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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혼란 (38/112)

38. 혼란2022.02.09.

16550880779552.jpg-너희 요즘 이상한 소문 돌고 주변에서 말이 많던데. 드디어 그 계집애와 이혼하려는 생각이냐?

성호의 말에 미간을 좁힌 시후가 씹듯이 숨을 뱉었다.

16550880779552.jpg-차라리 민주가 낫지, 그러게 어디 재수 없는 계집애는 데려와서…….

16550880779563.jpg“쓸데없는 말씀 하실 거면 끊겠습니다.”

16550880779552.jpg-뭐야? 이 버릇없는 놈이……!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시후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액정이 꺼진 휴대전화를 내린 시후의 입술 틈으로 야트막한 한숨이 흘렀다. 일순 피곤이 몰려오자 지그시 눈을 눌러 감은 시후가 고개를 들었다. 겨울에게 이제 내려간다는 문자를 받은 시후가 차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또각또각 단정한 구두 소리와 함께 겨울이 시후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조금 머쓱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걸어오는 겨울을 본 시후는 잠시 넋을 놓았다. 굵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를 반 묶음 한 헤어스타일은 겨울의 하얀 목선과 눈이 시리도록 잘 어울렸다. 새초롬한 눈매와 아찔하게 올라간 속눈썹, 오뚝한 코와 복사꽃 빛의 입술이 시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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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880779563.jpg“예쁘다…….”

시후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중얼거렸다.

16550880779563.jpg“역시 남들 보여주기 아까운데.”

16550880779592.jpg“……음소거 찬스 또 쓰기 전에 출발이나 해.”

그 말에 괜히 창피해진 겨울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픽 웃은 시후는 조수석 문을 열어 겨울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겨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차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겨울은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시후를 흘끗 바라보았다. 깔끔한 블랙 슈트를 차려입은 시후는 평소보다 배는 더 우월한 외모를 자랑했다. 셔츠 단추를 전부 꼼꼼히 잠갔는데도 워낙 체격이 큰 탓에 섬유 속 근육은 가려지지 않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시후를 빤히 바라보던 겨울은 이내 제 행동에 흠칫 놀라 서둘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회장을 고상한 클래식이 웅장하게 휘감았다. 태림그룹 주명길 회장의 아내인 이자은이 주최한 소아암으로 투병 중인 아동을 위한 자선회에는 각종 정·재계의 인사들이 한데 모여 얼굴도장을 찍기 바빴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겨울은 이렇게 격식 있는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긴장이 몰려왔다. 실수해서 놀림거리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16550880779596.jpg“아, 강 대표. 왔어요?”

주최자인 이자은이 웃으며 시후를 맞이했다.

16550880779563.jpg“안녕하세요, 사모님. 뜻깊은 자리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6550880779596.jpg“아니에요. 와 줘서 영광일 따름이죠. 그런데…… 이쪽이 그 소문의 아내분?”

16550880779563.jpg“네. 맞습니다. 제 아내입니다.”

힐끔 겨울을 바라본 자은이 웃으며 손을 건넸다.

16550880779596.jpg“반가워요. 처음 뵙네요.”

……소문의 아내? 대체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건가. 겨울은 조금 찜찜했으나 환하게 웃으며 정중히 악수 요청을 받았다.

16550880779592.jpg“안녕하세요. 함겨울이라고 합니다.”

겨울은 동시에 제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꺼림칙한 시선을 느꼈다.

16550880779596.jpg“어쩜 이렇게 미인이에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상상 이상의 미모네요.”

16550880779563.jpg“네. 안 예쁜 구석이 없죠.”

16550880779596.jpg“강 대표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정말.”

16550880779563.jpg“한창 신혼이니까요.”

능청스러운 시후의 대답에 자은이 싱긋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16550880779596.jpg“역시 소문은 그냥 소문인가 보네…….”

작은 속삭임이었으나 똑똑히 들은 겨울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아까부터 무슨 소문을 이야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16550880779596.jpg“근데 민주 씨는 오늘 안 오나 봐요? 오랜만에 보고 싶었는데. 매년 같이 왔었잖아요, 둘이.”

그 말에 시후가 표정을 굳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후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뒤에서 옥구슬처럼 높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880838671.jpg“저도 왔어요, 사모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겨울의 시야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들어찼다. 손바닥으로 다 가려질 만큼 자그마한 얼굴에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올라간 눈꼬리와 작고 붉은 입술의 조화에 입이 절로 툭 벌어졌다. 세상 혼자 사는 듯한 화려한 미모였다. 칼처럼 날카롭게 잘린 붉은 단발머리를 한쪽만 귀 뒤로 넘긴 그녀는 도도한 얼굴과 달리 생글생글 애교스럽게 웃었다. 텔레비전에서 익히 보던 얼굴이었지만, 겨울의 기억 속에서는 첫 만남이었다.

16550880779596.jpg“어머, 민주 씨 왔어요?”

16550880838671.jpg“네, 안녕하셨어요. 사모님.”

현재 태림의 광고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민주는 이번 자선회 역시 당연하게 초대받았다. 시후에게 파트너 제안을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의 물러남도 없이 당당하게 회장에 들어선 것이었다.

16550880838671.jpg“시후도 안녕?”

시후에게 눈짓한 민주의 눈동자가 매끄럽게 굴러 겨울에게로 향했다.

16550880838671.jpg“그리고 겨울 씨는…… 오랜만에 보네요.”

16550880779592.jpg“…….”

16550880838671.jpg“아마 결혼식 이후 처음이죠?”

겨울에게는 기억에도 없는 결혼식이었다. 그렇기에 민주와는 엄연히 초면이었지만, 그녀에게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티 내서는 안 됐다.

16550880779592.jpg“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겨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자 민주가 빨간 입술 한쪽을 들어 올렸다. 분명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어딘가 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6550880838671.jpg“아, 때마침 지금 오네요.”

뒤를 돌아본 민주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신과 함께 온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16550880838671.jpg“오늘 저와 같이 온 일일 파트너예요.”

그 말에 고개 돌린 겨울의 동공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그 옆의 시후도 적잖이 놀란 듯 숨을 멈추었다.

16550880838671.jpg“사모님도 아는 얼굴이시죠?”

민주의 말에 자은이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16550880779596.jpg“어머, 이게 누구야. 박주형 군 아니야?”

주형은 생각지도 못한 겨울과 시후와의 만남에 놀라 잠시 머뭇거렸다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16550880866699.jpg“안녕하세요, 사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16550880779596.jpg“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네. 여기까지 찾아와주고 정말 고마워. 아버지는 건강하시지?”

16550880866699.jpg“네. 뭐, 늘 똑같으시죠.”

16550880779596.jpg“오랜만에 보니까 더 멋있어졌네. 민주 씨와는 혹시, 교제하는 사이?”

16550880866699.jpg“아니요. 그냥 부모님들께서 친분이 있으시다 보니 오늘 같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주형은 확실히 선을 그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겨울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주형을 가만히 응시했다. 희수와 더불어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부할 수 있는 주형이 오민주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더불어 태림그룹의 안주인인 이자은이 그를 알아본다는 것은 주형이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충격에 뒤흔들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하는 겨울을 보며 주형은 난처하게 입안을 한번 쓸었다. 어머니에게 치과 개업 비용을 투자받는 조건으로 오늘 이 내키지 않는 자선회를 부모님 대신 참석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겨울과 시후를 맞닥뜨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시후와 겨울, 민주와 주형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읽지 못한 자은은 신나게 웃으며 떠들어대다가 다른 방문객을 응대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주형은 넋이 나간 듯 보이는 겨울의 손을 살짝 움켜잡았다.

16550880866699.jpg“저기, 겨울아,”

시선이 마주쳤으나 겨울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16550880779592.jpg“주형이 네가 여긴 어떻게…….”

16550880866699.jpg“놀랐지. 내가 다 설명할게.”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며 겨울의 손을 끌어당기자 시후의 미간이 세차게 좁아졌다. 곧바로 겨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은 시후가 제 품으로 겨울을 끌어당기자 주형의 손은 자연스럽게 나가떨어졌다.

16550880779563.jpg“이런 자리에서 남의 아내 손을 함부로 잡는 건 무례한 것 같은데요.”

음절을 자르듯이 힘주어 말한 시후는 낮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16550880779563.jpg“그쪽 파트너나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씹듯이 뱉은 시후가 차가운 얼굴로 겨울에게 손대지 말라며 경고했다. 차게 입가가 식은 주형은 하릴없이 주먹을 꾹 쥐며 시후를 노려보았다. 그런 주형과 겨울, 시후를 번갈아 보던 민주의 눈동자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 바쁘게 굴렀다.

16550880779563.jpg“그럼 이만.”

나지막이 읊조린 시후는 겨울과 함께 뒤를 돌았다.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겨울은 도무지 혼란을 지우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었다. 무려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주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오민주와 파트너라니.

16550880779563.jpg“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시후는 겨울과 함께 회장의 구석으로 향해 걸으며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0880779592.jpg“……응. 좀 놀랐을 뿐이야.”

16550880779563.jpg“그런데 박주형 씨가 오민주와 아는 사이였어?”

16550880779592.jpg“나도 몰랐어. 주형이는 그냥 오래된 친구였는데…….”

시후가 겨울의 허리를 감싼 손을 어깨로 올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16550880779563.jpg“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 중에 평범한 집안의 사람은 없어.”

16550880779592.jpg“…….”

16550880779563.jpg“박주형 씨가 너에게 비밀로 한 게 있는 거지”

겨울이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짚자, 시후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16550880779563.jpg“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인사해야 하는데, 힘들면 말해.”

16550880779592.jpg“괜찮아. 내가 오겠다고 한 거잖아.”

충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자마자 곧바로 시후의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가 반갑게 두 손을 맞잡으며 인사해왔다.

16550880779596.jpg“이게 누구야, 강 대표 아니야!”

16550880779563.jpg“주 회장님, 반갑습니다.”

16550880779596.jpg“그래요, 그래. 오랜만이에요.”

16550880779563.jpg“오늘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시후가 손짓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겨울이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16550880779592.jpg“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함겨울이라고 합니다.”

  교양 떨기 바쁜 사람들의 틈에서 겨울은 불편한 이브닝드레스 자락을 끌며 생전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들과 수없이 인사를 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처한 건 결혼식 날 봤었다고 반갑게 인사해오는 사람들이었는데, 겨울에게는 결혼식의 기억이 없었으니 대답하기도 쉽지 않았다. 온 신경을 쏟았더니 금방 피로가 몰려온 겨울은 시후에게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도피하듯 자리를 피했다.

16550880779592.jpg“하아…….”

계속해서 샴페인을 권해오는 사람들 때문에 취기가 녹녹하게 올라왔고 얼굴에는 열기가 모였다. 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린 겨울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높은 구두에 옥죄인 발이 욱신거렸고, 알 수 없는 상황들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물줄기가 끊기고 작은 타월로 손을 닦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를 찔러왔다.

16550880779596.jpg“어머, 이게 누구야?”

고개를 돌리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두 눈에 담겼다.

16550880779596.jpg“여기서 또 보네?”

한승희였다. 어렸을 때 겨울을 지독하게 괴롭히고서도 모자라, 얼마 전 클럽에서 겨울에게 유치한 짓거리까지 하려고 했던 인물. 입가가 싸늘하게 굳은 겨울이 승희를 노려보았다.

16550880779592.jpg“네가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16550880779596.jpg“나야 엄마 대신 왔지. 넌 네 남편 따라왔니?”

부유한 중소기업 대표의 딸인 승희는 일정상 참여하지 못하는 부모 대신 얼굴을 비추기 위해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것이었다.

16550880779592.jpg“피차 말 섞기 불편한 사이 같은데, 신경 끄고 갈 길 가.”

16550880779596.jpg“그럴 수는 없지.”

네 속 뒤집어 놓는 게 내 재미인데. 승희가 나지막이 웃으며 뒷말을 중얼거렸다.

16550880779596.jpg“너도 대단하다. 다들 말은 안 해도 뒤에서 엄청나게 손가락질할 텐데, 뻔뻔하게 잘도 왔네?”

16550880779592.jpg“또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승희는 낮게 웃으며 겨울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16550880779596.jpg“집안 망하고 거지 된 년이, 몸으로 들이대서 남편 꾀었다고 말이야.”

16550880779592.jpg“…….”

16550880779596.jpg“그리고 요즘 너, 주변에 소문 파다해. 남편하고 곧 이혼할 예정이라고.”

키득거리며 붉은 입술을 들어 올린 승희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황당함에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입가가 싸늘하게 구겨졌다.

16550880779592.jpg“네가 만들어낸 소문 아니고?”

두 눈을 번뜩인 겨울이 승희에게 차갑게 묻자 승희가 비소를 흘렸다.

16550880779592.jpg“한승희, 너 따위와 말 섞는 시간이 아까워. 역겨우니까 다시는 아는척하지 마.”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겨울이 뒤를 돌아 화장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16550880779596.jpg“네 남편.”

그 순간 승희의 목소리가 등 뒤로 쏟아졌다.

16550880779596.jpg“오민주하고 호텔에서 사진 찍힌 건 아니?”

일순 발목이 묶인 듯 겨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갈색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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