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내 꿈 꿔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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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내 꿈 꿔도 좋아
2022.04.10.
한 침대를 쓰자는 시후의 제안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겨울은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탁,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겨울이 그대로 벽을 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아…….”
쿵쿵쿵. 심장이 너무도 떨려 이대로 멈추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와 한 침대를 쓰는 건 처음이 아니었으나, 조금 전 그가 건넨 제안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기에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니야.”
그냥 순수하게 같이 잠만 자자고 하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손만 잡고 자는 뭐, 그런…….
“윽.”
……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내 나이가 벌써 스물아홉이야!
이미 탁하다 못해 썩을 대로 썩은 뇌로는 온갖 음탕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평생 개미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온 탓에 그 흔한 남자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없는 겨울에게 이런 상황은 멘붕 그 자체였다.
음란 마귀 낀 머릿속에서 말 못할 19금 상상들이 펼쳐지자 화들짝 한 겨울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무 짓도 안 하겠지. 안 할 거야.
이제껏 같이 침대를 쓴 적은 두세 번쯤 있었지만, 그가 맘대로 선을 넘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꼴깍 침을 삼킨 겨울은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옷장을 훑는 시선 끝에 걸린 것은 언제 샀는지도 알 수 없는 하얀색 슬립이었다.
“……난 이걸 왜 샀던 걸까?”
1년간의 기억이 없으니, 도대체 이 슬립을 무슨 꿍꿍이로 샀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야한가……?”
일단 입은 뒤 거울에 비춰본 겨울이 갸웃했다.
실크 소재로 이루어진 슬립은 아슬아슬한 끈 나시 형태의 무릎 위까지 오는 원피스였다. 가슴은 깊게 파여 있었는데, 하얀색 레이스가 촘촘하게 수놓아져 그 아래로 브래지어의 컵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수면 잠옷을 입었을 때와 비교하니 옷이 날개라는 말이 딱 맞았다.
‘계속 보니 그렇게 야하지 않은 것 같기도…….’
이왕이면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어리숙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겨울이 이내 결심하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나섰다.
시후의 방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겨울이 제 슬립 자락을 꼭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와닿았다.
의외의 차림에 살짝 놀란 시후가 숨을 집어삼켰다.
“왜 그렇게 봐? 이상……한가?”
“아니야. 예뻐.”
조금 당황한 시후가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으며 답했다.
하지만 얇은 슬립 아래로 희미하게 비치는 속옷의 색감으로 자꾸만 향하려는 시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증이 일고 입술이 말랐다.
“저번에 같이 잘 때는 수면 잠옷 몇 겹씩 껴입더니…….”
제 감정을 숨기며 살며시 웃음을 흘린 시후가 몸을 일으켜 겨울에게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
“……아, 그건…….”
커다란 동공을 바쁘게 굴리던 겨울이 자그마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빠는 아무 짓도 안 할 거 아냐.”
겨울의 말에 시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말에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움찔한 겨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내려다보는 어둑한 시선과 일순 마주하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확 끌어당기는 손길에 딸려간 겨울의 시야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놀란 겨울이 짧게 신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겨울을 침대 위로 흐드러지게 눕힌 시후가 그녀의 위로 상체를 가깝게 내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겨울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쥔 시후가 느슨하게 허리를 굽혔다.
“뭐, 뭐가…….”
할짝.
겨울의 숨이 멈추었다.
제 입술을 핥고 떨어진 시후의 입술이 길게 늘어지며 아찔한 곡선을 그렸다.
“왜 아무 짓도 안 할 거라고 생각해?”
입술을 벌려 통통한 아랫입술을 베어 문 시후가 가볍게 빨아당기며 웃었다.
겨울은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랫배로 이상한 감각이 들끓는 와중에 허리로 부드럽게 감기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야 내가 싫어하는 건 오빠가 안 할 테니까…….”
물결처럼 슬립 위를 헤집는 커다란 손에 놀란 겨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부드럽게 살결을 쓰다듬자 겨울이 달뜬 숨을 터뜨렸다.
온 감각이 민감하게 달아오른 겨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럼 뭔데.”
“……몰라. 그런 거 묻지 마.”
벌어진 나이트가운 틈으로 비치는 시후의 탄탄한 가슴 근육에 겨울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저 가슴에 꽉 터지도록 안겨보고 싶다는 음험한 욕망이 피어오르는 스스로가 황당했다.
“이상한 눈빛으로 보지도 말고.”
……심장 터질 것 같으니까.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까만 눈매와 야릇하게 뱉어지는 숨결이 미치도록 불순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마른침을 삼킨 겨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눈이 왜.”
“…….”
“너 잡아먹기라도 해?”
픽 실소한 시후가 느슨하게 허리를 일으키며 빨개진 겨울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짓도 안 해.”
그렇게 말하는 시후의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식지 않고 열화처럼 타오르는 정염이 읽혔다. 참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겨울이 입술을 옹송그려 물었다.
“그만 잘까.”
깔끔하게 정돈된 이불을 들어 올린 시후가 먼저 침대에 누웠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겨울도 떨리는 몸을 움직였다.
등 뒤로 푹신한 매트리스가 눌리자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었다.
곧 방 안을 환하게 밝히던 조명이 꺼지고, 주홍빛 무드 등이 고요하게 켜졌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관능적인 남자의 체향이나, 미세하게 전해져오는 무더운 체온 같은 것들이 겨울의 심장을 쥐고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만 굴리던 겨울이 저도 모르게 흘끗 시후를 바라보았다가 흠칫했다.
그가 줄곧 계속해서 겨울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
단단한 팔의 힘에 이끌려 시후의 쪽으로 돌아눕게 된 겨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안고 자는 것쯤은 되겠지.”
가까워진 거리에 여린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그 동요를 느낀 듯 강하게 끌어안는 손은 간절하게 허락을 구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겨울이 잠을 청하기 위해 억지로 가느다랗게 떨리는 눈꺼풀을 닫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도로 눈을 떴다.
“너무 빤히 보지 마……. 신경 쓰여.”
“보는 것도 안 되나.”
“……쌩얼이라 창피하다고.”
“귀여운데 왜.”
나직이 숨결을 터뜨리는 소리에 겨울의 심장이 간질거렸다.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바보야…….”
“예쁘기도 하고.”
“…….”
아아아…….
이러다 정말 흐물흐물 녹아서 함여름 되겠네.
얼굴을 붉힌 겨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휙 몸을 뒤집어 등 돌려 누웠다.
뒤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선율처럼 들려오고, 겨울은 고장 날 것처럼 거칠게 뛰는 제 심장을 움켜쥐었다.
“……저기.”
자그마한 입술을 벌린 겨울이 살짝 고개를 돌려 시후를 바라보았다.
“왜?”
“……정말로…….”
나비의 다리처럼 가느다란 속눈썹이 살며시 깜빡거렸다.
“정말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가녀리게 들려오는 음성에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시후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숨소리처럼 헛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손을 뻗었다.
“아니.”
확 끌어당겨 겨울을 제 쪽으로 돌린 뒤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할 거야.”
시후의 커다란 손이 뒷머리로 강하게 감겼다. 입을 맞춰오자 겨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턱을 벌려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던 시후는 부드럽게 올라가 윗입술을 베어 물었다.
입술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감각에 붉은 입술이 꽃잎처럼 벌어졌다. 겨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뻐근할 정도로 턱이 벌어지자 그 안으로 침입한 몰캉한 형체는 겨울의 가지런한 치열 위로 뜨겁게 마찰했다.
비벼지는 감각에 입안이 흥건하게 젖어 들고 손발이 가늘게 떨려왔다.
놀란 겨울이 더듬더듬 시후의 가운 자락을 움켜쥐자, 그가 겨울의 손가락 틈새로 제 길쭉한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그물처럼 끈적하게 맞물린 손을 그대로 매트리스 위로 밀어붙인 시후가 겨울의 위를 올라타 여린 몸을 장악했다.
“겨울아…….”
고삐 풀린 맹수처럼 이성이 끊어진 시후는 겨울의 목덜미에 갈급하게 입술을 묻었다.
민감해진 살결로 느껴지는 자극에 겨울의 목이 뒤로 한껏 젖혀졌다.
“말해봐, 어디까지 들어가도 되는지.”
성대를 긁는 듯이 낮게 깔린 음성이 겨울의 심장을 쥐고 비틀었다.
아니, 실제로 레이스 위를 움켜쥔 손길이 짐승의 발톱처럼 위험했다.
“여기?”
반듯한 쇄골 위로 와닿은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겨울의 정신이 혼미했다.
비스듬히 시선을 들어 올린 시후가 겨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술을 벌렸다. 질척한 감각이 뒤를 이었다.
파도처럼 올라온 입술은 다시금 겨울의 입안으로 깊숙이 파고들며 흉포하게 활개 쳤다.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에 겨울은 정신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말해봐…….”
시후가 무더워진 눈동자로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까지 날 허락할 수 있는지.”
부드럽게 움직이는 길쭉한 손가락에 겨울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대로 기절해버릴 것만 같았다. 묵직하게 눌러오는 남자의 열기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시후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보드라운 살결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줄곧 입에서만 맴돌던 감각이 온몸으로 번지자 겨울의 하얀 살결 위의 솜털이 곤두섰다.
“오빠…….”
더듬더듬 그를 불렀다.
아래에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시후가 겨울을 가만히 주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보드라운 실크가 하얀 이 아래에서 구겨지고 정제되지 않은 숨소리가 살결에 닿아 부서졌다.
“……!”
온몸을 지배해오는 생경한 감각에 여린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가쁜 숨을 몰아쉰 겨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정신은 아득하고 온몸의 혈관이 쿵쿵 내달리고 있는 듯했다.
실크가 침대 시트에 비벼지는 연약한 날갯짓 같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겨울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술 취한 사람처럼 귀까지 새빨개진 겨울이 사랑스러워, 시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상승했다.
“어때.”
바짝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은 겨울의 뺨을 부드럽게 쓸며 고개를 내렸다.
“여기서 더 유혹하면…….”
피아노를 연주하듯 척추뼈를 타고 흐르는 길쭉한 손가락의 감각에 겨울이 자지러졌다.
“넘어와 줄 건가?”
“……아.”
장미처럼 달아오른 겨울은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이렇게 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오늘 끝까지 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어, 어떡하지…….’
이러는 와중에도 앙큼하게 살결을 지분거리는 나쁜 손에 겨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 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 반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저 섹시하다 못해 치명적인 눈빛 앞에서 그만두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앗……!”
고뇌하는 와중, 돌연 제 뺨을 잡고 꼬집는 손에 겨울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픽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겨울의 허리를 끌어안고 제 품에 쏙 넣었다.
“얼굴은 새빨개져서는.”
놀리듯이 속삭이는 입술에 창피해진 겨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톡 튀어나온 붉은 입술에 쪽, 뽀뽀한 시후가 겨울의 머리를 녹녹하게 쓰다듬었다.
“잘자, 겨울아.”
오랫동안 피어 있던 제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겨울의 심장에 도달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제 겨우 개화하기 시작한 자그마한 꽃송이였다.
여린 아기 꽃을 한입에 삼켜버릴 수도 있겠지만, 놀라게 하거나 겁먹게 할 생각은 없었다.
겨울은 시후의 세상, 그 전부였으니까.
“내 꿈 꿔도 좋아.”
오랜 시간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이 지나고,
꽃 피고, 바람 불고, 햇볕이 들어 머지않아 열매를 맺을 때까지.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