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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죄와 벌 (79/112)


79. 죄와 벌
2022.07.03.



“계속 네 곁에 있어도 될까? 이번엔 친구 말고.”

갑작스러운 주형의 말에 당황한 겨울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릴없이 달싹거리던 입술을 다물자 비좁은 관람차 안으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살짝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떨군 겨울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대답해주길 바라고 말한 건 아니야. 나도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고백이니까…… 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 대답해줘.”

조심스레 입을 연 주형이 나직하게 덧붙이자 겨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형의 고백 이후 조금 어색해진 두 사람 사이에는 아까와 다른 기류가 흘렀다. 폐장을 앞둔 놀이공원을 빠져나와 차로 이동할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겨울은 고개를 돌린 채 창문만 주시했다. 그런 겨울의 심란한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호텔로 향하는 차는 꽤 느리게 달렸다.


‘……주형이와 새로 시작하면, 적어도 지금처럼 괴로울 일은 없겠지.’

서로 집안에 얽힌 문제 같은 것도 없고, 숨기고 있는 비밀 같은 것도 없을 테고, 미래에 내가 죽을 일도 없이…….

그렇게 아무런 걸림돌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입술을 꼭 깨문 겨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며칠 전 보았던 유난히 수척한 모습의 강시후였다.

주형의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리는 강시후란 남자의 존재를 도무지 떨칠 수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 다음 주에 보자.”

“응. 너도.”

창밖에서는 어느덧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호텔 앞에서 주형과 헤어진 겨울은 비를 맞지 않도록 빠르게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짧은 거리였지만 살짝 젖은 어깨를 털며 1층 로비로 들어서는데, 문득 제 앞을 막아선 실루엣에 멈칫했다.

뻐근하게 고개를 꺾어 올린 겨울의 시야로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서른아홉의 강시후의 모습이 들어찼다.


“……뭐예요. 왜 연락도 없이 찾아와요?”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또 무슨 얘기요.”

“내가 2022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네가 어떻게 할지 확인하려고.”

고개 돌린 겨울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죠.”

겨울이 그의 팔 한쪽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겨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차례로 벗었다. 드러난 시후의 얼굴을 보자마자 겨울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렁이는 파도를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눈을 마주쳤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에 박주형 씨 차 타고 온 것 같던데. 오늘 같이 있었나?”

시후의 물음에 주먹을 꼭 움켜쥔 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시후가 덤덤하게 뒷말을 이었다.


“잘 생각했어.”

“…….”

“박주형은 내가 살고 있던 8년 후의 미래에서도 계속해서 널 좋아했어. 네 기일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찾아왔을 정도로……. 그 앞에서 한참 동안 울다 갔을 정도로 널 좋아했어.”

기일이라는 말에 겨울의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미래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피부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잘해봐. 네 옆자리에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나와 잘 어울리는 사람.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심장을 긁어내리는 듯했다. 제 마음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태연하게 다른 남자와 자신을 엮는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결국 내내 가슴 속에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지며 겨울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로 투명한 눈물이 서서히 고여 들었다.


“……내가 오늘 주형이한테 고백받으면서,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강시후, 당신 생각했어요.”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만큼은 그 순간의 쾌락에 집중하여 잠시간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편해지면 또다시 머릿속을 불쑥 파고드는 것은 강시후란 남자에 관한 생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 강시후밖에 없었어요.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머리에서 잊히지 않더라고요…….”

강시후, 강시후, 강시후. 온통 강시후…….

온종일 주형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통해 깨달은 것은 공교롭게도 시후에 대한 제 감정이 생각보다 더 깊다는 사실뿐이었다.

……이미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고,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가 이렇게도 한없이 많은데…….


“감정이 지워지지 않아…….”

울음을 터뜨린 겨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처럼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시후에 대한 미련 때문에 숨을 채 쉴 수 없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겨울은 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그런 겨울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곧바로 손을 거두자 차가운 목소리가 갈라지며 나왔다.


“그럼 어떡할 건데? 이렇게 내 곁에 있으면 넌 죽게 되는데. 날 살리려다가 죽는다고 몇 번을 말해?”

“…….”

“미리 미래를 알고 대처한다고 해도, 나와 너를 노리는 사람이 있는 이상 비극은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시후는 제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잇새를 악물었다. 가늘게 들썩이며 우는 겨울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뿐이야? 이제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가녀린 어깨를 움켜쥔 손이 떨렸다.


“내가 너희 아버지를 죽인 인간의 아들이란 사실을. 너희 집을 그렇게 만든 원흉의 핏줄이라는 걸…….”

염기 어린 채 나직이 흐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겨울은 한없이 깊은 심해로 침몰하는 기분이었다.


“알아요. 다 아는데…….”

그 모든 사실을 아는데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의 다른 누구로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이미 지금의 강시후는 내 손을 놓았다는 걸 아는데.

한없이 착하고 고운 말들로 내 가슴을 후벼 파며 이별을 고했다는 걸 잘 아는데…….

결국 또 버림받았다는 걸 잘 아는데도.


“겨울아.”

낮은 시후의 목소리가 목울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나는, 또다시 너를 잃은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아.”

흔들리는 음성으로부터 감정의 동요가 읽혔다.


“실감이 안 나지?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기분. 팔다리가 모두 잘려나가도 그보다 아프지는 않을 거야.”

겨울이 세상을 떠나고 보냈던 8년의 세월은 지옥보다 더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사랑하니까 보내줄 수밖에 없는 감정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난, 너와 다시 만나 숨 쉬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과거로 온 게 아니야. 오로지 함겨울 널 살리기 위해 찾아온 거야.”

“…….”

“그러니까 너만 살면 내 감정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 아니, 난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애원하는 듯 간절한 속삭임이 겨울의 고막을 태울 듯이 흘렀다.


“날 떠나도…… 네 앞엔 분명히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네 기분은 모른 척해.”

……지금 내 감정을 외면하라고?

이렇게 목 아래까지 차오른 마음을 전부 모른 척하라고?

겨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제 어깨를 옥죄어오는 커다란 손의 힘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요.”

겨울은 시후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이혼 확인 기일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몇 번이고 날 버리려는 남자였다. 이 이상 미련을 갖고 매달리면 구질구질해지는 쪽은 겨울이었다.


“할 얘기 끝났으면 이만 나가요.”

창가를 향해 뒤를 돈 겨울은 얼굴을 굳히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잠시 가만히 서서 그런 겨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후가 룸 밖을 나섰다.

홀로 남은 겨울은 또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

죽음보다도 더 아픈 진짜 상처가 뭔 줄도 모르는, 미련한 사람.

***

한편 시후는 겨울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그녀의 방에 홀로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일요일 새벽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밥 한 숟가락 뜨지 않고 온종일 계속해서 굳은 사람처럼 겨울의 방 안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던 시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져 창밖은 어두웠고, 우산을 써도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굵은 장대비가 내려오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시후는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결혼반지를 빼서 손에 쥐었다.

겨울을 떠나보내기로 했으나 지금까지 반지를 빼지 못한 것은 지독하게 잔상처럼 남는 미련 때문이었다.


“…….”

커다란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후가 꽈악 손을 움켜쥐었다.

복잡한 머릿속으로 수없이 반복되는 것은 며칠 전 겨울이 제게 남겼던 말이었다.


‘근데…… 넌 다시는 날 떠올리지 마. 내가 죽어도 찾아오지 마.’

냉정하고 악독한 말들이 가슴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그게 내가 오빠한테 주는 벌이야.’

모진 말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제발 날 잡아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던 그 붉게 물든 눈이 잊히질 않았다.

지금만 해도 손에 쥐고 있는 작은 반지가 겨울의 심장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이걸 놓으면,

시후의 가슴 안에서나마 숨 쉬고 있는 겨울의 미소가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힌 시후가 떨리는 눈꺼풀을 닫았다.


“…….”

만에 하나, 내가 강성호의 핏줄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다른 평범한 집안에서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너와 만났다면,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나는 너를 내 곁에 두고도 지킬 수 있었을까…….

시후는 미치도록 두려웠다.

또다시 오래전 악몽 같았던 그 시절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가는 것을 지켜만 보게 될까 무서웠다.

흐릿해진 머릿속에 매연처럼 피어오르는 것은 22년 전, 그날 일이었다.

***

시후가 8살일 때, 안방에서는 매일 같이 찢어질 듯한 고성과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한참의 소란 끝에 방 안에서 나온 시후의 어머니는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숨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요?”

“시후야. 여긴 왜 왔어. 2층 올라가서 자라니까.”

시후가 다가가면 그녀는 항상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시후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싹을 텄다.


“……엄마.”

“응?”

울다가도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던 어머니의 모습은 시후에게 더없는 상처였다.

아무런 도움도 의지도 되지 않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서.


“내가 얼른 자라서, 힘도 세져서, 아빠가 엄마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줄게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엄마…….”

“……우리 시후 든든하네.”

그녀는 또다시 울컥하여 눈가에 맺힌 눈물을 빠르게 지웠다.


“엄마는 우리 시후만 있으면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내가 밉지 않아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아빠를 닮았잖아요. 똑같이 생겼잖아요.”

“아니야.”

천천히 무릎을 굽혀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길은 다정했다.


“우리 아들은 마음이 엄마랑 똑같이 생겼어. 사람은 겉모습보다는 속이 더 중요한 거야.”

“…….”

“우리 시후, 잠 안 오면 엄마가 맛있는 팬케이크 해줄까? 먹으러 가자.”

어머니는 매일 같이 지옥에 살면서도 시후에게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항상 웃으며 상냥하게 사랑으로 대했고, 시후가 결핍된 사람으로 자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전 엄마가 해준 팬케이크가 제일 좋아요.”

그런 어머니의 노력을 알았기에 시후도 여덟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또래답지 않게 철이 들었다.


“우리 아들 기특하네…….”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아니, 빨리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다. 아버지 강성호로부터 어머니를 지키려면 최대한 빨리 힘을 기르고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방 안에 처박혀서 기어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죽은 듯이 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강성호는 시후의 어머니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시후를 등 뒤로 숨기고 가장 먼저 그를 보호했다.


“큰 소리 내지 말고 나중에 얘기해요. 우리 둘이 있을 때…….”

짜악!

어머니의 작고 마른 몸에 비하면 아버지는 거대하고 둔탁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한번 휘둘러지면 어머니는 종잇장처럼 저 멀리 나동그라졌었다.

그 모습은 시후의 눈앞에 똑똑히 그려졌고, 그는 밀려오는 충격과 두려움에 사지가 떨렸었다.


“하여간 싸가지 없는 게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뒷배도 다 죽은 별 볼 일 없는 년이……. 이걸 확 그냥 죽일 수도 없고.”

강성호는 자식이 보는 앞이라고 해서 자중하는 법이 없었다. 처가의 회사인 일성디스플레이를 인수한 뒤로부터는 그녀를 사람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며 하루가 멀다고 손찌검을 했다.


“때리지 마세요! 엄마 때리지 마요!”

“이 자식이…… 안 떨어져?!”

그리고 그날은, 어머니가 맞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시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진 날이었다.


“이 새끼가 제 어미 닮아서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떨어지라고!”

제 다리에 달라붙은 시후를 향해 강성호는 거대한 주먹을 치켜들고 휘둘렀다.

쾅, 둔탁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겁먹은 시후가 눈을 질끈 감았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저를 감싸고 대신 맞은 탓에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때 시후는 처음으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망가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지독한 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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