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94/112)
94.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94/112)
94.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2022.08.24.
시후의 심장이 제어를 잃고 쿵쿵 빠른 속도로 뛰었다.
겨울이 겪은 모든 일이 전부 믿어지는 동시에 손발이 떨릴 정도로 거센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만에 하나 이번에도 겨울을 지키지 못하고 그 참혹한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생을 살아가야 할까.
겨울이 없는 세상은 조금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단 1분 1초도 숨 쉬고 살아갈 수 없었다. 이제는 내리쬐는 햇빛보다도, 들이마시는 산소보다도 더욱 보배로운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녀를 떠나보내는 미래가 도래한다면.
“…….”
책상에서 손을 뗀 시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마도 서른아홉 살의 나는.
지금의 내 마음과 마찬가지로 겨울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기에 다시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매정하게 계속해서 겨울을 떠나보내려고 했을 것이고, 스스로가 불행해지더라도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겨울은 그런 내 손을 끝내 잡아주었고,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곁에 있어 주겠다고 강인하게 속삭였다.
“…….”
미래의 자신이 남긴 영상이 끝난 후로도 시후는 흔들리는 눈으로 한참 동안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혼란에 잠식된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시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겨울이 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곤히 자는 겨울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간 시후는 그녀의 곁에 소리 없이 몸을 뉘었다.
느릿하게 손을 뻗어 하얀 피부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울이라는 이름이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릴 만큼 눈처럼 뽀얀 얼굴에 흑갈색 머리카락, 눈꺼풀을 촘촘하게 메우고 있는 가느다란 속눈썹을 따라 시후의 시선이 흘렀다.
왠지 울컥 감정이 북받쳐오며 눈가에 열기가 몰려왔으나 가까스로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수없이 누르며 시후는 한참 동안 겨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지치지도 않고 약 두 시간 동안 말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겨울이 콧잔등을 찡긋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깼어?”
“으음…….”
정오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커튼 틈으로 밀려들어 오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겨울이 기지개를 켰다.
“몸은 좀 어때. 열은 떨어진 것 같은데.”
“이제 완전히 괜찮아. 걱정시켜서 미안.”
머쓱하게 웃은 겨울이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환자한테 병간호를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내가 환자로 보여?”
“그럼 아니야? 배에 아주 이만한 날붙이가 들어갔다 나왔는데.”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겨울이 몸서리쳤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더 심하게 다쳤으면……으으.”
날카로운 선단이 주요 장기를 비켜나간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더불어 시후의 회복력은 남들보다 월등했기에 부상 정도에 비해 훨씬 빠르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 자. 아직 안색이 안 좋은데.”
나지막이 웃은 시후가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그녀가 작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니, 아니. 자는 것보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애교가 뚝뚝 묻어났다.
“나 안아줘.”
사랑스럽게 속삭인 겨울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배시시 웃었다.
“오빠가 안아주면 다 좋아질 것 같아.”
세상 깜찍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곧장 팔을 벌렸다. 작은 몸을 살며시 끌어안아 제 가슴으로 당기니 푸스스 귀여운 웃음소리가 고막을 함빡 적셨다.
“귀엽게 굴기는…….”
붉은 입술에 쪽 입맞춤하고 도로 강하게 끌어안아 여린 등을 녹녹하게 보듬었다.
“……고마워, 겨울아.”
“뭐가?”
“그냥 다.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나한테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아 준 거, 내 손을 놓지 않아 준 것도 전부…….”
진솔한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한 순간, 더 이상의 흔들림은 없었다.
기적처럼 서로를 향한 마음이 통한 것처럼 미래에 닥친 운명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약속할게.”
……너는 내 생의 유일한 구원.
“널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이제는 내가 너를 잡아줄 차례였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도록, 아래로 추락하지 않도록…….
어떠한 순간에도 다시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을 것이었다.
“하루하루 함께 같은 숨을 나눠 마시면서, 평생 너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햇살보다 환한 너의 웃는 얼굴로 아침을 시작하고,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며 하루를 마무리하겠다고…….
“사랑해, 겨울아.”
나직하게 속살거린 시후가 부드럽게 고개 숙여 겨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듯 커졌던 눈이 이내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나도 사랑해, 오빠.”
조금 쑥스럽게 속삭인 겨울이 숨소리처럼 웃으며 하얀 볼을 검지로 긁적거렸다.
“정말 많이 좋아해…….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싶을 만큼 사랑해.”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져 시후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아니, 이제 사랑이라는 말로는 전부 표현이 안 될 만큼의 감정이었다.
……평생에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었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고,
마음을 풀어헤칠 사람도, 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너는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아.”
앞에서 느슨하게 쏟아지는 무게에 겨울이 야트막한 숨을 터뜨렸다. 그 숨결 한 조각까지 새어 나올 틈 없이 덮은 시후가 말캉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당겼다.
순식간에 여린 몸 위로 올라온 거대한 체구는 겨울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통통한 입술 위를 연하게 핥다가 강하게 빨아들이며 압력을 조율하던 시후가 비좁은 틈을 벌리며 깊게 파고들었다.
점막과 점막이 마찰하는 소리가 질척하게 고막을 울리고 점점 더 커지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겨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린 입안을 전부 소유할 듯이 격하게 율동하는 말캉한 형체에 겨울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잠깐만…….”
잠시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맞붙여오는 기세가 환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여린 손가락 틈새로 길쭉한 손가락을 밀어 넣은 시후가 그대로 매트리스 위로 꾸욱 눌렀다.
“……!”
이내 맨살로 와닿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겨울이 몸을 움찔 떨었다.
살결을 문지르던 손이 점차 위로 올라오자 겨울의 입술 틈새로 달뜬 숨결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다 낫기 전까지는 절대 안정 취해야 해.”
강하게 밀착해오는 골반에 심장이 벌렁거렸으나 가까스로 이성을 찾았다.
봉합한 부위가 아직 완전히 아물기 전이었기에 격한 운동은 절대 금물이었다.
“함겨울을 앞에 두고 어떻게 절대 안정을 취해?”
사랑을 나누는 과정 역시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종의 운동.
말랑한 살을 부드럽게 쥐고 주물럭거리는 엉큼한 손길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겨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안된다니까으아……!”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버린 겨울의 앞에서 픽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어 늘렸다.
톡 튀어나온 입술에 쪽 입을 맞춘 시후는 겨울의 뺨을 보듬으며 웃었다.
“다 나으면…….”
한껏 젖은 음성에 겨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재우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산부인과를 다녀온 뒤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온종일 시체처럼 누워 있던 희수는 재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비척비척 현관문을 나섰다.
“우리 친구로라도 편하게 만나면서 지내자.”
한강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희수를 부른 재환은 그녀의 스테이크를 대신 썰어주며 말했다.
“내가 너 신경 쓰여서 그래.”
몇 번이고 제 연락을 무시했던 희수였기에 재환은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
그러나 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온 세상 우울을 혼자 다 흡수한 여자처럼 말없이 스테이크를 깨작거릴 뿐이었다.
“가족들한테는…… 임신한 거, 얘기했어?”
“아니, 아직.”
“최대한 빨리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늦을수록 더 걱정하실 텐데.”
“…….”
“아이 아빠한테는…… 얘기했어?”
재환의 말에 희수가 설핏 헛숨을 터뜨렸다.
이내 태연하게 얼굴색을 바꾸고 씩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얘기했어, 이미.”
“……아이 아빠가 대체 누구인데?”
……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신재환, 바로 너.
희수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썸 탔던 남자. 좀 당황하긴 해도 바로 결혼 날짜 잡자고 하더라고.”
시선만 피하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입술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빠도 더 이상 나 걱정하지 마. 애 지울 생각도 없고,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울 생각도 없어.”
“…….”
“남편 될 사람 되게 괜찮은 사람이야. 나한테 되게 잘해주고, 능력도 있어. 멋있는 사람이야.”
애써 억지로 들어 올린 입꼬리가 욱신거렸다.
“오빠는 오빠 애인한테나 잘해줘. 나는 진짜 괜찮으니까.”
“…….”
재환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선을 긋는 희수에게 더 이상 다가가는 것은 간섭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여동생을 여자친구로 오인한 것도 나서서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
“집에 데려다줄게. 차에 타.”
“아니야. 나 지하철 타고 갈게.”
차에 올라탄 재환의 호의를 희수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오늘 밥 맛있게 먹었어. 잘 들어가.”
더 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아 희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재환은 지하철역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희수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녀가 역사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하아…….”
역사 안으로 들어온 희수는 개찰구에 카드를 찍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깊게 한숨을 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잔 기억도 없는데 갑자기 애를 가졌다고 하면, 신재환은 뭐라고 말을 할까.
진짜 내 애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부터 해보자고 하려나.
아니면 미안하다고, 지우자고 하면서 돈을 쥐여줄까.
그것도 아니면…….
“……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