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계속 네 곁에 있어도 될까?
(7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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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계속 네 곁에 있어도 될까?
2022.06.29.
“……왔어?”
며칠 만에 마주한 시후의 얼굴에 겨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굳은 듯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겨울에게로 천천히 다가온 시후가 손을 뻗어 마른 뺨을 쓸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그 손길에 눈가가 시큰거렸다.
“괜찮아?”
겨울은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빠 눈엔 내가 괜찮아 보여?”
날이 선 목소리가 고요한 집안을 낮게 울렸다.
“미칠 것 같아……. 화가 나고 밉고 원망스럽고, 속이 터져서 잠 한숨 잘 수가 없어.”
강시후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수백 개의 이유를 곱씹고 되새기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 게 억울해서 잠이 안 왔다.
……원수의 아들이란 걸 알면서도, 날 배신하고 기만한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나한테 욕이라도 해주면 안 돼?”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왔다.
“내가 오빠한테 오만 정이 뚝 떨어지게, 감정 한 조각 안 남게 욕이라도 해줘. 꺼지라고 발길질이라도 해.”
억눌러왔던 감정이 왈칵 터지고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래야 내가 미련 없이 지울 거 아니야…….”
겨울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후에게서 쏟아지는 것은 애틋한 눈빛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겨울을 지켜보다가 팔을 뻗어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목을 놓아 우는 겨울의 등을 세게 부둥켜안으며 소리 없이 수면 아래로 침몰해갔다.
“……미안해. 자꾸 상처 주고, 널 울려서.”
한없이 예쁘고 어렸던 열일곱의 소녀는 깨지고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진 채로 또다시 제 품으로 날아들어 왔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옆에서 나날이 시들어가는 겨울을 품에 가두어 마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다 잊어. 나와 우리 집안과 얽힌 일은 전부 잊고 씩씩하게 잘 지내. 이제 어떤 식으로든 너 힘들게 하는 일 없을 거야. 너와 내 집안 사이에 있었던 일은 내가 책임지고 끝을 낼 테니까…….”
시후의 목소리가 갈라지듯 흘러나왔다.
“넌 다 잊어버리고 새 출발 해.”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산산이 찢어 놓았다. 한없이 무참해지는 기분에 흐르던 눈물마저도 멎었다.
……그 말은 날 놓겠다는 뜻이야?
겨울을 묻는 대신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더 애원하고 매달려봐야 저만 꼴사나울 뿐이었다. 표독스럽게 얼굴을 굳힌 겨울이 두 팔로 시후를 밀치고 눈물을 닦았다.
“자고 가.”
떠나려는 겨울의 손을 붙잡은 시후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그 손을 뿌리친 겨울이 헛숨을 터뜨렸다.
“……고맙네, 그렇게 말해주니까.”
다 알고서도 바보처럼 감정에 휩쓸려 매달릴 뻔한 걸 이렇게 말 몇 마디로 정리해주니 아주 고마울 따름이었다.
모든 게 거짓이었을지라도 사랑은 진짜였을 거란 희망,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 거라는 착각, 지긋지긋한 집안과의 악연을 버리고 단둘이서 어디로든 떠나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망상까지도 모두 산산이 부서뜨려주었으니 말이다.
“근데 어쩌지? 난 평생 강시후 너 안 잊을 거야. 평생 네 생각에 잠겨서 죽고 싶고 싶을 만큼 괴로워할 거야. 그렇게 물 한 모금 못 넘기고 불행하게 살다가 소리소문없이 죽어버릴 거야.”
신랄하게 공격하는 말들은 되려 겨울의 가슴에 날아와 생채기를 입혔다. 그래도 겨울은 꿋꿋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근데…… 넌 다시는 날 떠올리지 마. 내가 죽어도 찾아오지 마.”
이렇게 모진 말들을 듣고도 가만히 서 있는 시후에 겨울의 눈가에는 물기가 차올랐다. 저만큼, 아니 어쩌면 저보다 그가 더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오빠한테 주는 벌이야.”
이건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 자신에게 주는 최대의 형벌.
***
참혹하게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어느덧 이혼 확인 기일인 12월 16일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겨울은 시후가 없는 오전을 틈타 당장 생활에 필요한 짐을 챙겨 호텔로 돌아왔다.
아직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 이혼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새 집을 구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챙겨온 짐을 정리하는데 문득 가방 안에서 작은 상자가 툭 튀어나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상자의 뚜껑을 연 겨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서 여전히 밝게 빛나는 것은 열쇠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약 두 달 전, 기억을 잃고 시후를 경계하던 겨울에게 그가 제 마음을 표현하며 건넸던 선물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겨울이 가쁜 숨을 뱉어냈다.
그대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겨울은 오후가 되어 주형이 일하고 있는 치과로 향했다.
“2시간 동안 거즈 물고 있고, 피랑 침 나오는 거는 다 삼켜. 일주일 동안은 빨대 절대 사용하면 안 되고, 웬만하면 맵고 짠 건 피하고 반대편으로 식사해야 해. 음식물 끼면 양치질로 빼지 말고 물로 헹구고.”
지난주에 했던 약속대로 직접 겨울의 사랑니를 뽑아 준 주형이 발치 후 주의해야 할 사항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내일 퇴근하고 잠깐 와서 소독하고 가. 실밥은 일주일 뒤에 풀 테니까 다음 주에 오면 되고. 그리고…….”
“응, 그리고 또?”
“일요일에 나랑 어디 좀 가자.”
“어?”
갑작스러운 말에 겨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말에? 어디를?”
“가보면 알아.”
주형이 나지막이 웃었다.
***
일요일 아침부터 호텔 앞까지 차를 끌고 찾아온 주형을 보며 겨울이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어디 갈 기분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니 떠밀리듯 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안전 벨트 매. 꽤 오래 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대체 어딜 가는데?”
주형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회답하며 액셀러레이터를 시원스럽게 밟았다.
더 캐물을 기운도 없었기에 포기한 겨울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창문을 조금 내렸다.
빠르게 달린 차는 서울 외곽을 지나 경기도로 향했다.
약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수많은 인파로 바글거리는 한 놀이공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각종 화려한 장식들과 트리가 입구부터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여긴 왜 왔어, 유치하게?”
“머리가 복잡할 땐 몸으로 노는 게 최고야. 가자.”
“잠깐, 잠깐!”
무작정 자유이용권을 결제하고 전진하는 주형의 기세에 휩쓸려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눈부신 풍경이 펼쳐졌다.
알록달록 예쁜 장미로 펼쳐진 정원과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거대한 분수대를 지나 깊숙이 들어가니 각종 놀이기구가 시야를 정신없이 자극했다.
얼떨떨하게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주형이 겨울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자, 어서 타러 가자. 역시 처음은 저거지?”
길쭉한 손가락 끝을 따라 겨울의 시선이 흘렀다. 흡사 90도의 각도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를 보고 질색했다.
“애들도 아니고 저런 걸 왜 타. 싫어!”
“왜?”
“뭐?”
“혹시 겁먹은 건가 해서. 무서워?”
“허, 참……. 무섭긴 뭐가 무서워?”
주형의 도발에 넘어간 겨울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 타자, 타!”
고등학생 때 이후 처음으로 타보는 롤러코스터였다. 천천히 레일을 타고 올라가다가 뚝 떨어진 뒤 사정없이 위아래로 치솟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반쯤 떠밀리듯 탄 놀이기구였으나 막상 심장이 쫄깃해지는 속도감과 스릴을 온몸으로 체험하자 우울했던 기분이 치솟고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커다란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캐롤과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뒤섞이며 겨울도 서서히 이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스피드와 전율을 자랑하는 어트랙션을 연속으로 타고 있자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겨울도 결국 입을 벌리고 공포인지 희열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12월의 겨울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때렸으나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괴로움을 잊은 채 순간의 쾌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침만 해도 전혀 놀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운이 넘쳤다. 온종일 아이처럼 놀고 즐기다 보니 어느덧 일몰 시각이 가까워졌다.
“이제 집으로 갈까?”
“아직이야. 마지막으로 저것만 타고 가자.”
기진맥진해진 겨울의 어깨를 툭 친 주형이 놀이공원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관람 차를 가리켰다.
썩 내키진 않았으나 줄곧 우울했던 기분을 풀어준 주형에게 고마웠기에 그를 따라 기구에 올라탔다.
“와…….”
그런데 안 타면 후회했을 뻔했다. 창가에 붙어 앉아 내려다본 놀이공원의 풍경은 황홀 그 자체였다.
정상에 가깝게 다가가자 붉고 따뜻한 색의 불빛들이 저마다의 화려함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난생처음 본 절경에 마음을 사로잡힌 겨울이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주형이 나지막이 웃었다.
“예쁘지?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곧 크리스마스라 평소보다 배는 예쁘게 꾸며놓은 것 같더라고.”
“……아, 그러네. 크리스마스니까.”
새삼스럽게 벌써 한 해가 다 갔다는 생각에 두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이제 우리도 얼마 후면 서른이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겨울이 씁쓸하게 실소했다.
“난 어렸을 때, 서른이 되면 뭔가 대단한 일이 생길 줄 알았어. 내 힘으로 엄마 집도 해주고, 이경이한테 외제 차 하나 뽑아주고, 나는 내 일로 대박 터뜨려서 아무런 걱정 없이 주말엔 드라이브도 다니면서 여유롭게…… 그렇게 살 줄 알았어.”
“…….”
“이렇게 초라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왜 초라하다고 생각해?”
낮은 목소리에 창밖을 바라보던 겨울의 고개가 주형에게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 말에 겨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닫혀있던 입술이 툭 벌어졌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나하고 둘이 보내자.”
“……뭐?”
잔잔하던 갈색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형을 바라보자 그가 나지막이 웃었다.
“겨울아.”
“…….”
“나 아직도 너 좋아해.”
언제나 따스했던 목소리가 짙은 열기를 품은 채 무덥게 흘러나왔다.
“계속 네 곁에 있어도 될까?”
어루만지는 것처럼 다정한 시선이 내려왔다.
“이번엔 친구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