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허상
(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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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허상
2022.05.25.
어느덧 비는 그쳤으나 겨울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없었다.
두 다리로 바닥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조차도 지금의 겨울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저 홀린 사람처럼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를 정처 없이 거닐 뿐이었다.
“…….”
내가…….
머지않은 미래에 죽게 된다니.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의 강시후가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그 진실이 이토록 잔인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넋이 나간 겨울은 영혼이 전부 빠져나간 사람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도저히 자신이 곧 죽는다는 말을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날 살리기 위해, 강시후가 미래에서 찾아온 것이라고…….
“하.”
차라리 꿈이길 바랐으나 피부로 스며드는 차가운 겨울의 공기는 더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 보니 강시후를 처음 만났던 12살 때, 겨울은 그의 얼굴이 낯이 익어 삼촌이 있냐는 질문을 했었다.
그건 과거에 겨울이 놀이터에서 만났던 한 남자와 시후가 굉장히 닮아 있었던 탓이었다.
“설마 어렸을 때 만났던 그 남자도…….”
강시후……?
그렇게 생각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러고 보면 그 외에도 또 이상함을 느낀 일이 있었다.
17살 겨울 방학을 이틀 앞두었던 날, 강시후와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시절.
꼭 어른처럼 슈트에 코트까지 차려입은 강시후가 돌연 나타나 저를 꽉 끌어안았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는 시원한 향수와 담배 냄새가 뒤엉킨 성숙한 향기가 났었는데, 그 당시 겨울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것도 미래에서 온 강시후였어…….”
가슴이 서늘해지고 머리카락이 삐쭉 곤두섰다.
미래에서 왔다는 강시후의 말을 믿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정황이 모두 맞아떨어지자 살갗에 소름이 끼쳤다.
이윽고 찾아온 것은 극심한 혼란이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
빠아아앙!!!
그 순간 어디선가 거대한 클랙슨 소리가 귓가를 거세게 찔러왔다.
돌연 뇌가 터질 것처럼 느껴지는 두통에 놀란 겨울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지는 것처럼 잔혹한 고통이 뇌를 울렸다.
‘결혼하자고.’
동시에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냉담한 표정의 시후의 목소리였다.
‘네가 나에게 진 모든 빚을 전부 탕감해주는 조건이야. 그리고 너와 네 어머니의 채무까지도 모두 대신 갚아주지.’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아득하니 흐릿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날 절대 사랑하지 않을 여자가 필요해.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이게 대체 무슨 기억이지?
설마 사라졌던 지난 1년의 기억……?
감당할 수 없는 두통에 휘청이던 겨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아내와 이혼한다는 기사는 악의적인 루머에 불과합니다. KU그룹 경영에 참여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고요.”
시후는 곧바로 KU그룹 홍보팀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기사를 작성한 최초 유포자를 확인한 뒤 그와 통화를 시도했다.
-아니, 글쎄. 저는 그냥 KU그룹 홍보팀에서 전달한 내용대로 기사를 썼을 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본인한테 사실확인도 전에 허위로 기사화부터 하신 부분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 잠깐……. 법적 책임이라니요……! 강 대표님도 진짜 너무 하시네요. 저희 사정 다 아시면서…….
“그러니까 당장에라도 정정보도 요구합니다.”
-……일단 강 회장님하고 얘기 나누세요.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정정보도 할 테니까요. 그전에는 고소를 열두 번도 더 한다고 협박하셔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하.
시후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기자들 모두 강성호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정정보도를 낼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알겠으니 그때까지 추가 기사 없도록 하세요. 이후 보도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처 없이 전부 법대로 해결할 겁니다.”
차갑게 제 할 말을 남긴 시후가 전화를 끊었다.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를 누르고 고개를 들자 웅장한 규모의 KU그룹 본사 건물이 시야에 들어찼다.
다시는 찾아올 일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결국 악마를 만나러 또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
차를 주차한 시후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회장실이 위치한 31층 버튼을 눌렀다.
긴 복도를 따라 성호의 집무실에 도착한 시후가 비서실장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무작정 문고리를 잡았다.
벌컥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손을 모아쥐어 깍지낀 성호가 시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왔느냐.”
쿵, 거칠게 집무실 문을 닫은 시후가 성호를 노려보았다.
“기사 전부 내리라고 지시하세요. 당장 사실무근이라고 정정보도 내게 하셔야 할 겁니다.”
“거, 내 자식 아니랄까 봐 성질만 급하긴…….”
성호는 시후를 말리기 위해 문 옆까지 따라와 서 있는 김정수 실장에게 대충 고갯짓했다.
“김 실장, 차 좀 내오라고 해.”
그 말에 정수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고요한 가운데 성호가 소파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당장에라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인내한 시후가 천천히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단둘이 되자 목소리를 나직하게 내리깐 성호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긴말하지 않는다. KU전자 해외사업본부에 팀장 자리 하나 그럴듯하게 만들어 놨으니 들어와서 경영 배워라.”
“…….”
“이 KU그룹의 차기 총수가 되려면 지금부터 입지를 다져 놔야지.”
하, 헛숨을 터뜨린 시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네 엄마와 동생 몫으로 되어 있는 주식은 전부 네 앞으로 돌릴 거다. 이미 차 변 시켜서 서류 다 작업 해놓았으니 거절할 생각은 마라.”
벌써 KU그룹의 고문변호사에게 제 뜻 전달한 성호는 번복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에 속이 뒤집히는 듯한 착각을 느낀 시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딴 말 하려고 이런 추잡한 짓을 벌이셨습니까?”
“입 조심해. 부모가 자식한테 한평생 일군 회사를 물려주려는데 어디가 추잡하다는 것이냐.”
“말했을 텐데요.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없을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성호가 우습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강시후,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이 강성호 핏줄이야. 핏줄만큼 무서운 게 세상에 없어. 네 몸에 흐르는 피는 어떻게 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내가 일평생 어떻게 키워놓은 그룹인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놈한테 홀랑 넘길까 보냐.”
한평생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회사를 키워왔다.
재계 순위 20위 안팎을 맴돌던 KU그룹을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은 강성호 회장의 잔혹함이 이룬 결과였다.
“전문 경영인한테 넥스트 게임즈 넘기고 회사로 들어와라. 1년만 팀장으로 실적 올리면 바로 상무로 올려줄 거다. 네가 허튼짓만 안 한다면 사장까지 5년도 안 걸리게 해주마.”
다른 이들의 피와 눈물, 희생으로 쌓아 올린 회사였기에 더더욱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에게 뺏길 수는 없었다.
“창영이 놈은 옛날부터 문제가 많았어. 툭하면 딴따라들과 염문설이나 흘리고 다니고,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그런 와중에도 제 엄마를 닮아서 주제 파악 못 하고 욕심만 그득하고…….”
시후의 미간이 험악하게 좁아졌다. 아무리 악마라고 한들, 죽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제 친아들을 서슴없이 입에 넣고 굴리는 모습에 헛숨이 터져 나왔다.
“이 강성호 얼굴에 먹칠해도 유분수지……. 창영이 놈이 내가 힘들게 키워놓은 회사 홀랑 말아먹는 꼴 두고 볼 수는 없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본론만 말하라는 듯 고개를 내리깐 시후가 물었다.
원수보다 사이가 나빴던 이복동생이었으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모욕하는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네 동생, 강창영.”
성호의 눈매가 매섭게 가늘어졌다.
“아직 살아 있다.”
“……네?”
“네 엄마는 죽었지만, 창영이 놈은 아직 숨 붙어 있다고.”
“……그게 무슨…….”
성호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후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함께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려진 강창영과 유서진은 합동 장례식까지 대대적으로 치른 후였다.
경찰에서도 두 사람의 시신을 확인하였다고 했고, 언론에서도 KU그룹 황태자의 사망 보도가 연일 이슈로 자리 잡았었다.
그런데…….
강창영이 살아 있다고?
“대외적으로 차기 회장은 창영이 놈이 오를 예정이었는데, 그놈이 반병신 돼서 산 송장으로 누워 오늘내일하는 걸 알면, 회사 주가는 더 바닥을 치고 주주들은 차기 회장으로 이 강성호 핏줄이 올라서는 안 된다고 떠들어대겠지.”
쯧, 혀를 찬 성호가 고개를 저었다.
“반병신 된 자식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죽었다고 하셨습니까? 멀쩡히 살아 있는 인간 장례까지 치르고?”
“멀쩡하기는 뭘, 의식도 안 돌아와서 식물인간 상태인데. 사고만 치고 다니는 한심한 놈인데 그것까지 알려봐야 좋은 거 없어.”
상상 이상의 추악한 본성을 마주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무리 그래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자신의 친아들을 사망한 것으로 꾸며 신고까지 하다니.
그것도 전부…… 회사를 위해.
등골이 서늘해진 시후는 성호를 꿰뚫을 듯이 노려보았다.
“제 어미 따라서 뒤지지는 않게 연명치료 하고, 나중에 의식 돌아오면 신분 바꿔서 해외로 보낼 거다.”
“……지금 그게 부모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어리석은 놈. 못할 게 뭐 있나? 당장에라도 오늘 주가를 보면 계산이 나오지 않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성호가 이내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모든 게 내 계산대로 돌아가고 있어. 네가 회사로 들어온다는 기사를 흘리자마자, 바닥 쳤던 주가가 다시 치고 올라가는 중이지. 그만큼 모두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다.”
시후가 잇새를 악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쥔 주먹이 거칠게 떨려왔다.
“이제 이쯤이면 충분히 나돌아다녔잖아. 마지막 경고야.”
성호는 모든 걸 씹어버릴 듯한 눈을 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맞부딪힌 시후는 모든 걸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계집애하고 이혼하고 회사 들어와라.”
밀려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시후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네 와이프, 제 아비 따라 스스로 목매다는 꼴 보기 싫으면.”
일순 새까만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겨울이 아버지가.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고?
“진짜 옥중 병사인 줄 알았냐?”
소름 끼치는 웃음이 말끝으로 흩뿌려졌다.
“네 아비는 그렇게 허술한 놈이 아니야.”
***
겨울은 느껴지는 두통에 신음을 흘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새하얀 천장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누군가 뇌를 잡고 쥐어짜는 듯이 머리가 욱신거렸으나 가까스로 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 병원의 응급실인 듯 보였다.
“겨울아, 괜찮아?”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남자는 다름 아닌 주형이었다.
“내가 근처에 차 타고 가다가 우연히 길에서 널 봤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하더라고……. 근데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겨울은 대답 대신 멍한 얼굴로 주형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의사가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쇼크 증상이라고 하더라. 혼자 그런 곳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밤도 늦었는데.”
계속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한 대 얻어 맞은 얼굴로 가만히 있는 겨울을 보며 주형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 있었어?”
그래도 답하지 않는 겨울에 작게 한숨을 쉰 주형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곧장 시후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일단 그럼 너희 남편한테 전화할게.”
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겨울에게 손목을 붙잡힌 주형은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으나 핏기가 전부 가신 듯한 창백한 표정은 마치 귀신이라도 만난 사람 같았다.
“……왜 그래, 겨울아?”
“……아니야.”
“어?”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텅 빈 동공이 휑하니 울렸다.
“강시후, 내 남편 아니야…….”
커다란 눈망울에서 방울진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혼도…… 전부 가짜였어.”
……그래.
우리는 애초에 진짜 부부가 아니었어.
서로 죽고 못 살 만큼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고…….
날 속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