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금 진지한 이야기(2)
#2
아데샨 데 아칼루시아.
백만의 군세 위에 군림하는 제국의 대장군이자 아칼루시아의 공작.
거인들의 강림 당시 빠른 대처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영웅.
그녀는 지금 로난의 눈앞에서 개가 물어뜯은 장난감 같은 꼴로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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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샨 대장군님.”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데샨의 상태는 도저히 눈 뜨고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제복은 찢기고 터져서 몸을 가린다는 의복의 기능을 상실한 채였다. 지저분하게 뜯겨 나간 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줄줄 새나오고 있었다.
“로난···상병인가.”
아데샨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댔다. 잿더미를 연상케 하는 회색 눈동자가 로난을 응시했다.
“어쩌다가 이런-”
“잠깐, 내가 먼저 질문하지.”
아데샨은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 입을 열었다.
“아하유테는?”
“제가 죽였어요.”
“확실한가?”
“멀지 않은 곳에 시체가 있습니다.”
“······그런가.”
아데샨이 입술을 비틀었다. 지저분한 뺨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몇 차례 깜빡이더니,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었나.”
아데샨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로난이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고맙다.”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나는 이제···여한이 없다. 귀관은 영웅이다. 세상을 구한, 영웅."
“제기랄, 영웅이고 뭐고 일단 지혈부터 하죠. 상처가 깊어요.”
팔의 상처를 슬쩍 본 로난이 입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덜거리는 살점 밖으로 새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로난은 그녀의 양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쥔 채 다시 벽에 기대어 앉혔다.
“나는 됐다. 이미 가망이 없어.”
“예? 전음으로 저를 부르셨잖아요. 도와 달라고.”
“그 괴물의 생사만 알고 싶었을 뿐이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여한이 없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죠.”
로난이 상의를 훌렁 벗었다. 맹수처럼 잘 단련된 몸은 흉터로 가득했다. 그는 벗은 상의를 길게 찢기 시작했다. 붕대를 대신해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귀관도 고집이 상당하군.”
“미리 말해 두는데, 많이 아플 겁니다. 똥오줌을 지리거나 기절할 수도 있어요.”
“상관 없다. 굳이 할 거라면 빨리 하도록.”
“갑니다.”
로난은 옷감으로 지혈해야 할 부위를 강하게 동여매기 시작했다. 천이 조여들 때마다 고여 있던 피가 상처를 찢고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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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좀 낫군. 아까보다 어지러운 게 덜해.”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기대앉아 있었다. 천으로 몸을 친친 감은 아데샨의 안색은 아까와 비교하면 여실히 나아져 있었다.
“정말 비명 한 번 안 지르실 줄은 몰랐어요.”
“미모만으로 대장군이 된 건 아니지.”
“···보기보다 유머 감각이 있으시네요.”
로난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오러를 개화한 인간이라 그런가? 회복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그나저나···치료를 받았어야 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귀관 같군.”
로난은 바지만 빼고 다 벗은 반라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아데샨과는 달리 그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아데샨은 그가 침을 뱉듯 피를 뱉어내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쯧, 이래서는 저승길 동무만 늘어난 셈이잖나.”
“대장군님은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구조대만 제때 오면.”
“그건 귀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뇨, 저는 못 살아요.”
“무슨 근거로 속단하는 거지?”
“그냥 뭐, 대장군님의 전음을 듣고 일어섰을 때 느꼈어요. 전 죽어요.”
그렇게 말하는 로난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데샨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웃고 있는 건가? 곧 죽는다면서.”
“글쎄요···제가 원래는 진짜로, 허무하게 갈 뻔했는데···.”
로난은 시선을 내려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고향을 떠난 이래로 한 번도 몸에서 떼지 않던 칼이 보이지 않았다. 달려올 때 칼집째로 빠진 모양이었다. 허전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나마 의미 있게 죽을 수 있게 돼서? 칼을 잃어버린 게 아쉽지 않을 정도로.”
“귀관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데샨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로난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평민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만약 살아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게 있나?”
“죽는다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나.”
“백장미 기사단이랑 바다에 가고 싶어요. 전원 알몸으로.”
“썩 괜찮은 꿈이군. 다른 건?”
“음···아카데미를 한번 다녀보고 싶어요.”
“기사 아카데미를 말하는 건가?”
“어디든지요. 오러라는 것도 배워보고 싶고, 마법도 한번 써 보고 싶고···,”
“오러를 개화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아하유테는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건가?”
“붙는게 지랄 맞아서 그랬지, 날개를 자른 뒤에는 별거 없었어요. 공격은 쳐내거나 피하고, 빈틈이 생기면 벴어요.”
“검성이 들었으면 거품을 물고 기절했겠군. 귀관은 모든 노력가에게 사과해야 해.”
“참, 장군님.”
로난은 아데샨과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음?”
“우리 애들, 천박하기는 해도 나름 괜찮은 놈들이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대장군님 권한으로 시체 좀 수습해 주세요. 원래 전사한 징벌 부대원 시체는 그대로 버리고 오거나 모아서 태우는 게 규정이긴 한데, 이번에는 정말 그 자식들 아니었으면 못 이겼을 거예요.”
“상병.”
“부탁드립니다. 위령비 같은 거 세워 주면 더 좋고요.”
로난의 눈동자는 노을처럼 오묘한 주홍색을 띠었다. 한참이나 그의 눈을 바라보던 아데샨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대장군님.”
“흠, 그런 약속을 해 버리면 내가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나.”
“살면 되죠···죽어간 사람들을···위해서라도···컥!”
갑자기 로난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척 봐도 정상적인 양이 아니었다. 아데샨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서렸다.
“이봐, 정신 차려.”
“구조대는···내일이면 올 겁니다···그때까지만···.”
“상병, 일어나라.”
다리로 툭툭 건드려 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도로 돌아가서 개선식에 참여해야지.”
그녀는 로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쯤 벌어진 입 사이로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새나오고 있었다. 길고 짙은 속눈썹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젠장.”
아데샨이 고개를 돌렸다.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녀는 로난이 죽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세 번의 삶을 거듭하며 충분히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아직 인간의 감정이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장군님···.”
그때 로난의 입에서 비몽사몽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데샨이 반색하며 말했다.
“상병, 살아 있었군.”
“빗소리가···멈췄어요.”
“음?”
아데샨은 입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말마따나 쉴 새 없이 천장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위 틈새로 새어든 빛줄기가 주홍빛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비가 그친 모양이군.”
“뭔가···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말인···.”
콰아앙!
별안간 천지가 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강렬한 빛무리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뭐?”
아데샨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천장 역할을 하던 바위는 어디 가고, 저녁놀로 타오르는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 시선이 닿은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기랄.”
셀 수 없이 많은 거인이 타오르는 하늘 속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구름을 걷어내고 비를 그치게 한 것은 광풍을 일으키는 그들의 날갯짓이었다. 지면을 뒤집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불처럼 일어났다.
“세 명이 끝이 아니었나.”
그녀는 허망한 눈으로 강림하는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날개가 여섯 장, 많게는 여덟 장까지 달려 있는 거인도 있었다. 척 봐도 아하유테보다 강해 보였다.
“나는 이번에도, 실패했단 말인가···.”
바로 위에서 내려오던 거인이 팔을 휘둘렀다. 빛으로 이루어진 창 하나가 곧장 아데샨을 향해 쇄도했다. 그녀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서걱!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빛의 창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데샨이 눈을 떴다. 로난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는 그녀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상병.”
“염동 마법이나 바람 마법···쓸 줄 알아요? 뭐든지···띄우는 걸로···.”
“염동력이라니?”
“젠장! 여기서는 칼이 안 닿잖아요!”
로난이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지독한 혈향이 풍겼다. 누가 봐도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거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칼이 안 닿잖아요. 그 한 마디가 아데샨의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그녀는 땅을 박차며 로난에게 몸을 날렸다. 뒤쪽은 가파른 비탈이었다.
“컥!”
두 사람은 뒤엉킨 채 비탈길을 굴렀다. 평지에 도달했을 때, 아데샨이 로난의 가슴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되었다. 로난은 당황하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읍!”
로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데샨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늘어진 머리카락이 코와 눈을 간지럽혔다.
로난은 차가운 구슬 같은 것이 타액과 함께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주인 모를 피 맛이 비릿했다. 아데샨은 혀로 구슬을 밀어 넣고는 입을 뗐다.
“삼켜라.”
로난은 얼떨결에 그렇게 했다. 구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에서는 수십의 거인들이 원형의 대형을 이루며 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데샨은 로난과 이마를 맞댄 채 말했다.
“귀관이 방금 삼킨 건 시간을 되돌리는 구슬이다. 재단사의 딸에 불과하던 내가 대장군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지. 나는 이걸로 세 번의 삶을 살았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에요!”
“그렇게 들리겠지. 나도 그랬으니. 이 보물은 총 네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데, 내가 한 번 빼고 다 써버렸다. 이유는 안 말해도 알겠지?”
아데샨은 턱 끝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주위의 빛이 거인들의 손으로 모여들며 창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난 귀관에게 걸어 보기로 했다. 귀관의 기이한 무재(武才)는, 삶을 거듭해온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종말을 막아낼 열쇠라고 생각한다.”
“썅! 저리 비켜요!”
“배움을 원한다면 필레온으로 가라. 기라성같은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니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다.”
아데샨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창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창은 거인의 수만큼 존재했다. 날개가 달려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참, 만약 돌아가서 나를 만난다면, 헛짓거리하지 말고 재단사나 하라고 전해 주겠나?”
“아데샨!”
사위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지간한 건 다 해 봤는데, 그만한 게 없더군.”
날아든 창이 두 사람을 동시에 꿰뚫었다.
***
“허어억!”
로난은 솟구치듯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가슴을 내려다보았지만 구멍은 뚫려 있지 않았다.
“여, 여긴···.”
그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옥 같던 전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풀 내음 가득한 언덕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양을 몰 때 사용하는 기다란 작대기가 놓여 있었다.
언덕 아래에는 작은 마을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을 따라 굽이도는 강 위에서는 아이들이 뗏목을 타며 놀고 있었다.
추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난은 죽은 사람을 부르듯이 고향의 이름을 읊조렸다.
“님버튼.”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로난은 손을 뻗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보물이 어쩌고 하던 아데샨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돌아온 건가?”
그는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아직 다부지지 않은 소년의 몸이었다. 기껏해야 열다섯 살 정도일까? 로난은 허벅지를 꼬집고, 공중제비까지 돌아본 후에야 그는 작금의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 진짜 돌아왔네.”
홍수처럼 범람하는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먹었던 음식, 좋아하던 노래, 방랑길에 올려다본 별 가득한 하늘과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누나.”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은 아직 그녀가 살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가족. 가출한 동생과 끝내 만나지 못하고, 거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상냥한 누이.
“이릴 누나.”
그리 읊조린 로난이 작대기를 집어들었다. 점점 빨라지던 그의 걸음은 이윽고 전력을 다한 뜀박질이 되었다. 머지않아 그가 살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나 언덕을 거의 다 내려온 차에, 거슬리는 소음이 그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제때! 돈을! 가져와야 할 것! 아니야!”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인근의 언덕 위, 거대한 참나무 아래에서 로난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들이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를 둘러싼 채 밟아 대고 있었다. 낄낄대는 면면 중에는 로난이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음? 저놈은···?”
그중 한 명은 유난히 낯이 익었다. 머리카락이 새빨간 소년이었는데, 키가 독보적으로 작은 탓에 더욱 눈에 띄었다. 이름이 아셀이던가? 로난은 턱을 매만지며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마법사 아니었나?”
고민하던 로난이 발걸음을 돌렸다. 비단 아셀 때문이 아니더라도 애새끼들이 애새끼를 패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험 삼아 휘둘러본 작대기에서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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