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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시공간을 초월하여 (92/112)


92. 시공간을 초월하여
2022.08.17.


시후에게 모든 걸 밝히기로 했지만, 겨울은 좀처럼 그에게 말을 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뭐라고 털어놓고 설명해야 그가 믿을 수 있을지 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느덧 하루가 다 저물어갔다.

결국 입을 열지 못한 겨울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내내 잠자리가 불편해 잠을 설쳤던 시후는 안락한 침대에 등이 닿기가 무섭게 곧바로 잠이 들었지만…….

겨울은 오래도록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눈을 감았다.

***

어디에선가 애타는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온통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조용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겨울이 아는 몇몇도 얼굴도 어수선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클레르의 실장님과 동료들, 드문드문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들, 어려서부터 일을 하며 친해진 이모님들…….

한데 모인 그들은 모두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상황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겨울이 조심스레 다가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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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러나 모두 겨울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겨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딘가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겨울이 아까부터 계속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상복을 입은 혜숙과 이경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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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경아?”

자그마한 목소리로 불러보아도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겨울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희수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 누군가 죽은 건가?

불길함에 묶인 듯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발을 움직여 가까이 다가가자 쓸쓸하게 안치된 고인의 영정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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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씩 빠르게 뛰던 겨울의 심장이 아래로 처박혔다. 겨울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액자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겨울이었다.

지금 이 장례식은 겨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것이었다.

……내가 죽었다고?

난 여기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손끝이 파르르 떨려오고 숨이 목 아래까지 가쁘게 차올랐다.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뒤에서 한 남자가 겨울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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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시후였다.

새까만 상복을 입은 그는 한껏 수척해진 얼굴로 한참 동안 겨울의 영정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겨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 없었던 남자였다.

그 누구보다 강인했던 그가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리며 말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놀라 호흡을 멈춘 겨울이 시후에게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당황한 겨울이 입술을 벌렸으나 이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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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에 있는데……!’

바람 소리만이 맴도는 입술을 필사적으로 벙긋거렸으나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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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여기에 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겨울이 울고 있는 시후의 앞에서 수없이 손을 흔들었으나 그는 겨울이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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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다들…….’

비단 시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겨울을 볼 수 없었다.

울컥 두려움이 솟아오른 겨울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시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겨울의 심장을 산산이 부서지게 했다.

나는 살아 있다고, 아직 여기에 있다고, 울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도 온기도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를 증명하듯 눈물을 흘리던 시후는 이내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오열을 터뜨렸다.

견딜 수 없는 절망과 두려움에 겨울은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이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보다도 심장이 도려져 나간 사람처럼 좌절하는 시후의 모습에 더욱 가슴이 아프고 쓰라렸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난다는 것은,

이토록 잔인한 일인 걸까.

죽음이란 것은 이렇게 가혹한 벽이던가…….

괴로움에 발버둥 치며 겨울은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발악했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아직 당신의 곁에 있다고.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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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겨울이 반사적으로 신음을 토해내며 허리를 일으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아무렇게나 쏟아졌다.

손발이 덜덜 떨려오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불안정한 호흡은 점점 더 가빠오고, 하얗게 질린 겨울의 안색은 곧 쓰러질 것처럼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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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왜 그래?”

막 눈을 뜬 시후가 겨울의 상태에 놀라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드넓은 품에 안기자 공포에 질렸던 심장이 녹아내리고 조금 전 그 일들이 전부 끔찍한 악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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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땀으로 범벅이 된 겨울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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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꿈 꿨어……?”

다정하게 속삭이는 음성이 고막을 적시자 두려움에 떨던 겨울이 울컥 눈물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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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흑…….”

너무도 두려운 꿈이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남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는 끔찍한 꿈…….

아니, 어쩌면 그건 꿈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지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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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흐윽…….”

어쩌면 운명이 겨울에게 내린 경고.

시후는 가늘게 떠는 겨울을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그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겨울은 지금이 아니면 그에게 영영 털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그의 웃음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괴롭더라도 감내하고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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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믿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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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네가 하는 말인데.”

시후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내는 겨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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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 네 말이면 난 뭐든 믿으니까…….”

불안감을 지워주기 위해 다독이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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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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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8년 후의 미래에서 찾아온 오빠를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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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좁힌 시후가 겨울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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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8년 후의 미래, 그러니까 2030년에서 날 살리기 위해 과거로 찾아왔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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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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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몇 달 뒤 다가올 머지않은 미래에…….”

부디 그가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

제 곁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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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를 살리려다가 죽어.”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시후의 얼굴로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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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고 네가?”

그것도 나를 살리려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시후의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에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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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날 찾아왔던 오빠는 끝까지 내 생각뿐이었어……. 내가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일부러 내가 죽는 미래를 말하지 않고…… 그저 떠나라고만 계속 말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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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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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날 살리기 위해 시공간을 건너 찾아와준 거였어. 그래서 날 사랑하면서도 계속해서 떠나라고, 이혼하라고 말했었어. 하지만 난 오빠의 손을 잡기로 했고…….”

겨울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시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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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는 지금 원래 살던 2030년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난 그 사람과 약속했지. 미래를 반드시 바꾸겠다고. 지금의 강시후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함께 힘을 합쳐 죽음이 아닌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함께 숨 쉴 거라고…….”

말끝을 길게 늘인 겨울이 눈물 젖은 눈가를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겨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시후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겨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뭐라 말을 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쏟아진 이야기들을 믿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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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힘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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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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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처음엔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 서른아홉의 강시후가 제게 정체를 밝혔을 때를 떠올린 겨울은 그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저를 갖고 놀리는 거거나, 미친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니까.

심지어는 두 눈으로 미래에서 온 강시후를 목격하고도 쉬이 믿기 힘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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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당황스럽기는 한데……. 전부 사실인 거지?”

믿기 어려운 말에 멍하니 있던 시후가 묻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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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살리려다가 죽었고…… 나는 8년 후의 미래에서 널 살리기 위해 찾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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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믿기 힘들겠지만, 다 사실이야.”

떨리는 손으로 겨울을 보듬어 안은 시후가 크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혼란스러운 시후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이해하기에, 겨울은 재촉하지 않고 그가 흡수하는 속도를 기다려주었다.

어떻게 하면 그가 믿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겨울은 문득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불과 10살일 적, 놀이터에서 시후와 아주 닮은 남자를 만났던 기억을.

너무 오래전 일이라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키가 훤칠했던 아저씨는 10살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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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기다릴게.’

그땐 영문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틀림없이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였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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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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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생생하게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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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었는지도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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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연하지. 그때 네가 나한테 첫마디로 혹시 삼촌 있냐고…….”

말끝을 흐린 시후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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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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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난 오빠를 처음 만나기 2년 전 10살 때……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 살의 강시후를 이미 만났었어.”

겨울의 말에 시후의 목덜미 뒤로 소름이 돋아났다.

확실히 겨울은 제게 처음 만났을 때 뜬금없이 삼촌이 있냐고 물었었고,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워낙 황당한 사건이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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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게 호흡하던 시후가 숨을 멈추었다.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은 혼란에 빠진 시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달싹였다.

……정말 진짜란 말이야?

머지않은 미래에 네가 죽는다는 사실이?

그런 너를 살리기 위해 미래에서 내가 찾아왔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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