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백작이 될 소녀(3)
#9
여관 <춤추는 노새>의 201호.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바닥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었다. 검, 포션, 반지 등 종류는 제각각 다른 물건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반짝거린다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마르야는 바닥에 늘어선 전리품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게 안 팔고 남긴 물건들이야? 너희가 쓴다던?”
“응.”
“꽤 상등품들이네···칼은 왜 세 자루나 남겼어?”
“금방 부숴먹거든.”
벌써 듬성듬성 이가 나간 한스의 검이 그 증거였다.
저번 삶에서도 로난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무기를 교체하고는 했다. 어지간한 무기는 그의 쾌검(快劍)을 감당하지 못했다.
“뭐, 그래도···아, 씨. 아직도 지끈거리네. 살살 좀 하지.”
마르야는 머리에 난 혹을 매만지며 투덜댔다. 로난은 입을 벌려서 혓바닥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어퍼컷을 맞을 때 씹은 자리였다.
“이건 참새가 쪼아서 생긴 줄 아냐?”
“치, 힘이 조금 더 셌으면 아주 잘라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아셀이 마법까지 사용해 가며 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기어코 주먹을 한 번씩 더 주고받았다.
마르야는 팔꿈치로 로난의 목을 찍었고, 로난은 아까와 같은 자리에 꿀밤을 꽂았다.
마르야는 체구에 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셌지만, 결국 로난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 마르야가 패배를 시인하는 것으로 승부는 끝이 났다.
“그나저나 어지간히도 험하게 쓰나 보네. 칼잡이라면 칼을 소중히 다뤄야지.”
“칼은 그냥 도구일 뿐이야. 누가 휘두르느냐가 중요하지.”
“오~실력에 자신이 있나 봐? 나중에 대련이나 한번 할래? 이래 봬도 우리 상단에서는 내가 제일 세거든.”
“그러던지.”
소동이 끝나자 로난과 마르야는 그럭저럭 친해졌다. 서로가 서로의 배짱을 높게 산 덕이었다.(아셀은 이 과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광장으로 나가 마르바스의 명물이라는 가재 파스타를 먹은 뒤 숙소로 돌아왔다.
마르야는 필레온에 대한 정보를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지금은 소년들이 일부러 팔지 않은 전리품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뭐, 어쨌든. 여기 남아 있는 물건들은 다 쓸만한 것들이야. 특히 이 롱소드는 진짜 흑철로 만들었어. 관리 상태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확실해?”
“내 안목을 못 믿는거야? 금속 관련해서는 우리 아빠도 나한테 물어볼 때가 많아.”
흑철은 이름 그대로 검은색을 띠는 철이었다. 희소성이 높고 강도가 강해서 주로 기사나 귀족들의 무기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
흑철로 만든 검은 로난도 꽤 선호하는 무기였는데, 여섯 달 정도는 막 써도 거뜬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이 지팡이에 박힌 돌도···진짜 마석이야. 어이, 거기 귀염둥이.”
짐을 정리하던 아셀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마르야의 손에는 1m정도 되어 보이는 금속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흑철검과 마찬가지로 팔지 않고 남겨둔 물건이었다.
“응? 설마···나?”
“그럼 저 야만인한테 한 말이겠니? 경황이 없어서 아까는 못 물어봤는데, 너 마법사지?”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야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를 향해 지팡이를 던졌다. 화들짝 놀란 아셀이 염력으로 지팡이를 멈춰 세웠다.
“다, 다칠 뻔했잖아!”
“게다가 염력···너는 잘하면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입학하겠다. 그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야.”
아셀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끝 부분에 박힌 돌에 마나가 모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아 남겨 둔 건데, 진짜 마법 지팡이일 줄 몰랐다.
마법 지팡이 자체도 비싼데, 마석까지 박혀 있으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비쌀 터였다. 마르야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로난을 돌아보았다.
“문제는 우리 둘이네. 보여줄 기술은 뭘로 할 거야?”
“기술?”
“그래, 필레온의 실기는 유명하잖아?”
응시생들은 교수진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 앞에서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을 선보여야 했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를 합쳐서 총 8일동안 진행되었다. 앞선 7일동안 실기시험을 치르고, 마지막 하루에 일괄적으로 필기시험을 보는 형식이었다.
필레온의 입학 시험은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경쟁률을 자랑했다. 신분과 출신을 불문하고 10살에서 15살 사이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든지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기와 필기는 배점에서 확실한 차이가 났다. 필기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합격 여부를 가르는 시험은 역시 실기시험의 점수였다.
“어중떠중이도 많지만 인재도 많아. 네 가치를 증명해야 해.”
“니미, 칼잡이가 잘 죽이기만 하면 됐지. 보통은 뭘 보여주는데?”
“음···글쎄? 귀족들은 가문의 비기를 시연하는 경우가 많고···바위처럼 단단한 걸 자르는 것도 한동안 유행했어. 그런데 가장 흔한 건 역시 마나를 활용한 자신만의 전투법을 보여주는 거지.”
“잠깐.”
일순 로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좁혀진 미간에는 불신과 의문이 잔뜩 맺혀 있었다. 마르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10살에서 15살이면 아직 거기에 털도 다 안 난 애새끼들이잖아. 마법사도 아닌데 마나를 다룬다고? 내가 저능아로 보여?”
“응···? 오러가 아니라 마나라니까? 전투에 적용하는 정도는 감응만 할 줄 알아도 되잖아?”
“오러랑 마나가 다른 거냐?”
“...뭐?”
쿠궁!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르야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콩벌레와 드래곤의 차이점이 뭐냐는 질문을 듣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마르야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마나 감응은 할 줄 알지?”
“그건 또 뭐야?”
“아.”
벼락이 한번 더 떨어졌다. 로난의 대답은 ‘못한다’ 도 아니고 무려 ‘모른다’ 였다.
노력이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서 감각을 틔우지 못한 것이 아닌, 마나 감응 자체의 개념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녀가 알기로 필레온 무예과에 합격한 이들 중 절반 정도는 마나를 단순하게나마 다룰 줄 아는 ‘소드 유저’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당연하게도 기본 중의 기본인 마나 감응을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과 같은 필레온 지망생이 아닌가.
“장난치는 거지? 정말 몰라?”
“모른다니까. 괜히 말 돌리지 마 인마. 그래서 오러랑 마나가 뭐가 다른 거냐고.”
그녀는 할 말을 잃은 채 눈앞의 저능아를 바라보았다. 로난의 눈초리는 아직도 의심으로 가늘어져 있었다.
마르야는 당황이라는 감정이 실시간으로 분노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나는 마나와 오러도 구분 못 하는 천치에게 대륙에서 제일가는 아카데미의 입시 요강을 알려 준 거구나. 그것도 한나절 내내 정성을 들여서.
가만히 앉아 헛웃음을 짓던 그녀가 침대를 박차며 일어섰다.
“따라나와.”
“엉?”
“지금 하자, 대련. 니가 그렇게 궁금해 하는 오러랑 마나가 뭐가 다른지 알려 줄게. 멍청한 마나 감응에 대해서도.”
마르야는 바닥에 놓인 숏 소드 두 자루를 집어들었다. 로난이 사용하기 위해 남겨둔 나머지 검들이었다.
흑철처럼 귀한 금속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만듦새가 좋은 강철 검이었다.
“하도 당당하게 집어들길래 속을 뻔 했네. 그거 우리 거야 인마.”
“내 칼을 두고 와서 그래. 어차피 순식간에 끝날 텐데, 한 번만 쓸게.”
“상하면?”
“하···두 배. 아니, 세 배 가격으로 물어줄게. 됐지?”
“뭐, 그 조건이라면···”
쾅! 마르야는 로난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걷어차며 나가 버렸다. 놀란 아셀은 딸꾹질을 시작했고, 로난은 여자라는 족속은 가끔씩 저럴 때가 있는 법이라며 아셀에게 조언하고는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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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는 삼라만상의 근원을 이루는 힘이다.
흔히들 말하는 오러나 마법, 코어나 서클 같은 개념은 마나의 종류나 다루는 방식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마나 감응이란 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이름 그대로 마나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되는 시기는 개개인마다 달라. 죽을 때까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최소한의 재능만 있다면 보통 1년 이대로 감각이 트여. 물론 중요한 건 그다음이지만.”
세 사람은 여관에서 나와 근처의 공터로 이동했다. 삼면을 둘러싼 울타리 너머로 대로변의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르야는 로난을 기준으로 다섯 발자국 정도를 걸어간 뒤 몸을 돌렸다.
“크게 보면 오러도 마나의 일종이지만, 그 두 개를 같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러’는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고유의 마나를 지칭하는 말이야.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연의 마나가 아니라.”
“한마디로 남의 똥이 아니라 내가 힘 줘서 뽑아낸 내 똥이라는 소리군.”
“꼭 그딴 예시를···하, 아니다···.”
마르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로난에 대한 기대치를 어디까지 낮춰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로난이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질문했다.
“하나 궁금한게 더 있는데. 그 오러를 개화? 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당연하지. 오러를 개화했다는 건 대체가 불가능한 자신만의 마나를 창조해냈다는 뜻이니까. 재능 있는 사람이 꾸준히 단련해도 최소 10년은 걸리는 게 오러 개화야.”
“···그래?”
로난은 지금껏 베어넘긴 적수들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러를 개화했다는 놈들은 유난히 싸우기 전에 말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이 몸은 오러 사용자니 지금이라도 싹싹 빌라는 느낌으로.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요상하거나 쓸데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어마어마한 노력의 결과라 생각하니 어쩐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목이 떨어지면 다 죽던데.
“그럼, 시작할까?”
마르야는 양손에 쥔 검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매끄럽게 그려지는 두 개의 원이 그녀의 재능을 반증하고 있었다.
근력과 손목의 유연성이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선보이기 힘든 묘기였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흑철로 만들어진 새 검이 아닌, 이가 나간 한스의 검이 스르릉 뽑혀 나왔다. 마르야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물었다.
“그 칼로 하게? 깨지거나 부러지면 다친다?”
“됐으니까 시작이나 해.”
“···뭐, 그러시다면야.”
빙빙 돌아가던 숏 소드가 회전을 멈췄다. 그녀의 실력은 소드 유저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단순히 체내에서만 마나를 순환시키던 경지를 떠나 검에다가 마나를 실을 수 있는 단계.
마나 사용자들 중에서는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지만, 일반인들과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났다.
‘시험장에서 수치를 겪을 바엔, 여기서 한계를 느끼고 돌아가는 게 나을 거야.’
사실 그녀의 화는 이미 풀린 뒤였다. 자신의 분노가 로난의 무지가 아닌, 대책 없는 면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로난을 나름 괜찮게 보고 있었다. 말투는 천박하고 행동거지는 망나니 같았지만 개자식은 아닌 것 같았다. 같이 아카데미를 다니면 즐거울 것 같았는데.
이 대련은 일종의 자비였다. 마르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럼···준비···.”
심판을 맡은 아셀이 초읽기를 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셋, 둘, 하나. 마지막 손가락이 접히는 순간, 마르야의 몸이 쏘아지듯 뛰쳐 나갔다.
캉!
세 개의 검로가 교차하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로난은 제자리에 선 채 응수했다. 맞닿은 검신이 삐걱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제법인데?”
마르야는 진심으로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첫 공격이 막힌 것은 굉장히 오랜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쥐고 있는 두 개의 검에는 모두 마나가 실려 있었다.
“너···정체가 뭐야?”
“로난. 그나저나 힘 하나는 진짜 더럽게 세네.”
놀란 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야의 힘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도류를 활용한 사나운 강검(強劍)은 거대한 고양잇과 맹수의 턱을 연상케 했다.
손목이 징징 울리는 것이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귀찮아질 것 같았다. 로난이 말했다.
“빨리 끝내야겠다.”
맞닿았던 칼이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몸을 숙인 로난이 튕기듯이 검을 휘둘렀다. 마르야는 응수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뒤로 뺐다. 검격은 아슬아슬하게 마르야의 검을 스쳐 지나갔다.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일반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칼솜씨였다. 차분했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마르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 내 칼을 가져올 거 그랬어.”
“아닐걸.”
그런데, 갑자기 로난이 칼을 집어 넣었다. 막 공격에 들어가려던 마르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로난은 마르야를 흘겨 보며 영문 모를 말을 지껄였다.
“세 배랬다.”
로난은 아무 말도 없이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던 마르야가 짜증스레 그를 불러세웠다. 이건 싸다가 끊긴 수준이 아니라, 싸려 하는데 변기가 폭파된 꼴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재능 있어. 그런데 무게 중심이 약간 오른쪽으로 쏠려 있더라.”
잔돈은 됐다는 듯한 말투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려는 차였다.
챙그랑.
마르야의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잘려나간 검신 두 개가 발밑을 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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