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버림받는 기분
(69/112)
69. 버림받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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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버림받는 기분
2022.05.29.
“강시후, 내 남편 아니야…….”
커다란 눈망울에 고인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혼도…… 전부 가짜였어.”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주형의 미간 사이로 가느다란 실금이 그려졌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보아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었던 건 확실했으나, 알 수 없는 말만 계속하니 속이 답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결혼이 가짜라니?”
“…….”
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멍한 얼굴이 꼭 영혼이 전부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너 괜찮아? 얼굴색이 너무 안 좋은데.”
걱정스럽게 겨울의 어깨를 감싼 주형이 낮게 속삭였다. 그런 주형의 품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겨울은 이내 물기를 지우고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주형아. 다음에 얘기할게.”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주형은 입안이 씁쓸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집까지 데려다줄게.”
***
주형의 배려에 빠르게 아파트에 도착한 겨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내내 속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에 가까워졌고, 휴대전화는 시후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로 오랫동안 시달리다가 방전되어 까맣게 죽은 상태였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되뇌며 얼굴을 굳히고 침착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 집에 들어온 듯 보이는 시후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어둑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울컥한 겨울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칠 것만 같아 곧장 부엌으로 향해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을 잔에 따랐다.
석 잔째 말없이 냉수를 마시자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짝 다가왔다.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안 받고.”
“…….”
“내가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왜 말도 없이…….”
“오빠가 집에 있으라고 하면, 내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날이 선 목소리에 시후가 헛숨을 터뜨렸다.
“너와 나를 물어뜯으려고 환장한 기자들이 사방에 깔린 거 몰라?”
겨울만큼이나 폭발할 것만 같은 가슴을 누른 시후가 침착을 유지하며 답했다. 겨울은 말없이 분노를 삭이며 시후를 노려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겨울의 낯빛을 마주하자 거세게 미간을 좁힌 시후가 그녀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너 얼굴이 왜 그래.”
“그러는 오빠는 표정이 왜 그런데.”
“…….”
“…….”
순간 스친 찰나의 침묵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부유했다.
빈 잔을 테이블에 거세게 내려놓은 겨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 다 기억났어.”
“……뭐?”
“다 기억났다고.”
냉정한 겨울의 말에 시후의 눈이 커졌다.
“잃어버렸던 1년간의 기억. 우리가 어쩌다가 결혼하게 됐는지, 어떤 결혼생활을 했는지까지…… 전부.”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 까만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동요를 읽은 겨울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왜 그랬어?”
“…….”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거짓말했어.”
울컥 감정이 치받쳐 올라오자 또다시 눈가가 욱신거렸다.
“애초에 강시후 너와 난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그저 쇼윈도 부부였잖아.”
“…….”
“네가 나한테 그랬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여자가 필요하다고.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라고.”
이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저히 두 발로 바닥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가 없어 휘청거렸다.
“이건 날 농락한 거야…….”
그와 결혼을 하고 기억을 잃기 전까지, 허울뿐인 부부로 산 7개월은 겨울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내가…… 내가 널 사랑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강시후 너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 너를…….”
감정이 북받친 겨울의 눈가로 투명한 물기가 고였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잃어버렸던 1년의 기억, 그 속에는 겨울의 눈물과 아픔이 지독하게 서려 있었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지 않으면 숨 한조각조차 쉬고 살아갈 수 없었던 순간, 그래서 강시후를 미워해야만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재밌었니?”
“……뭐?”
“지금까지 나 가지고 노니까 재밌었어? 사랑한다고 몇 마디 거짓말로 떠들어대니까 마음에 몸까지 바치니까 좋았니?”
그 표독스러운 말에 상처 입은 시후가 입술을 달싹였다. 겨울을 향한 사랑은 단 한 순간도 거짓인 적 없었다.
하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전부 알아버렸으니까…….
제게 겨울을 사랑할 자격 따위는 없다는 것을.
그녀를 곁에 묶어 놓고 망가져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면, 이보다 더 망가질 겨울이 두려웠다.
“……미안해.”
“지금 내가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그래? 그 말로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아?”
목소리를 드높인 겨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설명하라고!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거짓말했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사랑했기에 했던 거짓말이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평범하게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다는 겨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조차 전부 바보 같은 자만이고 실수였다.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전부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미안해.”
“……하지 마.”
“거짓말해서 미안.”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고!”
분노에 찬 겨울이 소리치며 들고 있던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 가방에 맞아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물컵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굉음을 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균열 하나 없이 말끔했던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지며 흩뿌려졌다.
그 파열된 유리의 잔해만큼이나 가슴이 조각난 겨울이 제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대체 뭐가 미안한데? 뭐가 미안한 건지는 알아? 내가 왜 화를 내는 건 줄은 아냐고!”
“…….”
“전부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듯, 올려다보는 겨울의 눈빛이 애절했다.
제발 더는 여기서 상황이 악화시키지 말라고, 아직 돌이키려면 충분히 돌아갈 수 있다고…….
“우리 아직 이혼 신청은 철회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없이 잔혹해질 것이라고.
겨울의 말에 시후의 눈가가 사정없이 뒤흔들렸다. 낮게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인정할게. 내 욕심이었어. 너와 평범한 부부로 살아보려고 했던 거,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전부…….”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내뱉는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내 착각이고 오만이었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는 시후의 뼈마디가 잘게 진동했다. 겨울의 얼굴 앞으로 스치듯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상처받은 얼굴을 보며 시후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우린 애초에 함께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것 자체가 착각이었다.
겨울만 제 곁에 있으면 모든 걸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오만은 결국 그녀를 갉아먹을 터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사랑했던 찰나의 행복, 모든 건 환상이고 신기루에 불과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겨울은 허탈하게 물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며 숨이 가빠졌다.
우리 사이에 더는 숨기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눈물지었던 그날, 이미 서로 모든 과거에 얽힌 오해를 털어놓았으니 더는 비밀 없이 사랑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부질없는 하룻밤의 꿈에 불과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감추는 것이 많았고, 서로를 조금도 믿지 못한다. 겨울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지금 그만하자고 말하는 거야?”
“……기억이 났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야.”
겨울은 바닥을 뚫고 지하로 처박혀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우리가 했던 결혼 계약도 기억하지?”
감정을 누른 시후는 덤덤하게 물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우리 계약서대로 이행해야 할 거야. 이혼하는 즉시 가족들과 해외로 나가서 살겠다고 했던 약속.”
“……그게 할 말의 전부야?”
마른 숨을 삼킨 시후는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에 겨울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분명히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고 확신했는데, 불과 어젯밤만 해도 그의 넓은 품에 수도 없이 안겨 사랑을 속삭였는데…….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이 전부 신기루가 되어 사라지고, 눈앞에 보이는 건 덤덤하게 계약을 이행하라고 말하는 강시후였다.
“나쁜 새끼…….”
아무리 잔인해도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겨울이 원한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을 속인 시후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3개월 후에 그를 살리다 죽는 미래를 되새기면서도…….
심장에서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의 곁에 남고 싶다고.
“넌 진짜 나쁜 새끼야……!”
한 순간 폭발하듯 터진 눈물이 뺨을 타고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이성을 잃은 겨울은 시후에게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퍽, 퍽, 세게 휘둘러도 자그마한 손만 빨개질 뿐 시후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끝까지 나를 병신 만들어, 왜!!!”
생살이 찢어져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려다보는 시후의 눈빛이 너무도 슬퍼 보여 더 가슴이 옥죄어 왔다.
“차라리 매달려! 거짓말해서 미안했다고 빌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손을 내질러 시후를 때리는데, 일순 가느다란 손목이 시후의 손에 휘어 잡혔다.
“아!!!”
돌연 두 발이 공중으로 뜨자 놀란 겨울이 소리쳤다. 겨울의 작은 몸을 단숨에 안아 든 시후가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내려놔!!!”
겨울이 비명처럼 외치며 발버둥 쳤다. 시후가 다소 거칠게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자 그녀의 등으로 으스러질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움찔한 겨울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일순 붙잡힌 발이 공중으로 치솟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무작정 겨울의 발을 들어 올린 시후가 씹듯이 뱉었다.
“사람 미치는 꼴 보고 싶어?”
“…….”
그제야 겨울은 제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좁혔다. 깨진 유리잔의 잔해를 밟은 발에서 붉은색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던 걸까, 예리한 유리 조각들이 박힌 발바닥이 뒤늦게 욱신거렸다.
흠칫한 겨울이 시후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의 손에 의해 곧바로 붙잡혔다.
“가만히 있어.”
낮게 숨을 뱉은 시후가 다시 발을 들어 올려 조각에 난도질당한 살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곧바로 구급상자를 가지고 와 겨울의 발바닥에 박힌 조각들을 신중하게 제거했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는 듯이, 걱정이 가득 담긴 그의 손길은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
그 행동에 겨울의 가슴이 부서질 듯이 아파져 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늦었으니까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
치료를 마친 시후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지금 내 얼굴 보기도 싫을 테니까…… 내가 나갈게. 집에서 쉬어.”
차갑게 뱉은 시후가 뒤를 돌았다. 겨울의 눈가로 투명한 눈물이 하염없이 고였다.
현관으로 향하는 시후의 발걸음 소리가 겨울의 고막을 아릿하게 찢어놓았다.
“……가지 마.”
눈을 질끈 감은 겨울이 속삭이듯 한마디를 뱉었다.
“나 또 버림받는 기분 들게 하지 마…….”
……그 오래전 17살 때처럼,
또다시 날 혼자 두고 떠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