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어린아이2022.02.16.
“아, 맞다.”
민주가 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내 세면대 옆에 올려놓았다.
“반지도 안 빼고 손 닦을 뻔했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흘긋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의 동공이 일순 거칠게 뒤흔들렸다. 숨을 죽인 겨울의 눈이 한계까지 띄어졌다.
‘……저 반지…….’
겨울의 목덜미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설마 내 결혼반지?’
강시후의 왼쪽 약지에 항상 단정하게 끼워져 있던 반지가 불현듯 떠오르며 겹쳐졌다. 오민주가 끼고 있던 반지는 틀림없이 겨울의 결혼반지였다.
‘……이 여자가 저 반지를 왜 갖고 있는 거지?’
겨울은 얼굴 밖으로 드러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항상 시후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결혼반지를 볼 때면, 자신의 반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답답했는데……. 이렇듯 상상도 못 한 장소에서 더욱 생각지 못한 사람의 손에서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혼란스러움이 몰려오자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분명히 한 달 전 교통사고를 당한 직후 깨어났을 때, 겨울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았고, 겨울은 그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했었다.
‘설마…… 교통사고 후 일어났을 때, 내가 반지를 안 끼고 있었던 건 저 여자 때문인 건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오민주가 갈등의 원인이 되어 감정이 상해 반지를 뺐을 거라는 가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반지가 그녀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으니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대체 왜 오민주의 손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는 건지, 두 사람은 대체 어떤 관계인 건지…….
“뚫어지겠어요. 뭘 그렇게 봐요?”
민주의 입술 끝에는 미세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더 이상 혼자 판단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겨울이 무작정 입술을 벌렸다.
“그 반지, 오민주 씨가 어떻게 갖고 있는 거죠?”
“음? 이거요?”
타월에 젖은 손을 닦은 민주가 제 왼손 약지에 다시금 반지를 밀어 넣었다.
“기억 안 나요? 이거 시후가 나한테 준 거잖아요.”
민주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그 꺼림칙한 곡선에 겨울의 입매가 매서워졌다.
“글쎄, 나이 서른 먹고 유치하게 우정 링을 선물하지 뭐예요.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어요. 그렇죠?”
웃음 섞인 숨을 뱉은 민주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설마 이거 가지고 시후한테 가서 뭐라고 할 건 아니죠?”
“…….”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남자들은 귀찮게 따지고 드는 여자를 싫어하거든.”
민주는 눈에 띄게 굳은 겨울의 표정을 보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특히나 겨울 씨처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 된 여자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
“그건 하루아침에 다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남편 눈치 잘 보고 살아야죠?”
어떻게 해서든 혀를 독하게 놀려 겨울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저열한 의도가 읽혔다.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자 겨울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동생 같아서 조언하는 거예요.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며 내려다보는 시선에 뚜렷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싸늘한 눈매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곱게 휘며 곱상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반지가 끼워져 있는 왼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넘기며 뒤를 돌았다. 겨울은 애써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솔직히 인정한다. 강시후에게는 저보다 오민주가 더 잘 어울리는 여자일 지도 몰랐다. 유명한 여배우답게 늘씬하고 키도 큰 그녀는 외형적 결점이 하나도 없었고, 평생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애교스럽고 싹싹한 성격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문득 밀려오는 열등감에 겨울의 가슴이 욱신거렸으나, 겨울은 꿋꿋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벌렸다.
“오민주 씨는 저와 남편 사이에 관심이 되게 많으신가 봐요.”
차갑게 한 음절씩 씹듯이 발음하자 민주의 한쪽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오지랖과 관심은 한 끗 차이에요. 오민주 씨가 최소한의 선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을게요.”
더 이상의 무례에 관용을 베푸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경고하듯 뱉은 겨울은 한 대 얻어맞은 듯 가만히 서 있는 민주의 어깨를 툭 치고 화장실 밖으로 또각또각 걸어 나갔다. 제 뒤를 따라 들어오는 민주를 느끼며 때마침 저 멀리 테라스에 서 있는 시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뒤에서 쏟아지는 민주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겨울은 살며시 유리문을 밀고 시후에게 다가갔다.
“여보.”
생소한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며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눈웃음 짓는 겨울에 조금 놀란 시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겨울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응, 여보. 드레스는 괜찮아? 불편하지 않아?”
“닦아서 괜찮아. 걱정하게 했네.”
겨울은 제게 가깝게 접근한 시후의 얼굴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고개를 치켜들고 보란 듯이 키스할 것처럼 얼굴을 가깝게 했다. 민주와 주형을 포함한 홀 안의 많은 사람이 겨울과 시후를 주목한 가운데, 겨울은 세상 행복한 여자처럼 웃으며 시후를 올곧게 올려다보았다. 흘긋 동공을 돌리자 형편없이 일그러진 오민주의 얼굴이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다. 소리 없이 조소한 겨울은 다시 고개를 들어 시후와 눈을 마주했다. 주변에서는 소문과 달리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겨울과 시후 부부를 보며 바쁘게 술렁이는 듯했다. 그럴수록 겨울은 더욱 예쁘게 웃으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내인 척 연기했다. 진실이야 어쨌든, 더 이상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그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건 이제 질색이었으니까. 자선 파티가 끝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차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적막하고 고요했다. 겨울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빛 한 줄기 없는 어둑한 밤하늘처럼 지금 제 상황은 암흑 그 자체였다. 얕보이고 싶지 않아 오늘 하루 동안 행복한 부부인 척 행동했으나, 실상은 곧 이혼할 사이였다. 그토록 바랐던 이혼이지만, 그와 헤어지게 되면 주변에서 쏟아질 시선과 손가락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와의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는데, 어차피 8년 뒤의 미래에 그와 겨울은 무조건 이혼할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던 8년 뒤 미래의 강시후의 태도를 떠올린 겨울이 작게 한숨을 지었다.
‘그나저나…….’
오민주와 호텔에서 찍혔다는 사진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가 네 번째 손가락에 매번 끼고 있는 반지는 정말로 오민주와 함께 맞춘 반지인 건가. 만약 우정 링이 아니라 결혼반지가 맞다면 왜 그녀가 갖고 있는 걸까. 답답한 문제투성이였으나 겨울은 이 질문을 시후에게 하기가 두려웠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상처받는 건 겨울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차피 우리는 곧 헤어질 사이. 이제 그만 시답잖은 놀이를 그만둘 때가 되었다.
“……혹시 파티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부터 유독 제게 차갑게 구는 겨울을 보며, 시후가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내 얼굴 보고 얘기해.”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잠근 그가 겨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직선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겨울은 제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
다시금 물어오는 말에 겨울의 목 안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힘겹게 열리지 않는 입술을 벌린 겨울은 한껏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있어.”
심장에 날붙이가 날아와 찍히는 느낌이었다.
“이혼 서류, 다음 주 수요일에 제출하러 같이 가.”
“…….”
“그때 시간 낼 수 있지?”
핸들을 쥔 시후의 손에 고요하게 힘이 들어갔다. 까만 동공이 거칠게 뒤흔들리는 것을 보며 겨울은 허벅지 위에 말아쥔 주먹을 웅크렸다. 시후는 한참 동안 말없이 겨울을 바라만 보았다. 찰나가 억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흐르고,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시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시간 낼게.”
***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으나 겨울은 쉬이 눈이 감기지 않았다. 온종일 있었던 수많은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겹쳐져 몇 번이고 재생되는 탓이었다.
“하…….”
끔찍하게도 머릿속에서 맴돌아 떠나지 않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더불어, 이제는 잘려나간 1년의 기억마저 흉기가 되어 겨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사방이 적이었고,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고, 다 터놓고 의지할 사람은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다. 근래 솔직한 심정으로 조금 마음이 흔들렸던 강시후마저도 이제는 마음 놓고 신뢰할 수 없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게 했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용납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과는 했지만, 그는 과거에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설명은 하지 않았다. ……한 번 버렸던 사람이, 두 번은 버리지 못할까. 울컥 감정이 치받쳐 올라온 겨울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에서 신뢰가 피어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 이상 관계를 진척시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를 또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리고 또 배신당해 버려지게 되면, 그땐 정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하는 거야…….”
깊게 한숨을 내쉰 겨울이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촉촉하게 서린 물기를 닦아낸 겨울이 몸을 작게 웅크리며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 시후는 자선 파티 이후 겨울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저와 눈을 마주치는 횟수도 한참 줄었고, 표정도 내내 어두웠으며 말도 잘 섞지 않았다. 제가 실수한 것이 있었나 곰곰이 돌이켜보아도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어 속이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겨울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어느덧 함께 이혼 서류를 제출하러 가기로 약속한 수요일이 되었다. 시후의 차를 타고 법원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묵직한 적막은 법원에 도착하기 직전, 겨울이 입을 열며 조심스럽게 깨졌다.
“오늘 서류 제출하고, 한 달 후에 법적으로 남남 될 때까지는 주변에 비밀로 할 거지?”
“응. 그렇게 해주면 좋겠는데.”
“그래. 어차피 그때까지는 같이 살 테니까…….”
법원 주차장에 부드럽게 차를 주차한 시후는 차에서 내리기 전, 겨울을 말없이 가만히 응시했다. 뜨겁게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마 피할 수 없어 흔들리는 동공으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겨울아.”
시후는 동요하는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겨울의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이 욱신거렸다.
굳게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시후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