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고열 (47/112)

47. 고열2022.03.13.

1655088325917.jpg“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열린 문틈으로 걸어들어온 사람에 놀란 시후의 눈이 커졌다. 공포 게임인 ‘제3의 노이즈’의 시연회에서 쓸 인형 탈을 쓰고 들어온 재환은 게임 캐릭터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16550883259174.jpg“오호호, 대표님. 안녕하세용? 손님이에…… 악!”

때아닌 장난질에 열받은 시후가 옆에 있던 파일철을 던지려고 하자 재환이 움찔했다. 다급하게 두 손을 펼쳐 보인 재환이 황급히 너털웃음 지으며 험악해진 분위기를 무마했다.

16550883259174.jpg“조크, 조크. 웃으라고 장난 좀 해봤어.”

눈가를 좁힌 시후가 황당하다는 듯 헛숨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피곤한 와중에 되지도 않는 장난질까지 당하니 짜증이 몰려왔다.

16550883259174.jpg“이거 내일 시연회 때 홍보용으로 쓸 탈인데 어때? 퀄리티 괜찮지?”

16550883259187.jpg“이미 아까 컨펌 끝났어.”

욱신거리는 미간을 누른 시후가 씹듯이 뱉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시후의 눈 밑에는 퀭하니 피곤이 그득했다. 오전보다 더욱 흙빛이 된 시후의 안색에 인형 탈을 벗은 재환이 미간을 좁혔다.

16550883259174.jpg“그보다 대표야. 너 요즘 뭔 일 있냐? 상태가 영 안 좋은데.”

시후는 대답 대신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건조해진 눈을 감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전날 겨울이 집을 나간 이후 숨이 틀어막힌 듯 속이 답답했다. 이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와중에, 시후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문제는……. 회사에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다면, 저 대신 넥스트 게임즈를 맡아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16550883259187.jpg“재환아.”

16550883259174.jpg“어?”

시후가 회사에서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조금 놀란 재환이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끔뻑거렸다.

16550883259187.jpg“너 나 없으면, 네가 대신 회사 맡아줄 수 있겠냐?”

16550883259174.jpg“뭐, 뭐? 내가?”

당황한 재환이 온 힘을 다해 격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16550883259174.jpg“야, 난 그냥 일개 개발자에 불과하다? 절대 안 돼. 네가 있는데 내가 왜…….”

16550883259187.jpg“…….”

16550883259174.jpg“그런데 그런 불길한 소리는 왜 해? 너 어디 떠나?”

16550883259187.jpg“…….”

16550883259174.jpg“아니면, 설마…… 아버지 회사 들어가는 거야?”

시후가 대답 대신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갈피를 잃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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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우려와는 달리 신규 게임 ‘제3의 노이즈’의 시연회는 열광적인 반응 속에 무사히 종료되었다. 피로가 몰려온 시후는 뒤풀이 회식에 참여하지 않고 카드만 건네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전날도 겨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후의 속은 점점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한참 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 생각하던 시후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16550883259187.jpg[오늘은 집에 들어와서 자.]

이 단순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수백 번은 더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 시후는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자 그저 깊은 한숨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겨울은 정말 박주형의 집에서 이틀을 지낸 걸까. 초조함에 목이 바싹 마르고 서늘해진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까지 그녀가 외박하게 된다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시후는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곧 겨울의 퇴근 시간이었기에, 직접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하게 차를 몰아 클레르로 이동하며 겨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길게 늘어지는 신호음에 조급함이 몰려왔다. 핸들을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한참 만에 전화가 연결되고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883289094.jpg-왜.

싸늘한 음성에 시후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느껴지는 고통을 참고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다.

16550883259187.jpg“지금 어디야?”

16550883289094.jpg-그건 왜 물어보는데.

16550883259187.jpg“……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

16550883289094.jpg-안 들어간다고 말했을 텐데.

시후가 잘근 입술을 씹었다가 놓았다.

16550883259187.jpg“차라리 내가 나갈게. 밖에서 지내지 말고 집에서 지내.”

16550883289094.jpg-…….

겨울은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요한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핸들을 꺾은 시후가 클레르의 건물 앞으로 차를 몰았다.

16550883259187.jpg“나 지금 클레르 앞에 도착했는데…….”

차를 정차한 시후가 말끝을 흐렸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시야로 전화를 받고 있는 겨울의 모습이 들어찼다. 그리고 그 옆에 정차된 차에서 내리는 남자는 다름 아닌 박주형이었다. 웃으며 겨울에게 다가가는 주형의 모습을 보자 시후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핸드폰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말문이 막힌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한 대 얻어맞은 듯 일렁이는 얼굴로 겨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후의 차를 눈치챈 겨울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부딪히자 겨울과 시후는 잠시간 흔들리는 동공으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겨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주형이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16550883259187.jpg“……하.”

헛숨을 터뜨린 시후가 이를 악물었다. 눈가로 저릿한 감각이 몰려오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밀려왔다. 전화를 끊은 시후는 사납게 핸들을 돌려 그대로 큰길을 향해 빠져나갔다.

16550883289094.jpg“…….”

핸드폰을 내린 겨울은 차가 사라진 길목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16550883320266.jpg“겨울아? 왜 그래?”

시후의 차를 보지 못한 주형이 묻자 겨울이 입술을 꼭 옹송그려 물었다. 또 비겁하게 뒤돌아 떠난 시후를 향한 원망이 샘솟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까스로 눌러 참은 겨울은 애써 주형에게 미소 지었다.

16550883289094.jpg“아무것도 아니야. 밥 먹으러 가자.”

  따뜻한 실내로 들어왔으나 겨울은 계속되는 오한에 몸을 작게 웅크렸다. 이틀 전 시후와 싸우고 집을 나선 날, 눈 오는 길거리를 한참 동안 배회한 탓에 감기 기운이 생긴 것 같았다. 이틀 동안 어떻게든 지친 몸을 이끌고 근무했으나 자꾸만 새어 나오는 기침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열 오른 볼을 손으로 감싸며 작게 한숨 쉬자 주형이 겨울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50883320266.jpg“어디 아파?”

16550883289094.jpg“음. 엊그제 밖에 좀 오래 있었더니 감기 기운이 좀 있네.”

손을 뻗은 주형이 겨울의 이마를 살짝 덮었다.

16550883320266.jpg“열이 생각보다 심한데? 병원 갈래?”

16550883289094.jpg“이 시간에 응급실 갈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병원을 가.”

16550883320266.jpg“그럼 내일 낮에라도 꼭 병원 가. 요즘 감기 독해서 조심해야 해.”

16550883289094.jpg“나 토요일도 근무하는 거 알잖아. 이 정도 감기 기운은 그냥 대충 시간 지나면 나아.”

16550883320266.jpg“……내가 볼 때 겨울이 넌,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게 웃은 주형이 점원을 불러 따뜻한 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내 따뜻한 물잔이 겨울의 앞에 놓이고, 그녀는 따끔거리는 목으로 더운물을 천천히 넘겼다.

16550883320266.jpg“요즘 많이 힘들지?”

16550883289094.jpg“글쎄……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픽 웃음을 흘린 겨울은 지금 이 순간마저도 쓰라린 가슴을 느꼈다.

16550883289094.jpg“미안해. 어쩌다 보니까 너한테 별의별 추태를 다 보인다.”

미래에서 온 강시후의 존재부터 그와 이혼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까지, 숨기고 싶었던 것들을 다 들켜버렸으니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6550883320266.jpg“괜찮아. 난 오히려 너랑 비밀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은걸.”

어깨를 으쓱한 주형이 가볍게 대답하며 겨울의 부담을 덜어주려 노력했다. 겨울은 그런 그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조금 전 시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했다. 주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그는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일부러 상처 주기 위해 주형이네 집에서 자겠다는 거짓말까지 했었지만, 이렇게 오해가 깊어지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잃은 겨울의 입술 안으로 작은 한숨이 뭉개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형이 나지막이 입술을 벌렸다.

16550883320266.jpg“겨울아.”

진중하게 불러오는 음성에 겨울이 매끄럽게 고개를 들었다.

16550883320266.jpg“8년 뒤에, 너하고 네 남편은 어차피 이혼할 예정이라면서.”

16550883289094.jpg“……응.”

16550883320266.jpg“그러면, 그 대신…….”

살짝 망설이는 듯하던 주형이 이내 겨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16550883320266.jpg“내가 널 행복하게 해 주는 건 안 될까?”

16550883289094.jpg“……어?”

놀란 겨울의 숨이 우뚝 굳었다. 경직된 입술이 툭 벌어졌다.

16550883320266.jpg“눈치챘겠지만…… 나 너 좋아해. 옛날부터 오랫동안 좋아했어.”

갑작스러운 고백에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아예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토록 진지한 마음인 줄은 미처 몰랐다. 무어라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으나, 여린 숨만 맴돌 뿐이었다.

16550883320266.jpg“뭐,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긴 하지만…… 지금 아니면 영영 말 못 할 것 같아서.”

16550883289094.jpg“…….”

16550883320266.jpg“물론 지금 당장 나한테 오라는 얘기 아니야. 대답해달라는 건 더더욱 아니고. 이혼 절차 밟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네 마음은 어떨지도 모르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겨울의 신경은 온통 시후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주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이 그녀에게 제 진심을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확신했다.

16550883320266.jpg“난 지금까지 계속 너 기다려왔으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겨울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16550883320266.jpg“앞으로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16550883289094.jpg“…….”

16550883320266.jpg“한 달도, 일 년도, 10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주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가느다란 숨이 한숨처럼 뱉어지고, 겨울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16550883289094.jpg“……주형아. 난 지금까지 널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 넌 내 소중한 친구고…… 너한테 이 이상 폐 끼치고 싶지 않아.”

16550883320266.jpg“괜찮아.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친구로서 네 곁에만 있게 허락해줘.”

16550883289094.jpg“……저번에 8년 뒤 강시후가 했던 말, 신경 써서 그러는 거야?”

이유는 몰라도, 서른아홉의 강시후는 주형에게 겨울의 곁에 있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말이 주형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16550883320266.jpg“그런 거 아니야. 뭐, 계기가 됐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흐릿하게 웃은 주형의 눈매가 매끄럽게 휘었다.

16550883320266.jpg“난 어쨌든 늘 네 옆에 있을 거야. 친구든 뭐든.”

다정한 얼굴이 겨울의 가슴에 짐처럼 내려앉았다. 차마 답해줄 수 없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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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일부터 나흘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한 겨울은 부서질 듯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올랐다. 감기 기운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심해졌고, 전날 주형과 먹었던 저녁 식사도 체한 탓에 전부 게워내고 말았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가 아득하고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한계인 상황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어질어질했으나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시후의 생각이 날 것만 같아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택시에서 내린 겨울은 클레르에 들어가기 전, 으슬으슬 추운 몸을 녹이기 위해 카페에 들렸다. 딸랑, 들려오는 종소리와 함께 석우가 환하게 웃으며 겨울을 맞이했다.

16550883435549.jpg“겨울 씨, 왔어요?”

16550883289094.jpg“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겨울은 자꾸만 기침이 나오는 입을 가리며 자그마한 소리로 인사했다.

16550883435549.jpg“오늘은 무슨 음료로 드릴까요?”

16550883289094.jpg“유자차…… 따뜻한 걸로 부탁드려요.”

16550883435549.jpg“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결제를 마친 석우가 카드를 돌려주며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16550883435549.jpg“벌써 연말이네요. 시간 참 빨라요.”

16550883289094.jpg“……네, 그죠.”

16550883435549.jpg“남편분하고는 잘 지내시죠? 항상 데리러 와주시고, 겨울 씨 많이 아껴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16550883289094.jpg“……음……네.”

뚝뚝 끊어지는 겨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석우가 겨울의 상태를 살폈다.

16550883435549.jpg“그런데 겨울 씨, 괜찮아요? 몸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퍼렇게 질린 입술과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확실히 정상 범주는 아니었다.

16550883435549.jpg“잠시 실례할게요.”

석우가 걱정스럽게 겨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흠칫했다.

16550883435549.jpg“몸이 불덩이인데…… 아, 겨울 씨!”

놀란 석우가 황급히 겨울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여린 몸은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지독한 고열에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겨울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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