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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해피엔딩 (96/112)


96. 해피엔딩
2022.08.31.



“희, 희수……?”

놀라 호흡을 멈춘 재환이 말을 더듬었다.

제 귀를 의심한 그가 황급히 핸들을 돌려 차를 갓길에 멈춰 세웠다.

빠르게 비상등을 켜고 핸드폰을 거치대에서 떼어내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구, 구독자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흥분 가라앉히시고…….

-그리고 그 자식, 심지어 여자친구도 생겼더라니까요?! 내가 진짜 열불이 나서 그냥!

감정이 격양된 사연자는 자신이 직접 제 이름을 말한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울화를 토해냈다.


-아니, 여자친구까지 있어요?

-네!!! 엄청나게 어리고 예쁘고, 완전히 상큼 깜찍 큐티 뽀작해 보이는 여친이 생겼더라고요……!

희수로 추정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차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가정이 점차 확신으로 번지자 재환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구독자님, 그 아이 아빠한테 여친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봤어요……. 둘이 애프터눈티 세트인지 나발인지 처먹으러 왔더라고요……. 아주 팔자도 좋지.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쳐? 애프터눈티 세트?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자기들끼리 신났더라고요! 난 그 와중에 걔네 앞에서 븅신 같이 대자로 구르기나 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재환의 동공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사연자의 음성은 알아볼 수 없도록 변조되어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희수가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에 임신 중인 올해 서른 살의 민희수가 두 명 이상일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그러면 구독자님은 아이 아빠한테 끝까지 사실을 말하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저랑 잔 것도 기억 못 하는 남자한테 제가 뭘 얘기해요?! 어떻게 얘기해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진 재환의 머릿속으로 극심한 혼란이 파고들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관자놀이를 짚자 심장이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어지럽고, 근래 있었던 일들이 뒤죽박죽으로 떠오르자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아이 아빠 되는 사람이 전남친이고, 잔 것도 기억을 못 한다고?

분명히 전날 희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이 아빠가 썸 탔던 남자이며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러면 진짜 아이 아빠는.

혼란이 썰물처럼 밀려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재환이 확 고개를 쳐들었다.

곧장 핸드폰을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거세게 액셀을 밟자 멈춰 있던 차가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했다.

흡사 곡예 하듯 운전하여 도착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집에 들어온 재환은 외투도 벗지 않고 즉각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무작정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쓰레기통을 뒤집어 내용물을 전부 엎질렀다.

정신없이 쓰레기들을 파헤치던 재환은 얼마 전 침대 밑에서 발견했던 주인 없는 귀걸이를 찾아 들었다.


“……이 귀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최근 집에 여자를 데려온 적도 없었고, 여동생 재연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큐빅이 박힌 리본 모양 귀걸이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재환은 곧장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희수의 SNS에 들어가 게시되어 있는 사진들을 쭉쭉 넘겨보던 재환의 손가락이 어느 한 사진에서 멈추었다.


“이건…….”

약 두 달 전에 올라온 셀카였다. 손가락 하트를 취하며 웃고 있는 희수의 귓불에서 화려하게 빛을 내는 것은 리본 모양 귀걸이였다.

제 손에 들려있는 귀걸이와 사진 속 귀걸이를 번갈아 살핀 재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틀림없어…….”

색깔과 크기, 디자인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귀걸이였다.


“역시 그날 희수가 우리 집에 왔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희수의 귀걸이가 침대 밑에서 발견될 이유는 없었다.

혼란에 물들어 있던 눈동자의 흔들림이 잦아들며, 굳게 확신한 재환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

일주일이 어떤 정신으로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가족들에게도, 주변 지인에게도, 심지어는 아이의 아빠인 재환에게도 임신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희수는 예약 시간에 맞추어 병원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쉬고만 싶었으나, 오늘 검진에 꼭 나오라는 의사의 당부가 마음에 걸려 할 수 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아…….”

불쌍한 아이에게는 죄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건강하게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제 나도 어른이야.”

주민등록증에 잉크가 마르고도 남았을 서른인 데다가, 어엿한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우울해하며 바보처럼 얼빠지게 굴 수는 없었다.

비치된 의자에 앉아 호명을 기다리며 희수는 크게 심호흡했다.


“민희수 씨? 계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이윽고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 희수가 당차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번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고개를 끄덕인 희수가 옆에 놓인 가방을 주워들고 경황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 긴장이 몰려와 마른침을 삼키고 진료실을 향해 걸어가는 찰나였다.

싱긋 부드럽게 미소 지은 간호사가 희수를 멈춰 세우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같이 오신 분은 남편분이신가요?”

“……네?”

알 수 없는 말에 희수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돌연 경직된 어깨로 단단한 팔이 느슨하게 감겨왔다.


“네. 맞습니다.”

움찔한 희수의 동공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제가 아이 아빠입니다.”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에 희수의 호흡이 뚝 끊겼다. 고개 돌린 희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뛰어온 듯 거친 숨을 뱉는 재환이 희수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같이 들어가도 됩니까?”

“네. 물론이죠. 함께 들어가셔도 됩니다.”

상냥하게 답한 간호사가 흔쾌히 손짓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서 있던 희수를 일깨운 것은 재환의 낮은 속삭임이었다.


“어서 들어가자.”

따뜻하게 웃으며 희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재환이 뒷말을 덧붙였다.


“우리 아이 만나러.”

“…….”

쿵, 쿵, 쿵.

일순 멈추었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 고동 소리를 느끼며 희수가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울컥하고 차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며 제 손을 작게 움츠렸다.

무사히 검진이 끝난 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받고 재환과 희수는 함께 병원을 나섰다.

내내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꼭 다물고 있던 희수는 재환의 차에 올라타서도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계속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재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긴 어떻게…….”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일 언제인지 알아봤어. 왠지 너 응급실 갔었던 병원 산부인과로 내원할 것 같아서.”

“…….”

“미안해. 바보같이 너무 늦게 눈치를 채서…….”

재환의 말에 왈칵 감정이 터진 희수의 양 볼로 투명한 눈물이 소리 없이 굴러떨어졌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속앓이했던 설움들이 파도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릴없이 터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기억 안 나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안 거야?”

“그게 사실…… 유튜브에서 네가 고민 상담 얘기한 거, 우연히 들었어. 네가 방 안에 떨어뜨리고 간 귀걸이를 발견하고 확신했고.”

움찔한 희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음성변조가 되었기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유일하게 알아보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제일 들키고 싶었던 남자였을까.


“그리고 여자친구 같은 거 없어. 전부 오해야.”

“……오해라고? 그때 카페에서 같이 있던 여자는?”

“여동생이야. 신재연.”

“……재연이? 그 여자가 재연이라고?”

“응. 대학 가면서 얼굴이 많이 바뀌었거든.”

“……그럴 수가…….”

어쩐지 여자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혼자 바보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희수가 허탈한 숨을 터뜨렸다.

그런 희수를 바라보던 재환이 커다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동안 혼자서 삭히느라 힘들었지…….”

다정한 손길에 울컥한 희수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가냘프게 들썩이는 어깨를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재환이 희수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맘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앞으로 내가 아이 우리 아빠로서…….”

“…….”

“그리고 너의 남편으로서 최선을 다할게.”

쏟아지는 온기에 희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내내 품어왔던 걱정과 달리 재환은 희수와의 결실을 외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평생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이제 혼자 힘들어하지 마.”

진심이 담긴 속삭임에 희수의 눈망울이 요동쳤다.

그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던 희수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개자식.”

“……어?”

“나쁜 놈, 이 알코올 중독자, 변태……! 안경잡이! 개발자!”

예상과 다른 전개에 당황한 재환이 커다랗게 뜨여진 눈을 깜빡거렸다.


“어, 음……. 개발자도 욕인 거야?”

“이 망할 개발자식…….”

“그렇게 들으니 욕 같기는 한데.”

헛웃음을 터뜨린 재환이 울먹거리는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욕해. 더 해. 하고 싶은 만큼 실컷 해. 너 마음 풀릴 때까지…….”

“……싫어. 우리 아기 듣는 곳에서 아빠 욕하기 싫어.”

아이처럼 아무렇게나 눈을 비벼 닦은 희수가 재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한테 잘해. 안 그러면 평생 둘째는 없을 줄 알아.”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희수가 뾰로통하게 일갈했다.

세상 귀여운 경고에 웃음을 흘린 재환이 희수의 하얀 볼을 쓰다듬어 물기를 전부 거두어내었다.

부드럽게 고개를 비튼 재환이 촉촉하게 젖은 희수의 입술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희수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이내 입술 안을 파고드는 따스한 감촉에 얼었던 가슴이 하릴없이 녹아내렸다.

지금껏 담아두었던 감정과 하지 못했던 말을 전부 털어놓는 것처럼 재환은 희수의 입술을 오래도록 탐닉했다.

정성스럽게 내부를 훑는 감각에 희수가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어깨를 살며시 움켜쥐었다.

그 어떤 언어보다도 진한 진심이 느껴지는 달콤한 키스였다.


 


“살면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너 하나밖에 없어.”

느릿하게 벌어진 입술이 뜨겁게 속살거렸다.


“비록 어렸을 때, 그렇게 헤어졌었지만…… 한 번도 내 안에서 너를 놓아본 적 없었어.”

자그마한 손을 움켜쥔 재환이 희수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부드럽게 재킷 안으로 손을 넣어 반지를 꺼낸 재환이 희수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천천히 끼워 넣었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왼손 약지에 알맞게 자리한 반지를 바라보는 희수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나와 결혼해줄래?”

결코 아이 때문에 떠밀려서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듯, 재환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내 가느다란 손가락 틈새로 길쭉한 손가락이 파고들어 뒤엉키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온기에 희수의 가슴에는 봄바람이 불어왔다.

굳건한 장벽처럼 얼었던 가슴이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희수가 흔들림 없이 굳건한 재환의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비록 과정은 바보스럽지만…….

이 사랑의 끝은 해피엔딩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 결혼해줄게.”

희수가 햇살처럼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리 아이 누구보다도 행복하도록, 소중하게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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