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너의 봄을 되찾아줄게
(103/112)
103. 너의 봄을 되찾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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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너의 봄을 되찾아줄게
2022.09.25.
내내 꺼져 있던 겨울의 휴대전화 위치 신호가 다시금 잡힌 것은 새벽 2시경이었다.
경찰들이 GPS로 찍히는 위치를 추적하니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한 공사장이었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내부에 잠입하여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겨울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목격할 수 없었다.
한참의 조사 끝에 발견된 것은 고철 덩어리 아래에 깔려 덩그러니 버려져 있는 휴대전화뿐이었다.
“하…….”
일부러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연막용으로 두고 간 것이었다.
자그마한 희망까지 틀어막힌 시후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쏟아내며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 이렇게 방황하는 순간에도, 겨울은 홀로 드넓은 바다에 버려진 것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을 터였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심지어 납치범은 그 흔한 요구사항조차도 없었다.
차라리 돈을 달라고 했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아니, 빚을 내서라도 값을 치르고 그녀를 돌려받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로 보아 애초에 돈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 아닌 것 같았다.
시후가 잇새를 악물었다. 심장이 무자비한 속도로 펌프질하는 반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장에라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팔다리가 전부 묶인 채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아무렇게나 으스러져 기절해 있는 겨울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제발…….”
이럴수록 약해지면 안 되는데. 냉정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책임지고 목숨을 걸어.’
떨리는 눈꺼풀을 감은 시후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재생되는 것은,
‘미래의 내가,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너. 서른한 살의 강시후를 원망하지 않도록…….’
8년 후 겨울이 없는 세상에서 온 자신이 제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최선을 다해,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바라던 건…….
단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겨울을 지키는 것.
시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냉정을 되찾은 시후가 자동차 서랍 안에 보관해두었던 서류와 시계를 꺼냈다.
전부 미래에서 온 강시후가 제게 남기고 간 물건들이었다.
분명히 이 안에 숨겨진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다시금 천천히 서류를 살펴보았다.
“이 시계…….”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원래의 미래에서 겨울이 사망하던 날 차고 있던 시계였다.
사고가 난 시각은 새벽 3시경이라고 적혀있는데, 손목시계의 시간은 정확히 6시 34분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시간을 맞추어 놓고 더는 시간이 흘러가지 않도록 정지시켜놓은 것처럼 말이다.
“6시 34분…….”
폭발에 휘말려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겨울의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였고, 물속에서 숨을 거두기 전 메시지를 남길 방법은 오로지 차고 있던 시계뿐이었을 것이다.
“0634……?”
간단하게 생각해서 그녀가 남긴 시간은 4개의 번호를 뜻하고 있었다.
이 네 자리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범인에 대한 단서일 게 틀림없는데…….
여러 자리가 필요한 전화번호는 일단 아니었고, 표현하기 어려운 주소 같은 것도 아닐 터였다.
“네 자리…….”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시후의 눈가에 냉기가 서렸다.
곧장 휴대전화를 움켜쥔 그가 빠르게 번호를 눌러 통화버튼을 클릭했다.
-어, 시후야.
전화를 받은 사람은 현재 겨울의 수색에 힘을 쓰고 있는 경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후와 옛날부터 인맥이 닿아 있는 지인으로, 유서진과 강창영의 사고를 조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줬던 사람이었다.
-지금 경기 쪽 관할서에도 협조 요청을 했는데…….
“아니, 그보다 지금 빨리 차량 번호 조회 하나만 좀 부탁해.”
-차량 번호? 갑자기 그건 왜?
“나중에 설명할 테니 바로 0634로 차량 조회해줘.”
-아, 알겠어. 잠시만.
잠시간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시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숨을 삼켰다.
1분이 마치 1년처럼 억겁같이 느리게 흘렀다.
-지금 조회해봤는데, 0634 번호를 가진 차량이 수백 개가 나와서 특정화가 불가능해.
인내의 시간 끝에 들려온 말은 절망 그 자체였다.
-앞에 차종 기호는 몰라? 전체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일단 서울에서 경기도 쪽 차량만 리스트업해서 넘겨줘.”
-아…… 하지만 이게 관계자 아닌 사람한테 넘기는 건 좀…….
“넘겨. 책임은 전부 내가 질 테니까.”
단호한 음성에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알았다는 대답이 뒤를 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시후의 메신저로는 차량등록원부에 등록되어 있는 0634의 번호를 쓰고 있는 차량들의 목록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차량은 너무나 많았고, 이곳에서 누군지도 모를 범인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
태블릿PC를 움켜쥔 손이 떨리며 뼈마디가 아릿하게 진동했다.
계속 바라보고 있어 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으나,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차마 놓지 못했다.
깊게 숨을 내몰아쉰 시후가 미련이 담긴 눈으로 목록을 훑어보았다.
범인의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아 면식범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아는 이름 위주로 검토하며 내려갔다.
“잠깐…….”
그때, 문득 익숙한 이름 하나가 시야에 걸렸다.
“……한석우?”
이 이름. 어디에선가 분명…….
미간을 좁힌 시후의 뇌리로 한 가지 기억이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겨울이 클레르를 다닐 때 틈만 나면 작업을 걸던 재수 없는 카페 사장의 이름도 한석우였던 것을 떠올렸다.
“주소지도 서울…….”
아주 특이한 이름은 아니었으니,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불어오는 미심쩍은 직감에 왠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문서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꿰뚫을 듯이 까만 활자를 읽어내려갔다.
차량은 2022년 10월에 등록된 것으로, 차종은 2022년형 싼타크 브라운이었다.
잠시 예전의 기억을 더듬은 시후는 작년 11월경, 석우가 겨울을 집까지 차로 데려다줬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우연히 그가 겨울을 집 앞에 내려주는 장면을 목격했었고, 당시 봤던 그의 차종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차종이랑 색깔까지 완전히 똑같은데…….’
그렇다면 이건 그 카페 사장 차?
……이게 우연인가?
하필이면 0634 번호의 차주가 클레르 옆 도스 트레스 신코 사장인 게…….
“……잠깐.”
도스 트레스 신코……?
그건 스페인어로 2, 3, 5…….
일순 멈칫한 시후의 동공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문득 그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은 새어머니 유서진이 죽기 전에 휴대전화 키패드에 남겨 두었던 숫자 다섯 자리였다.
“12345…….”
유서진은 생전에 겨울이 일하는 클레르에 와서 난동을 피운 적이 있었고, 그때 바로 옆에 있는 카페인 도스 트레스 신코를 봤을 가능성이 있었다.
스페인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그녀는 가게 이름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챘을 터.
만약 죽기 전 도스 트레스 신코의 사장 한석우의 얼굴을 목격했던 것이고, 말조차 하지 못할 만큼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그의 가게 이름을 표현하기 위해 키패드를 눌렀던 것이라면……?
남긴 숫자가 2, 3, 5가 아닌 1부터 5까지의 다섯 자리 숫자인 것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상황이었다. 죽어가는 와중에 겨우 딱 한 번 들른 카페의 정확한 이름이 기억날 리 없으니까.
거친 숨을 내몰아쉰 시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핸드폰을 들어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나야. 123각 0634 차주, 한석우. 지금 당장 이 사람 휴대전화 위치 추적하고, CCTV로 경로 추적해서 차량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 줘.”
이 모든 게 우연일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아마도 그곳에 겨울이가 있을 거야.”
시후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묵직한 숨을 뱉은 그가 전화를 끊고 비장한 각오로 시동을 걸었다.
“…….”
아직 내 여자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길 바란다.
보는 것만으로도 닳을까 아까워서 맘 졸이는 여자인데…….
‘난 오빠랑 있으면 1년 내내 봄이야.’
얼마 전 배시시 웃으며 제게 속삭였던 겨울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환상처럼 들려왔다.
까맣게 물든 시후의 눈동자가 어둠을 밀어내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겨울아…….”
지금 너는 네 이름처럼 추운 겨울이겠지.
어두운 새벽을 견디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무서울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가 뜨기 전에 무사히 널 내 품에 안을 거니까.
반드시 너의 봄을 되찾아줄게.
“……조금만 기다려.”
***
“이제 뭘 어떻게 할 작정이죠?”
겨울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석우를 응시하며 물었다.
앞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석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조소했다.
“글쎄요…….”
“…….”
“일단, 강 회장의 아들에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의 공포를 심어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직전의 두려움, 숨 막힐 듯한 불안…….”
낮게 웃음을 흘린 석우의 표정이 일순 섬뜩하게 굳었다.
“그 이후로는 당신을 미끼 삼아 불러내고, 내 계획의 일부가 되게 만들 겁니다.”
“…….”
석우의 말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한 겨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신을 미끼로 시후를 불러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 겨울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고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으나 이미 투명한 액체는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거 가장 잘 알잖아요.”
공황에 빠질 것만 같았으나, 정신력으로 버티며 입을 벌렸다.
떨리는 입술을 더듬더듬 움직여 그를 설득했다.
“우리 아버지도 피해자였어요. 횡령은 전부 강성호 회장이 뒤집어씌운 거라고요. 무고한 아버지한테 누명을 씌우고 그걸 빌미로 다른 사람들까지 같이 내쫓으려고…….”
말끝을 흐린 겨울이 작게 숨을 내몰아 쉬었다.
“어쨌든 전부 조작이에요. 문서로도 증거가 남았고, 녹음도 있어요!”
“만에 하나 당신 말이 맞는다고 해도.”
“…….”
“당신 아버지가 수천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의 인생을 망친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겨울의 숨이 뚝 끊겼다.
“무능도 죄악입니다.”
여린 눈동자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죽어 마땅한 죄라는 걸 알아야죠.”
붉게 달아오른 겨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커다란 손이 뻗어지며 그 위를 살며시 덮었다.
“함겨울 씨…….”
“…….”
“당신한테는 그 어떠한 죄도 없다는 거 알아요.”
하얗게 질린 뺨을 쓸어내리는 석우의 표정이 일순 슬픔에 젖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겨울은 터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투명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미안해요.”
회한에 젖은 얼굴은 이내 어둑한 그림자에 잠식되어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딴 악마의 자식과 결혼한 당신도……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고 할 순 없겠죠.”
겨울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의 눈빛은 오로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점철되어 첨예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려움에 치열이 떨렸으나, 가까스로 굳은 입술을 움직여 그를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한테 죄가 없듯이, 강시후에게도 죄가 없어요.”
꿰뚫을 듯 쏟아지는 시선에 양 볼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겨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발 이 이상 죄를 짓지 말아요…….”
겨울이 열 오른 눈을 꽉 감았다.
“이건 당신까지 악마가 되는 길이예요.”
그 말에 일순 석우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었다.
잠시 말없이 겨울을 노려보던 그는 더 이상 조소 섞인 웃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적막이 흐르는 공간으로 살벌한 기류가 흐르자 겨울은 숨이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옆에 벗어두었던 코트를 느릿하게 입었다.
겨울은 속절없이 떨리는 동공으로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를 자극하지 마세요.”
그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철컥, 하고 무언가 꺼림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제 이마 위로 닿는 차가운 냉기에 겨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총구는 정확히 제 머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최대한 고통 없이 한 번에 보내줄 마음이…….”
겨울의 동공이 텅 비었다.
“사라지지 않도록 말이에요.”
머리가 까맣게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