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 사랑스러운 여자 (95/112)


95. 사랑스러운 여자
2022.08.28.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흐르고, 새해의 첫날인 1월 1일의 아침이 밝았다.

주말 동안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겨울과 시후는 온종일 한 몸처럼 붙어서 밤낮없이 꽁냥거리느라 바빴다.

한 해를 여는 날인만큼 꼭 손수 떡국을 끓여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겨울은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환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 탓에 시후는 식탁에 앉아 요리하는 겨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뽈뽈거리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겨울을 귀엽게 바라보던 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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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돌연 백허그 당한 겨울이 국자를 쥔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굳었다.

어리숙한 모습이 사랑스러워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겨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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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보는 못하는 게 없네. 떡국도 잘 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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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인터넷에 검색해서 대충 요리법대로 끓인 거야. 맛은 나도 자신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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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위해서 끓여준 건데 독을 탔어도 맛있게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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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오바하긴. 얼른 가서 자리에 앉아 있어. 하도 움직여서 봉합한 부위 다 터지겠다.”

겨울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끌어안은 팔에 꿋꿋하게 힘을 준 시후가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여린 솜털 하나하나 핥듯이 키스한 시후가 야릇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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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보는 부족한 게 뭘까. 귀엽고 섹시하고 똑똑하고 멋있고……. 99점짜리 부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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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00점 아니고 99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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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점은 모닝 뽀뽀 안 해줘서 삭감.”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시후에 겨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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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휴, 이상한 소리는. 기운 넘치면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나 꺼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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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거대한 체구를 하고는 말 잘 듣는 대형견처럼 순순히 떨어져 냉장고로 향하는 모습이 귀엽지 않을 수 없었다.

흘끗 시후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은 겨울이 국물을 한 국자 떠올렸다가 화들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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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뜨거워!”

간을 보려다가 그대로 혀를 데인 겨울이 얼얼한 혀를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그 작은 소리에도 김치를 꺼내다 말고 달려온 시후가 다급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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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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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였어……. 간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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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봐.”

엄지로 겨울의 턱을 지그시 눌러 벌린 시후가 살짝 내밀어진 겨울의 혀를 향해 호, 입바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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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뭐 하는 거야……!”

당황한 겨울이 반사적으로 혀를 집어넣었으나 시후는 세상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수기에서 얼음을 뽑아 든 시후가 겨울의 입술을 잡고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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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해봐.”

얼떨결에 입을 벌리자 차가운 얼음 한 조각이 입술 틈새를 파고들어 얼얼한 혀 위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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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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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괜찮아.”

하도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진 겨울이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틈을 타 고개를 내린 시후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겨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능숙하게 침입한 그가 얼얼하게 데인 점막을 부드럽게 휘젓자 겨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짧지만 강렬한 키스 끝에 떨어진 시후가 나직하게 웃으며 겨울의 볼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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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키스도 했으니까 이제 100점짜리 부인이네.”

얼음이 전부 녹아내린 입안은 어느새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으로 흥건했다.

아침부터 과하게 섹시한 남자의 기습공격에 KO 당한 겨울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새해 첫날 떡국을 함께 먹은 뒤, 겨울과 시후는 앞으로의 구체적인 대처 방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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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당분간은 홍 비서 외에 수행 기사를 따로 고용해서 출퇴근할 예정이야. 그리고 회사 내외로 보안을 강화할 거고, 개인 경호원도 한 명 더 붙일 생각이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시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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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너한테도 수행 기사 한 명과 경호원 한 명을 추가로 붙일 거니까, 당분간은 불편하더라도 참아.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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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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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마다 편하게 연락해서 타고 다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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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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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현재로는 호텔 주차장에서 날 피습한 배후가 강 회장이라는 물증이 없으니까 이렇게 경비를 강화할 수밖에. 일단 그 인간을 확실하게 무너뜨릴 물증을 잡을 때까지만이야.”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후가 서재에서 들고 온 작은 상자를 겨울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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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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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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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너한테 오늘 선물하려고 저번 주에 미리 사둔 시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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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계는…….”

상자를 열어본 겨울의 동공이 미세하게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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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미래에서 온 내가 남기고 간 물건 중에, 네가 사고 당시 끼고 있었던 시계와 같은 시계야.”

그 말에 겨울의 심장이 쿵 아래로 내려앉았다.

미래가 이미 꽤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큰 틀에서는 변화 없이 정해진 운명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했다.

이어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뚫고 시후의 낮은 음성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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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네가 사고 당시에 끼고 있었다는 이 시계,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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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이……?”

시후는 투명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낡은 시계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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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조사 기록을 보면 미래에 사고가 일어난 건 3월 22일 새벽 3시경이라고 했어. 그런데 이 손목시계는 6시 34분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야.”

시후의 말에 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본 겨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뾰족한 시침과 분침은 오차 없이 정확히 6시 34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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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계는 이미 발견 당시 6시 34분에 멈춰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왜 시계가 다른 시간으로 맞춰져 있었는지, 그게 조금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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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나는 시계를 패션으로만 차지는 않아서 시간 정확히 맞춰놓고 다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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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너무 과하게 깊이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나는 왠지 미래의 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시계로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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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34분…….”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사건 조사 기록을 보면 실질적인 사인은 익사였던 겨울이 폭발에 휘말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 직후에는 살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고, 방법은 차고 있던 손목시계밖에 없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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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으로서는 그냥 비약이야. 단순히 시계가 고장 났던 걸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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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미래의 나는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정말 그의 말대로 무언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기에 속이 답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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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시계는 버리는 걸로 하자. 불길한 물건이니까…… 내가 더 좋은 걸로 새로 사줄게.”

손목시계가 든 선물 상자를 가져가려는 시후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은 겨울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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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원래 나한테 주려고 했었던 시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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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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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받고 싶어. 이걸 받는다고 해서 같은 미래가 반복되진 않을 거란 거 알잖아.”

어디까지나 시후의 사랑이 듬뿍 담긴 선물이었다.

숨을 거둘 때 끼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애정이 가득 담긴 물건이 불길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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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날 위해 직접 골라서 사준 시계인데, 이렇게 버려지는 거 싫어.”

단단한 눈빛이 정면으로 올곧게 부딪쳐오자 시후의 가슴이 일렁였다.

흔들림이나 동요 없이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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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이런 거로 흔들릴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오빠 곁에 있겠다고 결심도 하지 않았을 거야.”

저보다도 더욱 운명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은 겨울일 텐데도, 그녀의 결정은 단호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잠시간 마주하자 시후는 겨울이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울컥 감정이 치받쳐 올려온 시후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알면 알수록 내면이 단단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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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졌다. 이건 네 거야.”

픽 웃음을 흘린 시후가 선물 상자 안에 곱게 들어 있는 시계를 꺼내 들었다. 겨울의 가느다란 손목을 끌어당겨 알맞게 채워주었다.

촘촘하게 빛을 내는 실버체인과 큐빅은 하얀 손목과 눈이 시리도록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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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다음 주 주말쯤이면 나도 다 나을 것 같은데, 그때 여행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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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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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진짜 신혼여행. 연말에 가기로 했었는데 못 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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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진짜 좋지! 그런데 오빠 시간 낼 수 있겠어? 바쁜데 무리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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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쯤이면 신작 게임 런칭하고 프로젝트 하나 마무리 짓는 거라 시간 낼 수 있을 것 같아.”

부드럽게 미소지은 시후가 커다란 손을 뻗어 겨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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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여행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일에만 집중했겠지만, 지금은 하루하루 1분 1초 가는 시간이 아까워. 너와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꾸밈없이 솔직하기에 더없이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저를 향한 애정이 물씬 느껴져 겨울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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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희수는 재환을 만나고 집에 도착한 뒤, 해가 바뀔 때까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왜 신정에 집에 한 번 오지 않냐는 엄마의 서운함 섞인 전화도 한 귀로 흘려보내고 그저 멍하니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는 허공을 바라보기도 힘들어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워들고 아무런 유튜브 채널이나 하릴없이 틀어놓았다.

또 덧없이 몇 시간이 흐르고, 문득 실시간 생방송 중인 한 개인 채널에 희수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통화 어플을 통해 고민 상담을 진행해주는 채널이었는데, 어플 내의 기능을 이용하여 음성 변조도 해준다고 적혀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희수는 홀린 듯 그 생방송 중인 유튜버의 아이디를 입력해 통화를 걸었다.

***

그 시각, 재환은 새해를 맞아 어머니의 봉안당을 방문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약 2시간 정도의 먼 거리였기에 노래라도 틀어놓기로 하고 유튜브를 틀었는데, 때마침 구독하고 있는 채널 중 하나에서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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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사람 생방송 중이네.”

실시간으로 구독자들에게 고민 상담을 받아 해결해주는 컨텐츠를 주력으로 하는 유튜버였는데, 꽤 입담이 좋아 종종 아무 의미 없이 틀어놓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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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어떤 불쌍한 중생들이 있는지 한번 들어볼까.”

세상 기구한 삶을 사는 기상천외한 고민이 많았고, 어차피 강 건너 불구경이었기에 막장 드라마 보듯이 들으면 나름으로 재미가 있었다.

오늘도 별생각 없이 방송을 틀어놓았는데, 이번 사연도 역시나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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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룻밤 실수로 임신을 하셨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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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다니까요……? 진짜 딱 하루였는데……. 그냥 실수였는데…….

전 남자친구와 술을 마시고 하룻밤 실수를 했는데 하필 임신이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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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참. 그 전 남친인지 뭔지 완전히 상놈 새끼네. 확 그냥 거기를 떼어버리든 해야지…….”

쯧쯧 혀를 찬 재환이 혼잣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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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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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뭔데? 설마 그 자식이 지우라고 난리 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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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빠가, 애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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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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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아빠인지 몰라요……. 아니, 저랑 잔 것도 기억을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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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황당한 말에 게슴츠레 떠 있던 재환의 눈이 조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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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잔 것조차 기억을 못 할 수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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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이는 낳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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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아야죠. 낳아야 하는데……. 나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내 인생 이제 어떡해요오오…….

고민 상담을 하던 여자는 엉엉 목을 놓아 오열하기 시작했고, 당황한 유튜버는 어쩔 줄 몰라 말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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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요, 구독자님. 일단 진정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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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에요. 아홉수. 아홉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아직 서른도 넘지 않았고 아홉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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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지. 이제 해 바뀌었으니까 서른이지…….

이제 서른?

어제까지 스물아홉, 오늘은 서른 살?

어딘가 묘한 기분이 밀려오며 재환의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잡혔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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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내가 무슨 말도 안되는 생각을. 그럴 리가 없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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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민희수 30년 인생 완전히 제대로 꼬였어요! 망했어요!!!

쿵.

재환의 심장이 발가락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설마 하던 예감이 사실이 되어가며 재환의 동공이 소리 없이 크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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