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우리 꿈에서도 만나2022.03.30.
시후는 복사꽃처럼 빨갛게 익은 겨울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10년도 넘게 이어져 온 기다림의 보답을 받고 싶었으나, 이 이상 다가가면 겨울에게 부담을 안겨줄지도 몰랐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살풋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겨울의 핑크빛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너와 같이 있는 이 시간이…….”
까만 눈동자로 묘하게 들뜬 떨림이 느껴졌다.
“꼭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아.”
입술을 내린 시후가 겨울의 분홍빛 입술 위로 부드럽게 조인을 찍었다. 쪽, 부끄러운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겨울의 심장이 일렁였다.
“……오늘은 출근 안 해도 돼……?”
“오후에 출근할 거야.”
그 말에 겨울은 내심 아쉬운 마음이 샘솟고 말았다. 불순한 생각을 하고 만 스스로가 부끄러워 커다란 동공을 하릴없이 굴렸다. 그런 겨울의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린 시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신 그때까지…….”
입안의 젖은 혀가 질척하게 굴렀다.
“널 안고 있을 거야.”
아찔한 유혹에 겨울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뭐, 뭐?!”
마른침을 삼킨 겨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확장되었다. 답할 길을 찾지 못하고 커다란 눈을 꿈뻑거리고 있자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여린 몸은 강한 팔 힘에 이끌려 단단한 가슴에 밀착되었다. 남자의 체취가 코끝에 어른거리고, 맨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겨울의 뺨이 붉어졌다.
“왜.”
시후가 겨울을 살짝 떨어뜨리며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무슨 이상한 생각 했어?”
콩, 하얀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부딪힌 시후가 놀리듯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빨개진 겨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니거든! 이제 그만 옷이나 입어!”
안는다는 게 말뜻 그대로 끌어안는 건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괜히 김칫국 마셨던 게 창피해진 겨울이 씩씩거리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다시 검거. 그대로 오전 내내 겨울을 붙잡고 놔주지 않던 시후는 정오가 지나서야 겨우 겨울을 놓아주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향한 시후의 시선에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나 회사 갔다 올게.”
“응. 다녀와.”
겨울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자 시후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접혔다. 곧바로 뒤를 돈 시후는 현관을 따라 걸어 문 앞에 섰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겨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시 확 뒤를 돈 시후가 성큼성큼 제게 걸어온 탓이었다.
“왜 그래? 뭐 놓고 간…….”
쪽. 달콤한 촉감이 입술 끝으로 번졌다. 부드럽게 떨어진 입꼬리가 느릿하게 곡선을 그렸다.
“이따 밤에 봐, 겨울아.”
나직하게 속삭인 시후가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울의 귀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이윽고 시후가 떠난 뒤 겨울은 빨개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열심히 손부채질했으나 좀처럼 열감은 내려앉지 않았다. 찬물에 세수라도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 겨울은 여전히 크게 뛰는 심장박동 때문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내쉬었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내저은 겨울은 수도를 틀고 시원한 물에 손을 담갔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겨울의 얼굴이 또다시 뜨거워졌다. 쇄골 아래에 유난히 붉어진 살결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목덜미부터 쇄골 아래까지 내려앉던 뜨거운 입술의 감각이 떠오르자 겨울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푹 가렸다. 물론 저도 강시후도, 12년 전 고등학생 때처럼 어리고 순수한 나이가 아니었으니 이 속도는 당연할지도 몰랐다.
“이러다 진짜 심장 떨어지겠다…….”
붉은 자국 위를 문지른 겨울이 팔딱팔딱 건강하게도 뛰는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세면대 옆에 놓아두었던 겨울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시후인가 싶어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했으나, 겨울의 입꼬리는 곧바로 잦아들었다.
[어제부터 내 전화, 왜 계속 안 받는 거지?]
바람대로 시후에게서 온 문자는 맞았다. 다만 8년 뒤의 미래에서 온 강시후의 문자라는 점이 달랐다. 잠시 가만히 문자를 바라보던 겨울은 이내 굳게 결심하고 꾹꾹 키패드 위를 눌렀다.
[8년 뒤 이혼하게 되더라도, 지금 내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어요.]
크게 숨을 들이켠 겨울이 얼굴을 굳히며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더는 이혼하라고 종용하지 마세요. 이건 내 선택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선택이기도 하니까.]
더는 미래 때문에 현재의 감정을 외면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의 끌림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 겨울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던 시후의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야근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나 늦게 출근한 만큼 일이 쌓여버린 탓에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겨울을 보고 싶어 폭주하듯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으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너무도 고요했다.
“겨울아?”
슬쩍 불러보며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누워 잠이든 겨울이 시야에 들어찼다.
“겨울아, 자?”
혼자 술을 마신 건지, 테이블 앞에는 맥주캔 여러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맥주 마셨어?”
“우음…….”
잠결에도 신음처럼 대답한 겨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겨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시후가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질투 나게. 왜 맥주를 마셔.”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가 떼었다.
“내가 있는데.”
살다 살다 맥주에 질투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던 시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살짝 얼굴을 찡그린 겨울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몰라아…….”
잠결에 팡팡 터져 나오는 애교스러운 말투에 시후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날 새가 없었다. 아기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겨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시후가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날 좋아한다는 건……. 기적보다 더한 일이었다.
“…….”
자그맣고, 하얗고, 부드럽고, 귀엽고……. 겨울을 보면 꼭 아기 고양이가 생각났다. 톡 치면 부서질 것 같은 가느다란 팔다리가 안쓰러워 입안에 이것저것 맛있는 걸 채워주고 싶다가도, 말랑말랑 뽀얀 살결과 가슴부터 잘록한 허리까지 이어지는 예쁜 굴곡들은 시후를 설레게 했다.
“잘 거면 들어가서 자, 겨울아.”
“귀찮아……. 여기 있을래…….”
“고집부리긴.”
아프지 않게 겨울의 뺨을 꼬집어 늘인 시후가 술 취한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이 정도로 귀여우면 거의 범죄가 아닌가. 낮게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겨울의 무릎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녀린 몸을 번쩍 안아 든 시후는 그대로 침실로 향해 겨울을 침대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그 옆에 걸터앉은 시후는 계속해서 세상 모르고 잠든 겨울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트막한 숨이 겨울의 입술 사이로 흐르고, 새근새근 자는 소리가 선율처럼 방 안을 울렸다. 하얗고 동그란 이마와 오뚝하게 솟은 앙증맞은 콧대, 섬세하게 돋아 있는 길쭉한 속눈썹……. 장인이 하나하나 연필로 그려놓은 것처럼 선이 아름다운 얼굴은 어느 곳 하나 곱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머리는 잠든 겨울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연속적으로 신호를 보내는데, 정작 엉큼한 손은 그녀의 뺨으로 향했다. 천천히 쓰다듬던 시후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꽃물을 머금은 듯 붉은 입술에 시선이 닿자 또다시 갈증이 일었다. 그 어여쁜 꽃송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자 이내 나직하게 벌어졌다.
“……믿을게.”
겨울이 잠결에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좋아한다는 말, 믿을게.”
그 말에 시후의 가슴이 거세게 일렁였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뚫고 떠오르는 것은 시후가 12년 전, 겨울에게 했던 첫 번째 사랑 고백이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믿을래?’
열아홉 소년의 서툰 고백, 겨울은 그때 그 고백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하…….”
지금 겨울의 속삭임은 12년 전 시후가 그녀에게 했던 고백에 대한 뒤늦은 대답이었다.
“너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이 답을 듣기까지 무려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시후의 마음은 조금도 바래지 않고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살며시 웃음을 터뜨린 시후는 겨울의 새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자.”
우리 꿈에서도 만나. ***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일말의 피로도 없이 개운하게 눈을 뜬 겨울의 머리 위로 따뜻한 햇볕이 밀려 들어왔다.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 올린 겨울은 제 눈앞에 보이는 시후의 모습에 놀라 움찔했다. 널찍한 품에 안겨 그의 팔을 베고 자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겨울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애썼다. 전날 시후를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마셨는데……. 며칠간 잠도 잘 자지 못한 몸으로 술을 마신 게 원인이었을까. 알코올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으, 바보. 바보…….’
뒤늦게 자신을 안아 들던 단단한 팔의 힘을 떠올린 겨울이 자책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의 침실로 데려와 옆에서 같이 잔 건 조금 괘씸하지만, 다른 남자도 아닌 강시후니까 그 정도는 눈 감아 주기로 했다. 어쨌든 좋아하는 남자의 품에서 눈을 뜨다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겨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잠든 시후의 얼굴을 한참 동안 감상하던 겨울은 홀린 듯 손을 뻗어 시후의 콧대를 살며시 매만졌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조각이라도 해놓은 듯이 완벽한 얼굴은 겨울의 심장을 세상 활력적으로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쪽, 입술에 뽀뽀한 겨울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시후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가만히 겨울과 눈을 맞추었다.
“아…….”
몰래 뽀뽀한 것을 들킨 겨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겨울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가느다란 손목으로 감겨오는 따뜻한 손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디가?”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 내 방으로 갈래.”
겨울의 말에 픽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두 팔을 뻗어 겨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귀여우니까 안 보내줄 거야.”
쪽, 귓가에 키스를 남긴 시후가 비스듬히 시선을 맞춰왔다. 아직 잠에 취한 목소리가 어찌나 섹시한지……. 정말 심장에 해로운 남자였다.
모처럼 맞은 평화로운 아침, 시후와 겨울은 간단하게 토스트를 구워 함께 식사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에 잼을 바르며 겨울이 흘끗 시후를 바라보았다.
“오늘 오빠 새어머니랑 동생…… 발인 날이지? 부고 문자에서 봤어.”
“응, 맞아.”
“안 가볼 거야?”
“생전에 원수나 다름없었는데, 내가 가는 게 더 우습지 않겠어?”
“하긴 그렇지…….”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문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보니까 뉴스도 떴던데. 비 오는 날 과속해서 달리다가 가드레일 받고 추락했다고…….”
KU그룹 강성호 회장의 아내와 실질적 후계자인 둘째 아들의 사망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충분한 이슈였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그들의 죽음에 대해 애도와 유감, 경악의 뜻을 나타냈고 회사의 주가는 폭락을 면치 못했다.
“맞아. 뉴스에는 사고로 보도됐지.”
시후가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하지만 지금 정황상으로는…….”
느리게 움직이는 시후의 입술에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타살이 틀림없어.”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