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내가 네 옆에 있잖아2022.02.20.
“겨울아.”
시후는 동요하는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겨울의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이 욱신거렸다. 굳게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시후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나는…….”
까만 눈동자로 열기가 몰려드는 것을 겨울은 가만히 응시했다. 두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겨울은 시후의 뒷말을 한참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조용한 공기만이 하릴없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니야.”
결국 시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
가방을 쥔 겨울의 손에 작게 힘이 들어갔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겨울은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 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하고 차로 돌아온 시후와 겨울은 서로 말이 없었다. 적막한 차 안으로는 들끓는 엔진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릴 뿐이었다. 이제 법적인 부부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한 달, 이혼숙려기간이 전부였다. 겨울은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지우지 못해, 명치에 무언가가 틀어막힌 듯 속이 답답했다. 흘끗 고개 돌려 시후를 바라보니 그는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겨울의 눈동자 안으로 파동이 일렁이며 거칠게 흔들렸다. 작게 한숨이 흐르고 입술을 소리 없이 말아 삼켰다.
“집으로 갈 거지?”
정적을 깨뜨린 것은 시후의 나지막한 물음이었다.
“응. 쉬는 날이니까. 오빠는 회사 가야 하지?”
“그렇지. 근데 집에 서류를 놓고 와서 잠깐 들렀다가 가야 할 것 같아.”
“그럼 집으로 가자.”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짧은 대화가 오가고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금 적막이 가득 찼다. 붉은 신호 앞에서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잠근 시후가 겨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시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남은 한 달 동안, 부부로서 잘 부탁해.”
“……응, 나도.”
왠지 저 새까만 동공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시트에 경직된 등을 기댄 겨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겨울과 시후는 함께 차에서 내렸다.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른 겨울은 20층을 누르고 가만히 계기판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조심스럽게 닫히고 겨울은 뻐근한 감각이 몰려오는 제 눈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
그 순간 덜컹, 하는 굉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크게 진동했다. 놀라 휘청인 겨울의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당황한 겨울이 6층에서 멈춰 있는 빨간색 숫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손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여러 번 연속해서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는 문이 열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 같은데…….”
“그러게. 잠시만 기다려봐.”
때아닌 불운에 시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 뒤 침착하게 긴급호출 버튼을 눌렀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춰서요. 지금 안에 갇혀 있습니다.”
-아,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직원에게 조처를 할 수 있도록 지시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빨리 부탁드립니다.”
시후는 겁을 먹은 듯 금색 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 떨고 있는 겨울을 보며 낮게 말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것을 보며 시후의 한쪽 눈썹이 내려앉았다.
“괜찮아?”
겨울의 어깨를 살짝 감싸며 묻자 그녀가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너저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지금 겨울은 갑작스럽게 몰려오기 시작한 공황 증상 때문에 진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숨이 턱 막혔다. 덜컹!
“꺄악!”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다시금 거세게 진동하며 겨울과 시후의 몸이 휘청거렸다. 빠르게 아래로 추락하는 감각과 함께 시후는 반사적으로 겨울의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쾅! 거세게 파열하는 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겨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결국 두 다리의 중심이 무너지고 힘이 풀린 겨울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밀폐된 공간에 주홍의 화염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심장이 발작하듯이 내달리고 숨이 턱 틀어 막혔다.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보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창고의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손이 부서지라 창고 문을 두드렸으나 밖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고, 공기를 태우고 있는 화염의 악독한 냄새에 겨울의 의식은 손쓸 새도 없이 달아났었다. 12년 전 밀폐된 창고에 갇혔던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겨울의 뼛속이 차갑게 떨렸다. 겨울은 손발을 벌벌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겨울아.”
낮게 씹듯이 부르는 말에 겨울은 헐떡이는 숨을 토해냈다. 지금 시후의 부름은 이미 공황에 빠진 겨울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함겨울. 내 얼굴 봐.”
시후가 겨울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 강렬한 눈동자가 겨울의 하얀 얼굴을 뜨겁게 적셨다.
“괜찮아. 불안해하지 마.”
단단히 얼굴을 붙잡은 손의 온기와 함께, 쏟아지는 낮은 목소리가 겨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 다치게 안 둬.”
잘게 일어난 균열의 틈으로 시후의 강인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내가 네 옆에 있잖아.”
그 말에 커다란 눈으로 촉촉한 물기가 고여 들었다. 시후는 젖은 숨을 헐떡거리는 겨울의 여린 몸을 끌어당겨 강하게 품에 안았다. 희미하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겨울의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밖에서는 직원들이 몰려온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닫힌 문이 열렸으나 겨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두 분 괜찮으십니까?”
“아내가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점검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시후는 가늘게 떠는 겨울의 몸을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다급하게 안아 드는 손길과 단단한 팔의 힘과 온기가 느껴지자 겨울의 눈가가 미세하게 동요했다.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서도 12년 전, 불타던 창고에서 자신을 안아 들었던 신원미상 남자의 잔상이 떠올랐다. 그날과 묘하게 겹쳐지는 상황을 느끼며 겨울은 흐릿해진 의식을 서서히 놓았다. 겨울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겨울아, 정신이 들어?”
들려오는 시후의 목소리에 겨울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빠…….”
“그래, 나야.”
제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의 온기에 심장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많이 무서웠지.”
다정한 속삭임이 겨울의 고막에 뜨겁게 감겨왔다. 울컥 치받쳐 올라오는 감정과 함께 겨울의 눈가가 욱신거렸다. 이내 커다란 눈망울로 촉촉한 물기가 잔잔하게 모였다. ……12년 전 사건 이후. 겨울은 꽤 오랫동안 심각한 폐소공포증을 앓았었다. 방문을 닫은 채 방 안에 혼자 있지도 못했으며,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타지 못해 늘 계단을 이용했었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고, 밀폐된 공간이라면 질색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겨울도 조금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게 되어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
이렇듯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현한 과거의 트라우마가 겨울을 다시금 스멀스멀 잠식하려 하고 있었다. 조금 전, 강시후가 아니었다면……. 저를 지탱해주던 그 단단한 목소리와 힘이 아니었다면 다시금 완전히 트라우마에 잠겨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를 안아 들던 그의 강인한 팔.
“……오빠.”
겨울은 가슴 위까지 올라온 이불을 걷어내며 젖은 눈으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이 달싹거리며 느릿하게 벌어졌다.
“저번에 우연히 보니까, 등 뒤에 화상 흉터 있던데…….”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그 상처, 언제 생긴 거야?”
나직한 물음에 시후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갑자기 그 물음을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 전 상황으로 인해 무언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모든 걸 털어놓아야 할까?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날 창고에서 너를 구해줬던 건 나였고. 너에게 말로 상처를 준 건 너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애써 악역을 자처했던 건, 아버지의 위협 아래에 어렸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고. 네가 떠난 후로도, 난 단 한 번도 널 잊어본 적이 없다고…….
“…….”
시후가 고요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너에게 비밀만 품은 채 살아가야 하는 걸까.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모든 걸 다 털어놓아 버리면, 그땐 어떻게 될까. 혀 아래까지 고인 말들을 가까스로 삼킨 시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 봐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무슨 말을 하든 전부 변명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이혼을 원하는 겨울에게 괜한 마음에 짐을 지워주고, 그녀를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 때 집에서 불이 나서 다쳤었어.”
비겁할지언정, 이건 너를 위한 선택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집에 불이 나서 다쳤다고?”
“응. 맞아.”
시후가 덤덤하게 답하며 겨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손길을 받으며 겨울은 시후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를 빤히 주시하는 겨울의 눈꺼풀 위로 손을 내린 시후가 부드럽게 그 위를 보듬었다.
“……거짓말.”
그 말에 시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거칠게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하고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커다란 눈이 일그러지며 물기가 고여들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고인 눈물은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투명한 물방울은 겨울의 하얀 뺨 위로 또르르 소리 없이 굴러떨어졌다.
“거짓말인 거 다 알아.”
……8년 후의 미래에서 온 강시후에게 등의 흉터가 왜 생겼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대학생 때 MT를 갔다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금 강시후의 말과 맞지 않는 대답.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빠 맞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겨울은 아무렇게나 입술을 움직였다. 굳이 진실을 숨길 이유는 단 하나였으니까.
“12년 전 그 불타는 창고에서 나 구해준 사람.”
시후의 까만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