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쇼윈도 부부
(56/112)
56. 쇼윈도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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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쇼윈도 부부
2022.04.13.
겨울은 출근한 후로도 심장에서 피어난 전날 밤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아 야단이었다. 첫 연애를 시작한 여고생도 아닌데, 내내 구름 위에서 떠다니는 것처럼 몽글몽글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시후의 정성으로 울긋불긋했기에 직원들이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린 겨울은 모두가 나간 뒤에야 옷을 벗었다.
유니폼 바지를 입으려고 고개를 내린 순간, 하체에 새겨진 낯뜨거운 자국에 닿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붉은 꽃이 산발적으로 피어 있는 허벅지 안쪽이 간질거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자꾸만 머릿속이 콩밭으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겨울이 손바닥을 펼쳐 두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서둘러 유니폼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직원들이 한데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두 손뼉을 맞부딪친 실장이 주의를 집중시킨 뒤 새로운 안내 사항들을 전달했다.
“그럼 그렇게들 알고. 오늘 하루도 모두 힘내서 열심히 일해봐요.”
“네.”
겨울을 포함한 직원들의 대답이 뒤를 잇고 모두가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카페 딜리버리 서비스 왔습니다.”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득 들고 클레르 안으로 들어오자 놀란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종류별로 다양한 커피와 함께 카나페, 모닝빵, 샌드위치 등 간단한 간식들이 프런트 위로 놓였다.
“강시후 씨가 보내셨습니다.”
익숙한 이름에 겨울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식사를 못 하고 나왔던 게 떠올랐다.
“그게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누구기는요! 겨울 언니 남편분이 보내신 거네요!”
우정이 호들갑스럽게 외치자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겨울에게로 쏠렸다.
멍하니 서 있는 겨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희수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야야. 네 남편, 와이프 사랑이 하늘을 찌른다?”
“와, 대박이다. 결혼 진짜 잘하셨네요, 함 팀장님.”
“너무 센스 있으시다!”
부러움 어린 눈빛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쏟아지자 겨울이 민망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웃었다.
“그리고 이건 함겨울 씨 앞으로 온 겁니다.”
음식들을 프런트에 일렬로 내려놓은 남자가 겨울에게 따뜻한 커피 하나를 건넸다.
경황없이 받아들자 배달을 마친 사람들이 일제히 클레르를 빠져나갔다.
“와, 잘 마실게요, 겨울 언니!”
“저도요! 배고팠는데, 샌드위치 진짜 맛있겠다.”
시끌벅적하게 프런트로 몰려든 직원들이 각자 커피와 음식들을 주워들며 겨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루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커피와 출출한 아침 시간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음식들에 모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신혼 부럽다. 나도 이런 남편 있었으면 좋겠네.”
카나페를 한입에 집어넣은 희수가 세상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웃음으로 회답한 겨울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뜨거운 음료가 담긴 뚜껑을 열었다.
컵에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겨울이 멈칫했다.
따뜻한 카페라테 위로 노골적으로 그려진 하얀 하트가 시선을 사로잡은 탓이었다.
움찔한 겨울이 누가 볼세라 얼른 뚜껑을 닫았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홀로 직원 대기실로 돌아와 다시금 뚜껑을 열고 하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배시시 웃은 겨울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는데,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내 선물 받았어?]
[응. 고마워, 잘 먹을게.]
[사랑해, 여보.]
……아.
여보라니.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심장의 두근거림이 점점 더 크기를 키우며 양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띄워졌다.
쓰다듬듯이 액정 위를 문지른 겨울이 핸드폰을 제 가슴에 붙이며 히죽 웃었다. 바보처럼 계속해서 상승하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주 좋아 죽네, 죽어.”
문득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희수가 농담조로 중얼거리며 겨울에게 다가왔다.
“시후 씨가 그렇게 좋냐?”
“뭐…… 싫지는 않지?”
“어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헛웃음을 터뜨린 희수가 겨울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하긴 그 얼굴, 스펙의 남편이면 입이 귀까지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지. 우리 남편이 좀 역대급이긴 하지.”
“……염장 지르냐? 친구는 계속 솔로인데 혼자만 하트 뿅뿅이니까 좋아?!”
희수의 타박에 겨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희수야. 너 소개팅하고 싶다고 했지?”
“어? 어! 진짜 하고 싶지!”
“내가 남편한테 물어보니까, 오빠 회사에 디자인 파트 팀장이었나? 김은성인가 하는 분이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던데. 그분도 오랫동안 솔로라서 소개받고 싶어 한대.”
“진짜?! 완전히 좋아!”
“나이는 서른하나고, 키는 180센티 정도 된다고 해. 얼굴은…… 잠깐만.”
핸드폰을 뒤적인 겨울이 시후에게 미리 받아두었던 김은성의 사진을 희수에게 보여주었다.
“오오, 좋아! 훈훈한 과대 오빠상 좋아.”
“그럼 소개받는다고 한다?”
“응!”
어디선가 불어오는 솔로 탈출의 향기에 희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희수는 겨울과 함께 퇴근 후 주형이 근무하는 치과에서 정기 검진을 받기로 약속했으나, 갑자기 생긴 집안일로 다음을 기약했다.
홀로 치과에 도착한 겨울은 진료 체어에 앉아 주형에게 정기 검진을 받았다.
“충치 하나 없이 깨끗해. 관리 잘했네.”
주형의 말에 겨울이 턱을 다물며 반색했다.
“대신 오른쪽 아래에 난 사랑니는 다음에 와서 꼭 빼는 게 좋겠다.”
“뭐? 아프지 않은데, 안 빼면 안 돼?”
“예쁘게 잘 올라오면 상관이 없는데, 옆으로 누워서 났거든. 씹을 때 기능을 못 하니까 빼는 게 나아. 자칫해서 썩으면 다른 이까지 충치 생길 수도 있고.”
검진을 마친 주형이 버튼을 눌러 진료 체어를 바르게 세우며 당부했다.
“다음 주 토요일 어때? 일 끝나고 와서 잠깐 발치하고 가.”
“사랑니 뽑는 거 아프지 않아?”
“불편하지 않게 뽑아줄게. 내가 사랑니 잘 뽑는 걸로 나름 유명하잖아?”
주형이 장난스럽게 되받아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과의 대표 원장과 직원들에게 차례로 인사한 겨울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 겨울아.”
배웅 나온 주형은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건넸다. 얼마 전 겨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었기에, 친구 사이마저 망가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전처럼 대해주는 겨울에게 고맙고, 또 그녀의 힘든 시간을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이 미안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뭐…….”
“겨울이 네가 뭐가 미안해? 그런 말 별로야.”
주형이 나지막이 웃었다.
“이렇게 된 거, 남편하고 다투지 말고 잘 지내. 앞으로 있을 미래는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거니까.”
“……응, 고마워.”
작게 속삭인 겨울이 주형의 따뜻한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지만, 친구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겨울은 도롯가에 정차된 시후의 차로 다가갔다.
조수석에 올라타자 삐딱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 많은 치과 중에 꼭 여기를 와야 했어?”
“그래도 믿을 만한 친구 치과 와서 진료받는 게 낫지.”
이제는 서슴없이 질투를 드러내는 시후가 귀여워서 겨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주형이 되게 실력 있다고 나름 업계에서 소문나 있어. 오빠 모르지?”
곁눈질로 겨울을 본 시후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어를 바꾸었다.
“예전에 한 번 신경 치료받았었는데, 정말 하나도 안 아팠었거든. 다음 주에 사랑니 뽑아준다고 오라고 하더라고.”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겨울이 계속해서 쫑알거리자 시후가 핸들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전에도 주형이가 우리 엄마 임플란트해 줬는데, 엄마가 엄청 만족했어. 지금까지도 문제 전혀 없고.”
“…….”
“하여간 주형이는…….”
웃으며 시후를 돌아보았다가 움찔한 겨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갑자기 턱을 잡고 다가온 시후가 겨울의 입술에 입을 맞춘 탓이었다.
놀란 겨울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시후가 여린 뒷머리를 헤집으며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집어삼킬 것처럼 격정적인 움직임에 겨울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여린 입안에 길게 들어온 시후가 제 소유욕을 새겨넣듯이 그녀의 안을 무자비하게 휘저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겨울이 시후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자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지 마.”
정제되지 않은 거친 숨이 겨울의 입술을 적셨다.
짙은 눈동자와 돌연 마주한 겨울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박동했다.
“뭐야. 하여간 질투는…….”
동요를 들킬까 봐 달아오른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내가 걔한테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감정이 있었으면, 가서 입 쩍 벌리고 스케일링까지 받고 있겠어?”
어수선하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시후가 픽 웃음을 터뜨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해서 문제야.”
거친 입맞춤과는 다르게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는 언제나 그랬듯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한결같은 그의 운전에서 세심한 배려가 느껴져서 겨울은 가슴이 말랑말랑했다.
“내일 주말인데 밖에서 데이트할까?”
붉은 신호 앞에서 차량이 부드럽게 멈추고, 비스듬히 시선을 튼 시후가 겨울을 주시했다.
새삼스러운 데이트 신청에 겨울이 커다란 동공을 굴렸다.
“나 토요일도 일하잖아. 끝나면 저녁일걸?”
“저녁이 아니라 새벽이어도 괜찮아.”
그 말에 겨울이 눈을 깜빡거렸다.
“난 너만 있으면 돼.”
부드럽게 속삭인 시후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그럼 저녁 7시에 식당 예약해 놓을게.”
***
다음 날, 근무가 끝난 뒤 옷을 갈아입은 겨울은 시후와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가 예약한 곳은 기와집 형태의 건물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한식당이었는데, 모두 프라이빗한 룸으로 이루어져 있어 셀럽들이 자주 찾는 음식점이었다.
한복을 입은 직원이 안내에 따라 가장 안쪽의 룸 안으로 들어가자 우아한 인테리어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의자를 빼고 앉아 호화스러운 풍경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시후로부터 차량 정체 때문에 5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화장이라도 고칠까…….”
클레르를 나설 때 덧발랐던 립스틱은 벌써 촉촉함을 잃은 듯 말라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겨울은 직원에게 화장실을 안내받으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서 세면대 앞에 선 순간, 겨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때마침 칸막이에서 나온 여자의 정체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머, 겨울 씨?”
반갑게 웃으며 인사해오는 여자는 시후의 친구이자 국내 최정상 여배우인 오민주였다.
그녀는 조막만 한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를 벗으며 살갑게 다가왔다.
“우연이네요. 자선 파티 이후로 처음이죠?”
“……네, 안녕하세요.”
빈말로라도 반가워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겨울은 그녀가 자선 파티에서 제게 비수를 꽂고 시후와 이간질하려고 했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나 겨울 씨처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 된 여자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그건 하루아침에 다시 버려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남편 눈치 잘 보고 살아야죠?’
그녀의 말을 떠올린 겨울이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누구랑 왔어요?”
“……제가 그걸 오민주 씨에게 왜 말씀드려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어머, 차가워라.”
겨울이 선을 그었으나 민주는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듯 여유롭게 웃으며 세면대로 다가왔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시후와 온 건 아닌가 봐요. 그렇죠?”
겨울은 대꾸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핸드백을 열어 립스틱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무시하려 했으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겨울의 혼란이 읽혔다.
그 동요를 바라보며 민주가 빨간 입술을 길게 늘였다.
“나 두 사람, 쇼윈도 부부인 거 아니까 괜히 힘 빼지 마요.”
입술 선을 따라 립스틱을 바르던 겨울의 손목이 삐끗했다.
일순 제 귀를 의심한 겨울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