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예의 없이2022.02.13.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겨울이 뒤를 돌아 화장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네 남편, 오민주하고 호텔에서 사진 찍힌 건 아니?”
승희의 말에 일순 발목이 묶인 듯 겨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갈색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미세한 동요를 눈치챈 승희가 여유롭게 웃으며 또각또각 세면대로 향했다. 한바탕 폭탄을 던진 사람답지 않게 태연하게 수돗물을 튼 승희가 가볍게 손을 씻으며 웃었다.
“일전에 호텔에서 사진 찍힌 거, 대대적으로 기사화될 뻔한 걸 네 남편이 돈으로 겨우겨우 막았다던데.”
씩 입꼬리를 들어 올린 승희가 거울 속에 비친 겨울을 흘긋 보았다.
“뭐, 그래 봐야 이 바닥에 비밀이 어디 있어?”
……지금 무슨 헛소리를. 겨울의 미간이 고요하게 구겨졌다.
“찌라시 도는 걸 막을 수는 없는 법이지.”
아까부터 어딘가 싸하게 느껴지던 시선은 기분 탓이 아니었던 건가. 한승희의 말을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민주와 함께 호텔에서 사진이 찍혔다니……. 대체 언제? 내가 기억을 잃기 전? 혼란스러움이 머리를 순식간에 잠식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꺼풀을 보며 승희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 자랑거리라고는 잘난 남편이 전부인데, 이혼까지 당하면 불쌍해서 어떡하니?”
비릿한 조소가 떨어지자 울컥 감정이 치받쳐 오른 겨울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떻게 해서든 겨울의 위신에 생채기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난 건 변함이 없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지금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는 완전히 바보가 될 뿐이었다.
“넌 되게 재밌나 봐.”
“……뭐?”
“남 깎아내리면서 자기 자존감 바닥인 거 광고하는 게.”
“하……! 뭐라고?!”
헛숨을 터뜨린 승희의 입매가 형편없이 뒤틀렸다. 그 균열을 바라보며 겨울은 흔들림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내가 지금 네 행동을 봐주는 건…….”
겨울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오늘 이 자리가 우리 남편한테 중요한 자리라서 그래.”
“…….”
“두 번은 없어.”
차갑게 쏘아붙인 겨울은 경고하듯 승희를 노려보았다. 주춤 수그러든 기세로 말없이 겨울을 바라보는 승희에, 겨울은 곧바로 걸음을 돌려 화장실 밖을 나섰다. 또각, 또각, 구두 굽으로 홀의 바닥을 누르며 걷는 겨울의 걸음에 한껏 힘이 실렸다. 승희에게서 벗어나자마자 감정이 폭발하며 내면의 무언가가 뒤틀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강시후와 오민주가 함께 호텔에 갔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덜컥 믿는 것은 아니었다. 사고 후 깨어난 뒤 지금까지 약 한 달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시후는 그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는 듯한 낌새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이라면? 한 달보다 이전의 기억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주변인들의 말로는 우리가 서로 죽고 못 사는 잉꼬부부라고 했지만, 실상은 어땠을지 오로지 강시후만 알고 있을 터였다. 속이 답답하고 뇌가 욱신욱신 뒤틀리는 기분에 겨울은 잇새를 악물었다. 악으로 버티며 시후에게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 멀리 흐릿해진 시야로 함께 나란히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후와 민주가 보였다. 모델처럼 늘씬하고 키가 큰 민주와 180센티를 훌쩍 넘기는 장대한 체격의 시후는 꼭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민주는 구김살 하나 없이 웃으며 갖은 교태로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싹싹하고 애교스러운 미소가 제 눈에도 저토록 예쁘게 보이는데, 강시후의 눈이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네 남편, 오민주하고 호텔에서 사진 찍힌 건 아니?’
한승희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겨울은 심장이 욱신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숨이 턱 틀어막히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어차피 다음 주면 함께 이혼 서류를 제출하러 가기로 한 사이였다. 곧 남이 될 사이에 이런 문제로 시끄럽게 구는 건 피차 좋지 않을 터였다. 다 아는데……. 정말 다 아는데.
“아…….”
일순 몰려온 취기와 현기증으로 인해 겨울이 중심을 잃고 살짝 비틀거렸다. 얇은 굽이 바닥으로 미끄러지고 경직된 겨울의 몸이 휘청이는 찰나였다. 잘록한 허리로 감기는 단단한 손길이 겨울의 여린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놀란 겨울이 눈꺼풀을 가파르게 들어 올리자 익숙한 갈색 눈동자에 시선이 닿았다.
“괜찮아, 겨울아? 샴페인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주형이 걱정 담긴 눈으로 겨울을 응시하며 조금 열감이 오른 뺨을 가볍게 쓸었다. 동시에 그 모습을 발견한 시후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었다. 굳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시후에 흠칫한 겨울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주형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반동에 의해 옆에서 샴페인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지나가던 홀 직원과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충격으로 직원이 들고 있던 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속절없이 쏟아진 샴페인은 겨울의 드레스 위를 흠뻑 적셨다.
“앗,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제가 실수한걸요.”
당황한 직원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자 겨울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슴께로 축축한 감각이 일긴 했지만, 많이 젖은 건 아니었기에 닦아내면 충분히 수습 가능했다.
“겨울아, 일단 급한 대로 이거라도…….”
주형이 곧바로 제 재킷을 벗어 겨울에게 덮어주려 하는 찰나였다. 성큼 다가온 시후가 먼저 자신의 재킷으로 겨울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았다.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가자 겨울의 몸이 시후에게로 밀착했다.
“어지러워 보이는데. 바람 좀 쐴까?”
“어? 아니야. 괜찮아.”
살짝 당혹감이 몰려온 겨울이 입술을 말아 삼켰다. 말투는 다정한 듯했으나,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경직되어 있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한 바람에 화가 난 건가? 알 수 없었다. 겨울은 심장 한쪽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보는 눈도 있으니 허리를 붙잡은 손을 놓아줬으면 했는데, 그는 오히려 더욱 진하게 팔을 감아 당길 뿐이었다.
“…….”
겨울과 시후 앞에서 주형은 하릴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찰나의 순간 무거워진 공기와 함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와 긴장을 단번에 읽은 민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살풋 웃음을 터뜨린 민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열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민주는 겨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얼른 드레스 얼룩부터 닦아야지. 안 그래요, 겨울 씨?”
“……네, 그래야죠.”
“내가 도와줄게요. 같이 가요.”
그 말에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싱긋 웃어 보인 민주가 겨울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하려고 했으나, 그녀를 붙잡은 시후의 손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시후 네가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오게?”
픽 실소한 민주가 작게 핀잔을 놓자 그제야 시후의 팔이 떨떠름하게 멀어졌다. 그런 시후를 흘끗 본 겨울이 어색하게 걸음을 떼었다.
“제가 혼자 해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봐요.”
민주는 고집스럽게 핸드타월에 물을 묻혀 겨울의 드레스에 묻은 샴페인 자국 위를 문질렀다. 그 손길이 못 견디게 불편해서 겨울은 좀처럼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드레스는 시후가 골라준 거예요?”
민주는 문득 대수롭지 않게 물어왔다.
“네. 맞아요.”
“역시…….”
부드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민주가 고개를 까딱했다.
“예쁘네요. 자칫하면 칙칙하게 보일 수 있어서 소화하기 어려운 컬러인데, 겨울 씨 피부 톤이 워낙 하얘서 그런지 정말 잘 어울려요.”
“과찬이세요. 감사합니다.”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 입안이 썼다. 칭찬을 순수하게 칭찬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조금 전 한승희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딘가 깔보는 듯한 눈빛과 여유만만한 표정에서 겨울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진 탓이었다.
“시후가 워낙 안목이 좋잖아요.”
“네, 맞아요.”
“작년에 같이 파티 왔을 때도 시후가 제 드레스까지 골라줬었거든요. 센스가 어찌나 좋던지.”
흘리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시후의 안목을 칭찬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작년까지 시후의 파트너는 자신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의 옆자리는 자신이었으며, 너는 굴러 들어온 돌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부서지듯 숨을 터뜨린 겨울은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겨울로부터 대답이 없자 민주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태연자약하게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겨울 씨랑 나는 가만 보면 너무 서로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거리감이요?”
“네. 겨우 두 살 차이잖아요, 우리. 편하게 말 놓을까요? 언니라고 불러도 좋고.”
가늘게 뜬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속삭이는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빨간 색을 띠고 있었다. 꺼림칙한 기분에 겨울의 미간이 소리 없이 조여들었다.
“내가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평범한 일반인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평범한 일반인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며 발음하는 모습에 겨울의 입술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마치 넌 특별하지 않고, 그저 발에 채도록 많고 많은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 중 하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친구 할래요?”
속이 빤히 보이는 유치한 수작이었다. 어이가 없어 헛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겨울은 저도 모르게 삐딱해지려는 입술 끝을 애써 들어 올렸다.
“글쎄요. 남편의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신 분을 그렇게 예의 없이 부를 수는 없죠.”
“어머, 나랑 시후는 비즈니스 관계이기 전에 오랜 친구예요. 그리고 겨울 씨도 알겠지만, 제가 넥스트 게임즈 창업 멤버였기도 하고요.”
“아, 그런가요? 남편이 오민주 씨 얘기는 딱히 전한 적이 없어서 미처 몰랐네요.”
조금도 기죽지 않고 태연하게 응수하자 미소를 짓고 있던 민주의 입가가 살며시 구겨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이제 보니 겨울 씨, 생각보다 선을 잘 긋는 사람이네요.”
“네. 오민주 씨는 기껏 그어 놓은 선을 굳이 넘으려는 타입이시고요.”
순식간에 싸하게 얼어붙은 분위기와 함께 적막이 흘렀다. 민주가 입술을 일 자로 다물자 고요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말없이 겨울의 드레스의 얼룩을 마저 닦아준 민주는 젖은 타월을 수거함에 던지듯 버리며 세면대 물을 틀었다.
“아, 맞다.”
민주가 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내 세면대 옆에 올려놓았다.
“반지도 안 빼고 손 닦을 뻔했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흘긋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의 동공이 일순 거칠게 뒤흔들렸다. 숨을 죽인 겨울의 눈이 한계까지 띄어졌다.
‘……저 반지…….’
겨울의 목덜미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설마 내 결혼반지?’
강시후의 왼쪽 약지에 항상 단정하게 끼워져 있던 반지가 불현듯 떠오르며 겹쳐졌다. 오민주가 끼고 있는 반지는 틀림없이 겨울의 결혼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