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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두 입술 사이 (31/112)

31. 두 입술 사이2022.01.16.

16550878963658.jpg“무슨 얘기 하는 중이에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겨울과 시후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자 박주형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16550878963658.jpg“미래? 무슨 미래?”

당황한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만 굴렸다. 이렇게 듣는 귀가 많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잠시 놀란 듯 굳어 있던 시후가 이내 침착하게 뒤를 돌며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빠르게 자리를 비키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16550878963658.jpg“겨울이 남편분 맞죠?”

움찔한 시후의 다리가 굳었다. 놀란 겨울의 눈이 커졌다.

16550878963658.jpg“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걱정 많이 했는데, 그래도 겨울이 잘 찾아서 데리고 오신 모양이네요.”

보통 눈썰미가 아니었다. 선글라스에 마스크, 모자까지 동원하여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는데도 주형은 단숨에 그를 알아보았다.

16550878963658.jpg“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165508789637.jpg“…….”

16550878963658.jpg“선글라스에 마스크에, 모자까지…… 왜 얼굴 다 가리고 계세요?”

주형의 의문이 가득 담긴 질문에 미래 시후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주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16550878963658.jpg“야, 너희 남편 나 싫어해? 왜 저렇게 말없이 그냥 가시는 거야?”

16550878963724.jpg“……음. 글쎄.”

커다란 동공을 굴리던 겨울이 어색하게 웃었다.

16550878963724.jpg“하하, 부끄러움이 좀 많아서 그런가 봐…….”

16550878963658.jpg“웬 부끄러움?”

16550878963724.jpg“그…… 우리 남편이 좀 내향적인 사람이잖아. 사람들하고 눈도 잘 못 마주치고 그래.”

16550878963658.jpg“뭐? 전에 뵐 땐 전혀 안 그래 보이셨는데?”

16550878963724.jpg“워낙 감성적이라 가끔 이랬다저랬다 해, 하하. 얼굴도 심심하면 좀 가려보고 그러는…… INFP라 그래.”

제가 생각하더라도 황당한 변명이었으나, 달리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16550878963658.jpg“INFP가 아니라 그냥 나한테 화나신 것 같은데?”

16550878963724.jpg“그……그런가? 왜지?”

16550878963658.jpg“뭐, 남사친이 달갑지는 않으시겠지. 근데 둘이 무슨 대화 하고 있었던 거야? 무슨 미래 어쩌고 하던데.”

16550878963724.jpg“음. 별거 아냐. 그냥 쓸데없는 얘기 한 거지, 뭐. 하하하.”

어색하게 웃던 겨울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16550878963724.jpg“그보다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토요일도 치과에 출근하느라 바쁜 주형이 클레르까지 찾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16550878963658.jpg“아, 네 핸드폰 내가 갖고 있거든. 어제 네가 흘린 거 주웠어. 그거 주려고 왔지.”

주형은 제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겨울에게 건넸다.

16550878963724.jpg“와, 고마워!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16550878963658.jpg“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야? 말도 없이 사라지고.”

16550878963724.jpg“미안해. 내가 너무 민폐 끼쳤지.”

16550878963658.jpg“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주형이 낮게 웃으며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6550878963658.jpg“같이 저녁 먹자고 하고 싶은데, 오늘은 가족 모임이 있어서 다음에 다시 봐야겠다.”

16550878963724.jpg“응. 어제 폐 끼친 것도 있고, 고마운 것도 있으니까 내가 맛있는 걸로 살게.”

전날 주형이 아니었다면 한승희 무리의 계략대로 도둑년 꼬리표가 붙었을 터였다.

16550878963658.jpg“나 진짜 비싼 거 먹을 건데?”

16550878963724.jpg“곧 월급날이라 괜찮아. 희수랑 셋이 다음 주 중에 보자.”

16550878963658.jpg“그래. 기대할게.”

너스레를 떠는 주형에게 겨울이 웃으며 대답했다. 주형과 헤어진 겨울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왔다. 오전에 시후와 나누었던 이야기도 있었으니, 살짝 긴장한 채로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섰다.

16550878963724.jpg‘……뭐지?’

그러나 집 안은 자그마한 소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16550878963724.jpg‘왜 이렇게 조용하지? 강시후, 나갔나?’

조용히 집 안을 둘러보는데 그 어디에도 시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살금살금 둘러보는데, 문득 서재의 문틈이 조금 벌어진 것을 발견했다. 슬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시후가 보였다. 집에서 회사 업무를 보다가 그대로 의자에 기대 잠이 든 것 같았다. 남들보다 두 배는 업무가 많고 바쁜 사람인데, 최근에는 겨울까지도 속을 썩였으니 피곤이 많이 누적되었을 터였다.

1655087904823.jpg“…….”

세상 모르게 잠든 시후를 물끄러미 보던 겨울이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가 그의 책상에 골반을 기대었다. 이렇게 등받이에 기대 아무렇게나 잠이 든 그를 보니 기분이 편치는 않았다. 겨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눈썹과 촘촘하게 붙어 있는 속눈썹, 칼날처럼 날렵하고 오뚝한 코에 선홍빛 입술을 따라 겨울의 시선이 느리게 흘렀다. 한때는 바라만 봐도 설렘으로 가득 찼던 얼굴이었고, 또 한때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볼 때마다 심장 한쪽이 아리도록 욱신거렸다.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은 겨울이 어젯밤 시후와의 일을 떠올렸다.

1655087904823.jpg‘미안해.’

과거 시후의 행동에 겨울이 받았던 상처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자, 그는 그렇게 속삭였었다.

1655087904823.jpg‘……정말 미안해.’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로는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1655087904823.jpg‘미안해, 겨울아.’

세상의 온갖 괴로움이 섞인 음성을 다시금 떠올리자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욱신거렸다. 상처를 받은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저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워 보였다.

16550878963724.jpg“…….”

시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그의 앞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눈썹과 뺨, 오뚝한 콧등을 따라 손끝이 곡선을 그리며 흘렀다. ……11년 전, 이 남자에게,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16550878963724.jpg“하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속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얼른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뗀 겨울이 서재를 빠져나가기 위해 등을 돌린 찰나였다.

16550878963724.jpg“……아!”

돌연 끌어당기는 강한 힘에 겨울이 중심을 잃고 시후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부딪힌 겨울이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자 시후의 입술이 코앞에 있었다. 놀란 겨울이 자지러지며 손을 뗐으나 단단한 팔은 순식간에 겨울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은 몸으로부터 들끓는 열기가 느껴지고 겨울의 맥박은 엄청난 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흘끗 시선을 들어 올리자 가느다랗게 열린 눈꺼풀 사이 검은 눈동자가 겨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뜨겁다 못해 아릿했다. 그 온기에 데인 겨울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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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78963724.jpg“음, 저기. 그게…… 그러니까아…….”

뭐 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답할 길이 없었다. 괜히 창피해진 겨울이 커다란 동공을 돌리며 변명을 생각해냈다.

16550878963724.jpg“자는 거 아니었어요?”

변명하는 대신 따지듯이 묻기로 했다.

1655087904823.jpg“잤어, 조금 전까지.”

아직 잠에 취한 음성이 몽롱하게 흘러나왔다.

1655087904823.jpg“꿈에서 함겨울하고 같이 있었는데, 눈 떠보니까 정말 내 앞에 있더라.”

묘하게 낯뜨거운 기분이 몰려오고 겨울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겨울이 어쩔 줄 모르고 안긴 채로 눈알만 굴리고 있자, 시후가 낮게 웃으며 겨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번쩍 손쉽게 들어 올린 그가 겨울을 책상에 부드럽게 앉혔다. 놀란 겨울이 그의 어깨에 팔을 감자 시후가 한 팔로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키스할 것처럼 비스듬히 다가온 고개가 입술 앞에서 멈추었다.

1655087904823.jpg“그래서…… 고민은 해봤어?”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은 겨울이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16550878963724.jpg“아니요. 아직…….”

1655087904823.jpg“그래, 천천히 생각해. 결정은 느릴수록 좋아.”

시후가 낮게 웃자 겨울이 꼴깍 침을 삼켰다.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두 뺨과 커다란 눈망울을 보자 시후의 입가로는 절로 미소가 띠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저 도톰한 붉은 입술을 한입에 물고 통통하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음미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참고 허리를 일으켰다.

16550878963724.jpg“아, 왜 웃어요!”

1655087904823.jpg“귀여워서.”

불만스럽게 튀어나온 입술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시후는 그 입술에 입을 맞추는 대신 겨울의 고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곧바로 뒤를 돈 그가 서재를 나서려고 하자 책상에서 폴짝 내려온 겨울이 그를 붙잡았다.

16550878963724.jpg“갑자기 어디 가요?”

1655087904823.jpg“성기가 아파서 병원에 좀 갔다 와야 해.”

16550878963724.jpg“……네? 아프다고요?”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일순 제 귀를 의심한 겨울이 되묻자 시후는 새삼 덤덤하게 답했다.

1655087904823.jpg“응. 성기가 아파.”

……갑자기? 이 분위기에 거기가 아프다고? 충격에 물든 겨울이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거렸다. 그녀의 이상야릇한 반응에 정신을 차린 시후가 서둘러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1655087904823.jpg“아, 아니. 네가 기억을 잃은 걸 잠시 잊었어.”

살짝 당황한 시후가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1655087904823.jpg“우리 회사 직원. 김성기 팀장이 갑상선 암으로 입원해서…….”

겨울의 이상한 눈빛에 시후가 뒷말을 흐렸다.

1655087904823.jpg“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못 믿겠다는 듯 껄끄럽게 하체로 향하는 갈색 눈동자에 당황한 시후가 겨울의 턱을 다급하게 잡아 올렸다.

1655087904823.jpg“그 눈빛은 뭐야?”

16550878963724.jpg“내 눈이 왜요?”

1655087904823.jpg“못 믿겠다는 눈이잖아?”

16550878963724.jpg“아니, 뭐…… 이해해요.”

1655087904823.jpg“뭘 이해해?”

16550878963724.jpg“워낙 일이 많으니까, 스트레스도 받을 거고. 과로도 그, 그곳 문제에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어쨌든 얼른 병원 가봐요. 치료하면 낫겠죠.”

시후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 쳤다. 세상 건강하다 못해 오히려 과하게 활력적인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당했다.

1655087904823.jpg“보여줘?”

16550878963724.jpg“네? 아니, 무슨 뭘, 어떻게…….”

1655087904823.jpg“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말하며 성큼 다가오는 거대한 육체에 놀란 겨울이 뒷걸음질 쳤다.

1655087904823.jpg“몸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겨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당황한 겨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 쳤다.

16550878963724.jpg“자자자자, 잠깐만……. 무슨 말을…….”

1655087904823.jpg“왜 알면서 모르는 척해.”

주춤주춤 물러서던 겨울의 등으로 탁, 딱딱한 벽이 닿았다. 비스듬히 사선을 타고 내려온 시후의 입술이 겨울의 입술 앞에서 멈추었다. 까만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열기에 겨울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숨 막히게 야릇한 눈빛이 겨울을 꿰뚫을 듯이 훑어왔다. ……아, 괜히 놀렸다. 후회하며 눈을 감았다가 뜬 겨울의 얼굴이 빨갛게 불타올랐다. 이내 끈적하게 감겨오는 손길이 겨울의 목덜미를 야릇하게 쓸었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손길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16550878963724.jpg“알겠어요. 멀쩡한 거, 건강한 거. 충분히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1655087904823.jpg“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16550878963724.jpg“안 봐도 알겠어요. 관심법으로 보여요.”

1655087904823.jpg“궁예의 환생이야? 그게 어떻게 보여.”

16550878963724.jpg“아아, 어쨌든 알겠어요! 제발 좀……!”

돌연 시후의 길쭉한 손가락이 그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확 풀어버렸다. 우람한 목덜미와 섹시한 쇄골, 벌어진 섬유 틈으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보이자 겨울의 입술이 툭 벌어졌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여간 쓸데없이 과하게 섹시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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