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두근두근 (37/112)

37. 두근두근2022.02.06.

16550880487446.jpg“내일 나와 파트너 해 줄래?”

무더운 숨결이 입술 앞에서 맴돌았다. 나직한 속삭임에 겨울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오민주가 아니라면 여비서와 함께 갈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16550880487446.jpg“혹시 그런 자리가 불편하다면 거절해도 돼.”

놀란 겨울이 잠시간 대답을 하지 못하자 시후가 낮게 덧붙이고는 겨울의 품에 안긴 쇼핑백에 턱짓했다.

16550880487446.jpg“하지만 이건 네 거야. 너 생각하면서 산 거니까.”

1655088048746.jpg“아…….”

입술이 툭 벌어졌다. 뭐라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왠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겨울은 불에 덴 듯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1655088048746.jpg“그……래, 뭐. 법적으로 남남 될 때까지 부부로서 할 일은 해야 하니까.”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입술을 옹송그려 물었다가 뗀 겨울이 자그마한 소리로 뒷말을 속삭였다.

1655088048746.jpg“갈이 가줄게.”

그 말에 흐릿하게 미소 지은 시후가 겨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쇼핑백을 꼭 움켜쥐자 시후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16550880487446.jpg“좋아. 그럼 이거 일단 한번 입어볼래?”

1655088048746.jpg“지금?”

16550880487446.jpg“응. 안 맞으면 내일 오전에 바로 교환해야 하니까.”

1655088048746.jpg“알았어. 입고 나올게.”

쇼핑백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겨울은 문에 등을 기대고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1655088048746.jpg‘……자선회.’

곧 이혼할 사이에 공식적인 자리에 동행하는 게 맞는 걸까, 의심은 들었으나 왠지 꼭 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울이 가지 않는다면 그는 오민주나 여비서와 함께 참석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1655088048746.jpg‘그리고…….’

어찌 됐건, 법적으로 부부인 동안은 아내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사념을 털어낸 겨울이 쇼핑백 입구를 조심스럽게 벌렸다. 하얀 상자의 리본을 풀고 뚜껑을 들어 올리자 연한 누드톤의 베이비핑크 컬러의 드레스가 시야를 자극했다. 살며시 들어 올리자마자 붉은 입술 틈으로 탄성이 흘렀다.

1655088048746.jpg“와, 진짜 예쁘다.”

전체적으로 다운된 색감이 단정한 이미지를 주었으나, 가슴 쪽에 촘촘히 박힌 비즈와 장식들은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함을 자랑했다. 부드러운 소재의 드레스가 손끝에서 찰랑거리자, 허리를 펴고 일어난 겨울이 드레스를 천천히 입었다. 옷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지퍼를 올린 겨울이 거울에 모습을 한 번 비춰본 후 방 밖으로 나섰다. 방문이 살며시 열리자 시후의 시선이 곧바로 문틈으로 향했다.

1655088048746.jpg“어때?”

조금 뻘쭘하게 걸어 나온 겨울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시후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1655088048746.jpg“이런 옷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

머쓱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겨울이 시후의 눈치를 살폈다.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던 시후가 입가에서 잔을 떼어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시후의 시선이 겨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움직였다. 누드톤의 드레스는 뽀얀 피부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고, 어깨부터 시스루로 이루어진 소재 탓에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 체구가 한눈에 보였다. 겨울은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괜히 긴장이 몰려와 침을 꼴깍 삼켰다.

16550880487446.jpg“……분명 마네킹이 입었을 때는.”

커피로 진하게 물든 혀가 끈적하게 움직였다.

16550880487446.jpg“이렇게 야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뜬금없는 말에 겨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커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멀뚱멀뚱 시후를 보던 겨울이 한 박자 늦게 반응하며 발끈했다.

1655088048746.jpg“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후가 낮게 웃으며 커피잔을 손끝으로 쓸었다.

16550880487446.jpg“잘 어울려. 남들 보여주기 아까울 만큼.”

창피함에 괜히 볼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겨울은 뜨겁게 쏟아지는 시후의 눈빛을 피하고자 얼른 뒤를 돌았다.

1655088048746.jpg“됐어. 어쨌든 사이즈 맞는 거 확인했으니까 벗을 거야.”

다시 툴툴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겨울을 시후가 귀엽게 보며 웃었다. 방문이 새침하게 닫히자 시후가 얕은 숨을 뱉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는 아직도 겨울의 새하얀 팔과 다리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둥근 어깨와 가슴,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예쁜 곡선에 속이 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일 입으라고 사 온 것이긴 했지만, 도무지 다른 놈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방에 가둬두고 혼자만 하염없이 구경하고 싶은 음침한 생각까지 들었다.

1655088048746.jpg“오빠…….”

시후가 잔상에 잠긴 동안 굳게 닫힌 문틈으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돌아간 고개가 겨울이 들어간 방문으로 향했다. 신음처럼 끙끙거리는 소리가 여트막하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애달픈 부름이 뒤를 이었다.

1655088048746.jpg“오빠, 오빠.”

겨울답지 않게 처연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어딘가 귀여웠다.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갈무리한 시후가 소파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16550880487446.jpg“왜?”

1655088048746.jpg“나 문제가 생겼는데…….”

16550880487446.jpg“무슨 문제?”

1655088048746.jpg“옷이 잘 안 벗겨져서.”

굳게 닫힌 방문을 향해 걸어가던 시후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1655088048746.jpg“강제로 내리면 찢어질 것 같은데…… 이거 비싼 거지?”

16550880487446.jpg“옷이 안 벗겨진다고?”

1655088048746.jpg“응. 그래서 있지. 나…….”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겨울이 조심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1655088048746.jpg“지퍼 좀 내려줘.”

그 말에 시후의 입술이 작게 툭 벌어졌다. 살짝 놀랐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며 방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16550880487446.jpg“알겠어. 그럼 들어갈게.”

1655088048746.jpg“뭐?! 잠깐, 잠깐!”

16550880487446.jpg“왜?”

1655088048746.jpg“그…… 눈을 좀 감고 들어와 줬으면 하는데.”

16550880487446.jpg“눈을 감으라고?”

1655088048746.jpg“……응. 창피하니까.”

부끄러움을 한껏 담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듯했다. 그 탓에 덩달아 민망해진 시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880487446.jpg“알았어. 눈 감고 들어간다.”

지그시 눈을 눌러 감은 시후가 방문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16550880487446.jpg“어디 있어? 여기?”

더듬더듬 손을 뻗은 시후가 겨울의 지퍼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쉽게 찾지 못했다. 겨울은 제 등 위를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가는 시후의 손에 어깨를 퍼드득 움츠렸다. 조금 내려놓은 지퍼 틈의 살결로 길쭉한 손가락이 살짝 닿자 움찔한 겨울이 뾰족하게 물었다.

1655088048746.jpg“아니, 왜 자꾸 더듬어?”

16550880487446.jpg“안 보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네가 눈 감으라며?”

차마 할 말이 없어 겨울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지퍼를 쥐는 데 성공한 시후가 겨울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등의 가운데쯤에서 무언가에 걸린 지퍼는 쉽게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1655088048746.jpg“왜 그래?”

16550880487446.jpg“지퍼가 뭔가에 걸려서 안 내려가는 거 같은데. 그냥 힘줘서 내릴게.”

1655088048746.jpg“뭐?! 그러다 옷 찢어지는 거 아니야?”

16550880487446.jpg“새로 사면 되지.”

1655088048746.jpg“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16550880487446.jpg“별로 안 비싸.”

……허, 이래서 부자들은 안 돼. 그는 정말로 옷을 다 뜯어버릴 생각 같았다. 작게 한숨 쉰 겨울이 모든 걸 체념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088048746.jpg“그냥 얼른 조심히 내려줘.”

16550880487446.jpg“……눈 떠도 돼?”

1655088048746.jpg“……으응, 떠.”

시후가 살며시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가득 차는 것은 겨울의 새하얀 목덜미였다. 함박눈처럼 뽀얗고 예쁜 곡선을 가진 길쭉한 목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시후가 시선을 내리자, 두 갈래로 갈라진 섬유 사이로 드러난 티 없이 깨끗한 등이 두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지퍼가 걸려 있는 부분은 연분홍색 브래지어의 훅 부분이었다. 까만 동공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시각적 자극과 더불어 달콤한 살 내음이 코끝에서 어른거리자 시후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1655088048746.jpg“대신 눈 작게 떠 조금만. 0.1 센티만.”

16550880487446.jpg“어떻게 눈을 0.1 센티만 떠?”

1655088048746.jpg“그만큼 작게 뜨라는 뜻이잖아. 진짜 알면서 자꾸…….”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여워 시후가 저도 모르게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겨울의 목덜미로 야트막한 숨결이 간지럽게 쏟아지자 흠칫한 겨울의 척추가 곤두섰다.

1655088048746.jpg“……남의 목에 대고 웃지 마!”

그 예민한 반응에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한 시후가 느슨하게 고개를 숙여 겨울의 귓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16550880487446.jpg“그럼 귀에 대고 웃을까?”

후, 뜨거운 숨이 고막을 타고 흐르자 겨울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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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8048746.jpg“아, 진짜!!!”

빨간 토마토처럼 익어버린 얼굴로 확 뒤를 돌아본 겨울이 시후를 원망하듯 응시했다. 성난 새끼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망울로 씩씩거리며 올려다보는 모습이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웠다. 시후는 머리로 열이 몰리는 듯해 정신이 아득했다.

1655088048746.jpg“빨리 내리기나 해!”

16550880487446.jpg“알았어, 알았어.”

다시 뒤를 돌자 하얀 등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왜 안 내려가는가 했더니 브래지어의 훅 부분에 드레스의 실밥이 엉켜 내려가지 않는 것이었다.

16550880487446.jpg“그…… 속옷에 옷 실밥이 걸린 것 같은데, 잠깐 풀게.”

1655088048746.jpg“뭐?! 뭐, 뭘 푼다고?!”

16550880487446.jpg“진짜 흑심 하나도 없이 선량한 마음으로, 도 닦는 마음으로 풀게.”

1655088048746.jpg“…….”

16550880487446.jpg“그냥 강아지 옷 벗겨주는 느낌으로.”

1655088048746.jpg“……지금 내가 멍멍이라는 거야?”

16550880487446.jpg“그만큼 흑심이 없다는 걸 강조하는 거지.”

물론 마음속은 어두컴컴하다 못해 음험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지만 겨울에게는 절대 비밀이었다. 시후는 연분홍색 브래지어의 훅 부분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입안에 갈증이 일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실밥이 얽힌 부분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훅의 고리가 풀리고 등 뒤로 해방감이 느껴지자 겨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리고 지퍼를 마저 허리까지 내린 시후의 가슴은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달콤한 살 냄새가 더욱 진해지며 코끝을 간지럽혔고, 새하얀 등은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1655088048746.jpg“됐어?”

16550880487446.jpg“아, 그게…… 잠깐만.”

시후는 저도 모르게 브래지어의 훅을 도로 잠가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겨울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타이트한 압박감에 화들짝 놀라 새된 비명을 질렀다.

1655088048746.jpg“으악!”

16550880487446.jpg“어?”

1655088048746.jpg“그, 그건 내가 할 테니까 나가봐.”

16550880487446.jpg“아…… 그래. 미안.”

두 사람은 세상 어색하게 뚝딱거렸다. 어리숙하게 방 밖으로 나온 시후는 깊은숨을 뱉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머리는 술에 취한 듯 혼미했고 심장은 발작하듯 뛰었다. 손에 남은 따뜻하고 포근한 속옷의 촉감에 하릴없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16550880487446.jpg“하…….”

하얀 살결에 무작정 입술을 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겨울은 날마다 예뻐져만 가고, 마음은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게 날이 갈수록 힘들었다. *** 일요일 오후가 되어 자선 파티에 갈 준비를 마친 시후는 겨울이 샵에서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는 동안 차 안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하릴없이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김없이 달갑지 않은 전화가 걸려왔다.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아버지’ 세 글자에 미간을 좁힌 시후가 입술을 짓씹었다. 근 며칠 연락을 계속해서 무시했는데, 오늘도 받지 않았다가는 괜한 사달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16550880683185.jpg-강시후.

통화 버튼을 꾹 누르자 듣기 싫은 목소리가 고막을 찔러왔다.

16550880683185.jpg-너 오늘 민주와 태림에서 주최하는 자선 파티에 간다던데, 사실이냐?

어디서 또 이상한 이야기를 주워들은 건지, 피곤한 눈꺼풀을 닫았다가 연 시후가 씹듯이 발음했다.

16550880487446.jpg“왜 다들 제가 오민주와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16550880683185.jpg-작년까지는 그 애와 함께 다녔었잖아.

16550880487446.jpg“그거야 결혼 전 이야기죠. 아내가 있는데 제가 왜 다른 여자를 데려갑니까?”

16550880683185.jpg-말은 잘하는구나. 그래 봐야 지금껏 네 와이프 데리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적 없는 거 안다.

성호의 비웃음이 뒤를 이었다.

16550880683185.jpg-너도 실은 그 물건이 망신스러운 거 아니냐? 그러니까 남들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거고.

시후가 헛숨을 터뜨렸다. 물론 그동안 공식적인 행사에 겨울과 동행한 적이 한 번도 없기는 했었다. 겨울이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허울뿐인 쇼윈도 부부였으니까. 그녀에게 아내로서의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16550880683185.jpg-너희 요즘 이상한 소문 돌고 주변에서 말이 많던데.

성호가 목소리를 무겁게 내리깔며 물었다.

16550880683185.jpg-드디어 그 계집애와 이혼하려는 생각이냐?

나지막한 물음에 시후의 숨이 우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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