍽 시후를 밀친 겨울이 곧장 현관문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1655087654458.jpg“잠깐. 이 늦은 밤에 어딜 가려고. 곧 비도 올 것 같은데…….”

시후가 걱정스레 속삭이며 겨울의 어깨를 붙잡자, 겨울은 그의 손을 확 뿌리쳤다.

1655087654458.jpg“나갈 거면, 같이…….”

16550876482042.jpg“따라오지 마!”

비명처럼 소리친 겨울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대로 무작정 내달린 겨울은 집 옆의 한강에 도달해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16550876482042.jpg“대체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16550876482042.jpg“아니야. 확실해.”

그럴 리가 없었다. 두 눈 똑똑히 목격했다. 강시후만큼 키가 큰 남자가 흔한 것도 아니었고,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는 다른 사람과 헷갈리래야 헷갈릴 수가 없었다.

16550876482042.jpg“근데 다 들켜놓고 왜 모른 척 시치미냐고…….”

혹시 쌍둥인가? 그것도 아니면 도플갱어?

16550876482042.jpg“그럴 리가 없잖아……!”

별의별 상상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부유했다. 겨울은 무질서하게 뒤죽박죽이 된 머리를 부여잡고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잠시 쭈그리고 앉아 숨을 고르던 겨울은 다시금 일어나 한강 변을 걸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강시후와 마주해야 할 테니 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엄마의 집에 가면 그녀가 걱정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 시간이 넘도록 망연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졌다.

16550876482042.jpg“아!”

놀란 겨울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톡, 톡, 토톡. 한 방울로 시작한 비는 이내 소나기가 되어 맹렬하게 작렬했다. 한바탕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에 당황한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그때, 머리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지며 어깨를 적시던 빗줄기가 멎었다. 누군가 뒤에서 우산을 씌워준 것이었다. 놀란 겨울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다시금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맨 강시후가 보였다.

16550876482042.jpg“하…….”

허탈한 숨이 입술 사이를 타고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얽히고, 남자는 겨울의 어깨를 감싸며 고갯짓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자 두 사람은 일단 다리 밑으로 향했다. 살짝 젖은 머리를 턴 겨울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뱉었다.

16550876482042.jpg“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거 잊었어?”

16550876628319.jpg“…….”

16550876482042.jpg“왜 나온 거야. 내 말이 우스워?”

표독스럽게 얼굴을 굳힌 겨울이 싸늘하게 따지자 남자는 대답 대신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느릿한 손길로 모자까지 벗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할 말을 잃어버린 겨울이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마저 마스크를 벗었다. 겨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강시후가 맞았다. 심장에서 시작된 한기가 발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마스크 안쪽에 붙어 있던 음성변조기를 떼어냈다. 낮게 깔린 익숙한 목소리가 겨울의 고막을 두드렸다.

16550876628319.jpg“일단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해.”

……그걸 말이라고. 잇새를 악문 겨울이 그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계속 모른 척 시치미 떼더니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건지…….

16550876628319.jpg“전부 설명할 테니까, 놀라지 말고 들어.”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겨울의 눈썹이 세차게 올라갔다.

16550876628319.jpg“지금 집에 있는 강시후와 나는…….”

조금 망설이는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16550876628319.jpg“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이야.”

황당한 말에 겨울이 혀를 찼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말로만 듣던 자아분열 한 이중인격자를 눈앞에서 목격한 듯했다. 더 이상 못 들어주어서 그의 손에 들린 우산을 확 빼앗아 펼쳐 들었다.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겨울의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묶었다.

16550876628319.jpg“나는…….”

강에 깔린 물안개처럼 나직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16550876628319.jpg“서른아홉 살의 강시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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