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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나랑 연애할래? (30/112)

30. 나랑 연애할래?2022.01.12.

겨울은 오후 1시에 예약한 손님의 관리를 마친 뒤 뒷정리를 하고 직원 대기실로 향했다. 중요한 VIP 손님이었기에 총력을 다했어야 했지만, 테라피하는 내내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탓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심란한 몸을 이끌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16550878799294.jpg“하아…….”

짙은 숨을 내쉰 겨울이 눈을 지그시 눌러 감자, 조금 전 시후와 있었던 일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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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50878799304.jpg“우리 이혼하자.”

그 말을 들었을 때, 겨울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16550878799304.jpg“이혼, 해 줄게.”

그토록 원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먼저 나왔으나, 이상하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충격으로 벌어진 입술은 다물어질 기미가 없었고,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넋을 놓고 가만히 시후를 응시하고 있자, 그의 입술이 다시금 느리게 열렸다.

16550878799304.jpg“대신 조건이 있어.”

겨울의 목 안으로 침이 따갑게 넘어갔다. 가시가 박힌 듯이 속이 답답했다. 역시 순순히 이혼해줄 리는 없었다. ……무슨 조건일까. 그가 면제해줬던 1억의 채무를 다시 갚으라고 할지도 몰랐고, 위자료를 달라고 할지도 몰랐다.

16550878799304.jpg“나랑 연애할래?”

겨울의 눈이 깜빡거렸다.

16550878799304.jpg“법적으로 남남 되기 전까지만.”

상상도 못 한 제안이었다. 머리를 쇳덩이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16550878799304.jpg“이혼숙려기간이 있잖아. 서류에 도장 찍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1개월의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하던데.”

겨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시후는 그 여린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16550878799304.jpg“숙려기간 동안, 한 달만 연애해. 그게 내 조건이야.”

그렇게 말하는 시후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반면 겨울의 가슴은 풍랑을 맞은 것처럼 거침없이 뒤흔들렸다.

16550878799294.jpg“……하지만, 그건 이상하잖아요. 이혼 신청을 해놓고 사귄다는 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연인이 된다니,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겨울은 그렇게까지 하려는 시후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16550878799304.jpg“저번에도 말했지만, 나 너와의 마지막을 다시 만들고 싶어.”

겨울의 눈동자가 가냘프게 굴렀다. 우뚝 멈춘 곳에는 저를 내려다보는 시후의 뜨거운 시선이 있었다.

16550878799304.jpg“사랑하는 여자 기억 속에, 최악의 남자로 남는 게 싫으니까.”

16550878799294.jpg“…….”

16550878799304.jpg“먼 훗날 네가 날 기억할 때, 좋은 추억으로 떠올렸으면 좋겠어.”

겨울을 쓰다듬는 것처럼 시후의 시선이 느리게 내려갔다. 그 새까만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더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창밖의 바람은 점점 더 추워지고 어느덧 시린 계절이 찾아오고 있는데, 그의 까만 눈동자는 날이 갈수록 따뜻해지고 있었다.

16550878799304.jpg“널 웃게 해 주고 싶어.”

이제는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다정함의 열기가 겨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6550878799304.jpg“허락해줘.”

무덥다 못해 뜨거웠고, 이제는 아릴 정도였다. 무어라 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흘러나오는 것은 연약한 바람 소리뿐이다. 겨울이 답을 하지 않자 시후가 작게 한숨 쉬었다.

16550878799304.jpg“싫다고 하면, 더 이상 붙잡지 않을게.”

일종의 시한부 연애였다. 겨울은 지금 자신이 망설이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6550878799294.jpg“……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줘요.”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 조금 전 시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겨울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으나, 어떻게 해야 옳은 선택인지 알 길이 없었다. 물론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16550878799304.jpg‘허락해줘.’

그 진심 어린 눈동자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려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리는데, 직원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16550878813645.jpg“야, 함겨울!”

희수는 씩씩거리며 걸어와 겨울의 등을 찰싹 때렸다.

16550878813645.jpg“내가 어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렇게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16550878799294.jpg“아. 미안, 미안.”

겨울이 머쓱하게 두 손을 모으고 사과했다. 전날 갑자기 자리를 뜬 것은 어디까지나 충동적인 행위였다.

16550878813645.jpg“그나저나 그 나쁜 년들! 내가 아주 쌍 싸대기를 때려줄까 하다가, 깽값 물어줄 여력이 없어서 참았다, 진짜. 어후!”

전날 그 재수 없는 트리오를 떠올린 희수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겨울은 괜히 가슴 한쪽이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어제는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바로 옆에 있었다.

16550878813645.jpg“근데 전화는 왜 그렇게 안 받아?”

16550878799294.jpg“핸드폰 잃어버린 것 같아. 어제 클럽에서는 분명히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워낙 취해서 정신이…….”

16550878813645.jpg“헐, 진짜? 아깝다. 너 핸드폰 얼마 전에 바꿨잖아.”

16550878799294.jpg“뭐, 다 내 업보지, 업보. 이제 당분간은 술 자제하려고.”

여러 사람에게 민폐 끼쳤다는 생각에 부끄러울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강시후에게 부렸던 온갖 술주정이 가장 후회되었다. 2명의 고객을 더 받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겨울은 1층 카페에 들렀다. 하도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아 당분 충전이 절실했다.

16550878799294.jpg“사장님, 안녕하세요.”

16550878827571.jpg“안녕하세요, 겨울 씨. 지금 퇴근해요?”

석우는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볼 때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겨울도 입꼬리를 올렸다.

16550878799294.jpg“네. 바닐라 라떼 아이스로 한 잔 주세요.”

16550878827571.jpg“항상 아메리카노만 시키셨었는데, 오늘은 다른 거 주문하시네요?”

16550878799294.jpg“네. 달달한 게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요.”

16550878827571.jpg“가끔 그럴 때가 있죠. 우리 카페 바닐라 라떼 정말 맛있는데, 겨울 씨 입맛에도 맞았으면 좋겠네요.”

나지막이 웃은 석우가 곧바로 음료 제조에 들어갔다. 능숙한 손길로 순식간에 바닐라 라떼를 만든 석우가 겨울에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16550878827571.jpg“그…… 저번에는 죄송했었어요.”

16550878799294.jpg“네? 저번이요?”

16550878827571.jpg“결혼하신 지도 모르고 제가 실례를…….”

그제야 겨울은 저번에 석우가 제게 번호를 달라고 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동안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완전히 잊고 있었다.

16550878799294.jpg“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16550878827571.jpg“그런데 이상한 생각으로 연락처 달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겨울 씨가 너무 좋은 분 같아서, 좀 더 친해지고 싶었어요. 그냥 친구처럼.”

석우가 머쓱하게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16550878827571.jpg“그날, 남편분도 조금 화나셨던 것 같은데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16550878799294.jpg“아, 괜찮아요. 저희 남편은…… 그런 걸로 화내는 사람 아니에요.”

그날 시후가 얼마나 질투했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겨울이 대충 웃어넘겼다.

16550878827571.jpg“다음에 남편분 뵈면, 셋이 같이 식사 한 끼 해요.”

16550878799294.jpg“네. 좋아요. 그럼 가볼게요.”

살짝 고개 숙인 겨울이 웃으며 뒤를 돌았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카페를 나서며 라떼를 한 모금 가득 머금었다.

16550878799294.jpg‘오, 이거 진짜 맛있다.’

석우가 자신했던 것처럼 적당히 달콤하고 쌉쌀한 게 살면서 먹은 바닐라 라떼 중에 제일이었다. 입가에는 절로 미소 띠어지고 저도 모르게 생글생글 웃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16550878856698.jpg“저 사람하고 잘해보지, 그래.”

문득 옆의 골목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16550878799294.jpg“아,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의 강시후였다. 오늘도 역시나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차림이었다.

16550878799294.jpg“언제 왔어요?”

16550878856698.jpg“방금.”

16550878799294.jpg“무슨 귀신도 아니고 뒤에서 말도 없이 서 있어요?”

16550878856698.jpg“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나 싶어서 찾아왔지.”

16550878799294.jpg“닦달 안 해도 잘하고 있거든요?”

퉁명스럽게 답한 겨울이 고개를 홱 돌리고 자그마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16550878799294.jpg“……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겨울은 새삼 제 처지가 우스웠다. 현재의 남편한테는 연애하자는 얘기나 듣고 있고, 미래의 남편에게는 빨리 이혼하고 남남 되라며 독촉이나 듣고 있으니.

16550878856698.jpg“나와 이혼하면, 저 카페 사장하고 잘해보지, 그래?”

16550878799294.jpg“네?”

황당함에 입을 떡 벌린 겨울이 되물었다.

16550878856698.jpg“저만하면 잘생긴 축에 속하고, 나이도 별로 많지 않아 보이고.”

16550878799294.jpg“이봐요. 지금 무슨 헛소리를…….”

16550878856698.jpg“일단 들어. 너한테 좋은 정보니까.”

16550878799294.jpg“……좋은 정보? 뭔데요?”

16550878856698.jpg“저 사람이 지금 운영하는 개인 카페, 도스 트레스 신코.”

그는 카페 간판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을 이었다.

16550878856698.jpg“저게 8년 후에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되거든. 전국에 매장만 아마 천 개가 넘을 거야.”

16550878799294.jpg“처……천 개?!”

놀란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모르게 떡 벌어진 입을 콱 틀어막았다. 미래에 천 개의 매장을 거느린다는 것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커피 브랜드로 꼽히게 된다는 뜻이었다.

16550878856698.jpg“아니면 너 친구 있잖아. 그 치과의사. 박주형인가 뭔가.”

16550878799294.jpg“주형이는 갑자기 왜요?”

16550878856698.jpg“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사장이 별로면 그 친구랑 잘해보던가. 걔도 강남 한복판에 치과 개원해서 돈 좀 만지는 것 같던데.”

16550878799294.jpg“참나, 주형이는 그냥 친구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걔가 날 왜 좋아해요?”

16550878856698.jpg“안 좋아하긴.”

쯧 혀를 찬 시후가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16550878856698.jpg“그런 애가 그때 내 멱살을 잡고, 날 죽이려 들었나?”

16550878799294.jpg“예? 주형이가 그쪽 멱살을 왜 잡아요?”

겨울의 물음에 그가 움찔했다. 말실수한 듯 그가 제 입가를 손끝으로 가렸다.

16550878799294.jpg“미래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주형이가 그쪽 멱살을 잡아요?”

16550878856698.jpg“…….”

16550878799294.jpg“그리고 주형이는 평생 공부만 한 애라 그런 폭력적인 행동 못 해요. 얼마나 착하고 다정한 앤데요?”

16550878856698.jpg“그런 놈들이 더 엉큼한 거야.”

……잘해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겨울은 그의 솔직한 마음이 궁금했다. 자기와 이혼하면 다른 남자와 잘해보라며 미래의 정보를 알려주면서도, 은근히 질투하는 듯한 저 태도. 대체 이 남자는 또 무슨 생각인 건지…….

16550878897951.jpg“무슨 얘기 하는 중이에요?”

그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겨울과 시후가 동시에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은 박주형이었다.

16550878897951.jpg“미래?”

주형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16550878897951.jpg“무슨 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들은 걸까. 철렁 내려앉은 겨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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