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나비효과
(1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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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나비효과
2022.09.21.
-네놈이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하느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강성호 회장이었다.
몇 번이고 의식이 끊길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은 시후가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함겨울, 어디로 빼돌리셨습니까.”
건너편에서는 황당하다는 듯한 헛숨이 들려왔다.
-네 와이프를 왜 아비한테 찾아? 새벽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라.
전화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일방적으로 뚝 끊어졌다.
미끼를 던진 시후는 먹잇감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빠르게 액정화면을 클릭했다.
일전에 가정부 김미숙을 시켜 강성호의 침실에 설치했던 도청기의 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전용 어플을 들어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강시후 이 자식은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애초에 전화를 건 의도는 강 회장을 떠보는 데에 있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만 보더라도 충분히 물증을 잡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낮게 욕지거리를 뱉은 강 회장은 곧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어, 김 실장.
청력에 온 신경을 집중한 시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강 회장이 전화를 건 상대는 그의 수족과도 같은 비서실장인 김정수였다.
-지금 당장 강시후한테 붙였던 놈들한테 연락 넣어봐라. 아무래도 그 자식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상황 파악해서 빨리 보고해.
녹음을 듣는 시후의 눈썹이 세차게 올라갔다.
도청되고 있는 사실을 이미 알고 연기하는 게 아닌 이상, 그는 겨울이 행방불명된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보다 그쪽은 아직도 소식이 없나?
……그쪽?
-이 자식이……. 감히 이 강성호의 핏줄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는 그 겁대가리 없는 새끼의 배후가 누군지 알아보라고 했잖아!
소리 없이 커진 시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일순 제 귀를 의심한 시후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물증은 없었지만 얼마 전 호텔에서 칼에 찔렸던 사건의 배후는 틀림없이 강 회장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그 사건을 교사한 인간도 강성호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새끼인진 몰라도, 창영이와 집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놈과 아마 같은 놈일 거다.
가파르게 뛰던 심장이 더욱 빠르게 고동치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호텔에서 날 칼로 찌른 것도…….
강창영과 유서진을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고 한 것도 강성호의 짓이 아니라고?
그러면 지금 겨울이를 납치한 인간도…….
시후의 등골로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혼란이 깊어져만 갔다.
가장 유력한 범인 후보를 잃고 나니, 길을 잃은 것처럼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하.”
단서가 전혀 없었기에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욱신거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자 과열되었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겨울을 찾으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던 이성은 뒤이어 메일로 도착한 사진 한 장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게 무슨…….”
시후의 호흡이 멈추었다. 심장이 아래로 추락하며 휴대전화를 쥔 손이 경련했다.
사진 속 겨울은 팔다리를 완전히 포박당하고 의식을 잃은 채로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경직된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모든 계산과 추리가 백지로 돌아가며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핸드폰을 움켜쥔 손이 분노로 점철되어 떨렸다.
사진과 함께 전송된 메일의 내용은 딱 한 문장이었다.
[당신들도 똑같은 고통을 느껴봐야 해.]
***
흡사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며 찌뿌둥했다.
작게 신음한 겨울은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뻐근한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니 흐릿해진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여기가 어디지.’
입에는 테이프 같은 것이 붙어 있어 말을 할 수 없었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난생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카페 도스 트레스 신코에서 수면제가 든 차를 마신 기억이었다.
가늘게 뜬 눈에 힘을 준 겨울이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된 벽이나 을씨년스러운 건물 내벽을 보아 버려진 폐건물로 추정이 되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고, 안다고 해도 팔다리가 전부 묶여 있는 상황이었기에 시후나 경찰에게 위치를 알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덜컥 공포심이 밀려왔다.
건물 밖은 아직 해가 뜨기 전으로 어둑한 것을 보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듯 보였다.
‘나 사라진 거 알면, 오빠가 걱정할 텐데…….’
지금쯤 시후는 겨울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걸 눈치채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납치된 걸 알아채고 경찰과 함께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불안함이 담긴 눈동자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만약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한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정해진 미래를 따라 죽임을 당하게 되는 걸까?
심지어는 원래 세상을 떠났던 날짜인 3월 22일보다도 한참 먼저…….
‘안 돼…….’
역시 운명을 이겨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던 건가.
두려움이 밀려오고 눈물이 왈칵 터지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만에 하나 내가 이대로 죽게 되면…… 오빠는…….’
죽음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시후가 느낄 죄책감과 절망이 가장 무섭고 두려웠다.
혼자 남겨질 그가 또다시 겪게 될 참혹한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제발, 그것만은.
겨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뚜벅뚜벅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가까워지자 겨울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다가온 인기척이 바로 앞에서 멈추는 것이 느껴지자 겨울이 움찔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야를 메우는 것은 물병을 따서 건네는 석우의 모습이었다.
“마실래요?”
그는 겨울의 입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어주며 물었다.
하아, 해방감과 함께 거친 숨을 토해낸 겨울이 잇새를 악물었다.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섬뜩해지고 등골로 소름이 돋아났다.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표독스럽게 얼굴을 굳힌 겨울이 석우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날 납치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요.”
석우가 웃음을 터뜨리며 겨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왜일 것 같아요?”
“……이유가 뭐든 빨리 자수하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자수라…….”
픽 실소한 그가 느슨하게 턱을 괴며 웃었다.
“당신 시아버지가 먼저 자수하면 나도 고려해볼게요.”
“……그게 무슨…….”
하, 헛숨을 터뜨린 겨울이 입술을 짓씹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나?”
비스듬히 고개를 튼 석우가 겨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미미하게 웃던 석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굳었다. 느껴지는 한기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당신 아버지와 강성호 회장의 틈에서 개미 목숨만도 못하게 죽은.”
연한 갈색 눈동자가 짙게 물들며 흉흉하게 번뜩였다.
“남동 공장 한재열 사장의 아들, 한석우입니다.”
겨울의 눈동자가 잘게 경련했다.
……남동 공장.
보이스펜에 녹음된 음성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이지코스메틱의 하청 업체였던 남동 공장 한 사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그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와 강 회장 사이에서 죽었다는 게…… 그게, 무슨 뜻이에요?”
“겨울 씨도 그때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아예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건 아닐 거예요.”
“…….”
“당신 아버지 회사 제이지코스메틱이 KU그룹으로 인수 합병되면서, 제이지코스메틱의 하청 업체들은 전부 그대로 인계되었고 직원들도 대부분 다 고용 승계되었죠. 그런데…….”
석우의 입매가 수분기 없이 싸늘하게 말랐다.
“문제는 당신 아버지였어요. KU그룹에서 횡령을 한 죄로 1년도 안 되어서 쫓겨났죠.”
“…….”
“그때 당신 아버지만 쫓겨난 게 아니었어요. 인계되었던 제이지코스메틱의 하청 업체들은 전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 당하고 고용 승계됐던 직원들도 전부 목이 날아갔어요.”
겨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놀라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피해를 본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당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했죠.”
늘 아버지의 관점에서만 생각했었기에, 다른 이들의 입장은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문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먼지만 날렸던,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초라했던 아버지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찾아오는 조문객이라고는 오직 빚을 갚으라며 삿대질하고 소리 지르는 빚쟁이들밖에 없었던 그때.
겨울은 생전에 아버지에게 로비하기 바빴던 인간들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다며 원망하고 증오했으나 실상은 이렇듯 잔인한 것이었다.
“그때, 내 아버지가 30년 가까이 운영하던 남동 공장도 도산할 위기에 놓이고 빚더미에 나앉았어요.”
그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석우는 자조하듯 웃었다.
“아버지는 강성호 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계약 파기를 철회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만, 그 인간은 도둑놈인 함병식이 쓰던 인간은 쓰지 않겠다고 말했죠.”
충격에 물든 겨울의 치열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강 회장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에게 거짓 누명을 씌우고 그걸 빌미로 수백 수천 명의 가정을 파탄 낸 것이었다.
분노의 화살이 자신이 아닌 함병식 회장이 되도록…….
“그리고 강 회장은 내 어머니에게 접근해서, 계약을 다시 성사시켜줄 테니 몸을 팔라고 했죠.”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추악한 악행이었다.
“빚은 이미 평생을 일해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선택권이 없었던 어머니는 그 인간이 해달라는 대로 했고…….”
“…….”
“그걸 알게 된 아버지는 그 길로 한강에 투신했죠.”
아래로 처박힌 겨울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었다.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란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토록 잔혹할 수 있는 건지,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밀려와 가슴이 섬뜩했다.
“그런 아버지 장례식장까지 찾아와서 어머니를 겁탈하려 한 게, 그 강성호란 인간의 실체에요.”
덤덤하게 말하는 듯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 충격으로 완전히 미쳐버린 어머니는 몇 번이고 자살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정신 병원에 입원했죠.”
“…….”
“10년이 넘는 지난 세월 간, 내가 이성을 붙잡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니 하나였는데……”
석우가 쓰게 웃었다.
“결국 작년 3월 새벽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겨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그때 결심했습니다.”
석우의 눈이 살기를 띠고 번뜩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가족을 파탄 낸 강성호 회장과…… 당신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고.”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인간에게 전부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느낀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팔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내가 받은 고통,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이 어떤 건지…… 그대로 돌려줄 거니까.”
고개를 내린 석우가 겨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겨울 씨도 기대해요.”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